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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대상 - 백색왜성의 꿈 - 아버지가 된 소년과 그의 소중함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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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26. 17:26


백색왜성은 위대한 별들의 마지막 종착지다. 별은 소멸의 과정을 거치며 자신이 만들어낸 물질을 우주 공간으로 내보낸다. 이것은 행성의 구성 물질이 되기도 하고 생명체의 구성 성분이 되기도 한다. 오랜 여정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별은 백색왜성이 된다. 그리곤 천천히 식어가다가 마침내 빛을 내지 못하는 암체로 그 일생을 마감한다.

- 별의 죽음에 관하여, 한스 베테


빨래를 하려 무심코 집어 든 아버지의 낡은 양복 주머니에는 언제부터 인가 바지만큼이나 구겨진 복권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의 빚과 퇴직을 안 것은 그 후로 몇 달이 더 지나서다. 한동안 어두운 표정이시던 어머님은 이곳 저곳을 다녀보시고는 아무 말이 없어지셨다. 

"느그 아부지 그래도 저 좋자고 쓴 돈은 한 푼도 없더라."

그리곤 어머니는 그저 아버지의 곁에 앉아 담담히 침묵을 지키셨다.

나야 아무 말없이 헤헤 웃고 말았지만 그래도 이따금 문득문득 아버지의 복권들이 떠오르곤 했다. 평생 근면 성실을 미덕으로 여기며 살아온 당신은 그동안 매주 어떤 마음으로 홀로 복권을 사 맞춰 보았던 것일까. 한번 기대한 적 없던 요행을 바라며 아버지는 그것으로 대체 무엇을 사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 집 안방 침대 옆에는 작은 밥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내 방에 있는 크고 편안한 책상과 달리 작고 낡은 그것에서 아버지는 틈틈이 책도 읽고 사무를 보셨다. 이따금 보면 아버지는 수첩에 뭔가를 열심히 쓰고 계셨다. 매해 새로 사곤 했던 내 다이어리와 달리 회사에서 받아 오신 'ㅇㅇ은행'이 적힌 수첩에. 그리고 책과 서류는 밥상에 그대로 보관하셨는데, 유독 그 수첩만은 서랍 속에 넣어 두셨다.

아버지께서 자리를 비우신 틈을 타 서랍을 열고 수첩을 몰래 들추어 보았다. 아버지의 크고 작은 일상들. 자식에 관한 고민, 옛 친구들의 안부, 삶의 고단함과 아쉬움 등 유달리 말이 없으시던 당신의 생각이 수첩 빼곡히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스로와 대면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날부터 나는 이따금 그 노트를 몰래 읽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인생에 관한 두려움과 희망, 또는 실망감의 흔적들을 발견하였다. 완벽한 줄 알았던 당신 역시 고독하고 불안했음을 목도한 순간이었다.

아버지께서 퇴직한 정확한 날짜를 나는 수첩을 보며 처음 알 수 있었다. 빨간색 펜으로 표시된 그 날짜에는 퇴직금의 액수가 꼼꼼히 적혀 있었다. 그리곤 펜으로 찍찍 그어 몇페이지를 넘어가도록 고민한 흔적들. 마지막 페이지에는 생선 살 발라내듯 살뜰히 쪼개진 퇴직금의 사용처가 적혀 있었다. '반절로 우선 상환할 것', '어머니 건강 검진 비용', '어머니 용돈', '생활비', '아내 생일', '아들 등록금 납부일'

가장 사적인 곳에서조차 결국 대개 아버지의 불안과 걱정은 당신 스스로보다 가족들을 향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건강에 관한 걱정. 아내에 대한 미안함. 아들을 향한 책임감. 아버지가 어려움 속에 평생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종이 쪼가리에 희망을 걸었던 것은 그가 지키고 싶었던 소중함이 자신이 아닌 타인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복권으로 아버지는 수첩에 밑줄이 잔뜩 쳐져 있던 '아들 등록금' 이 갖고 싶었고 몇 번을 메모해둔 '아내 생일' 을 사고 싶어 하셨다.

차츰 아버지 역시 아버지로 태어나지 않았음을 곱씹게 된다. 시간을 거슬러 오르면 그곳에는 아버지가 아닌 자그마한 소년만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작은 소년에게는 그저 지금만이 있었을 것이다. 그 오래전의 '지금'들은 매일의 아침과 저녁이 아직 놀라움으로 가득할 무렵에는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흘러 들어가며 채색이 바랬고 그것들은 기억으로 변해 소년의 곁에 자리했다. 첫눈, 첫 자전거, 첫사랑, 첫 친구. 그렇게 입에 굴리고픈 처음이라는 달콤한 단어들이 기억으로 변하며 어깨 위에 소복이 쌓여 그는 키가 자랐다. 리고 더 이상 그의 어깨가 새로움을 감당하기 어려워진 나이에 이르러서는 또 다른 '지금'들이 그의 얼굴 위에 주름으로 생채기를 내며 흘러내렸다.

무엇이 소년을 어른으로. 또 아버지로 만드는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아주 어릴적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할머니께서 적적하실까 두려워했던 가족들 덕에 한동안 할머니 댁에 머무른 적이 있다. 할머니 집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다 다락방 한편에서 낡은 기타를 보았다. 

"할머니 이건 뭐야?"

"으이 너거 아부지 옛날에 매일 바다에 가 기타 치는 마도로스가 되고 싶다 했디야."

그러고 보면 옛 사진 수북한 할머니 댁 앨범에는 지금의 나와 많이 닮은 소년이 기타를 늘 품에 안고 서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 수첩에 빼곡히 들어찬 메모와 낙서 중 어디에도 배나 기타는 없었다. 어쩌면 당시 어린 내가 봤던 것은 그저 낡고 줄 끊어진 기타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아버지가 그 옛날 어디쯤엔가 두고 온 소중했던 꿈의 조각이었을 것이다. 스물여섯 먹은 내가 학교를 돌아다니는 새내기들을 보고 아직 크게 다를 게 없는데라는 생각을 종종 하듯, 아버지의 생은 기타 치고 노래하기 좋아했던 소년과 단절적이지 않을터였다. 아버지라는 보편적 위대함 아래 당신 역시 나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을진데. 당신에게 역시 소중히 품었던 당신만의 꿈이,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소년에게는 그저 어느 순간부터 지켜야 할게 생긴 것이다. 수첩에 잔뜩 메모해 놓은 그것들. 자신의 소중한 것이 그것들로 바뀌어 가며 소년은 기타를 내려놓았고 아버지의 은하에는 새 행성들이 들어찼다. 그래서 어느샌가부터 내색하지 않음에 익숙해져 슬플 때면 헛기침을 하게 되었고 두려울 때면 무표정을 지켰다. 아무 연습 없이 닥친 위기 앞에 서툴게 나마 최선을 다하려 했다. 괜찮은 체를 잘하게 되었고 그렇게 가지고 싶은 것들이 점점 줄어들며 아버지는 끊임없이 가족을 중심에 두고 공전했다. 타인을 중심으로 공전하여 더 이상 스스로를 축으로 자전할 힘을 잃은 별처럼 그렇게 소년은 아버지가 되어 갔다.

집은 서서히 안정을 찾았다. 없는 것은 없는 대로, 그리고 필요한 것은 아껴가며. 어머니는 일을 나가셨고 나는 아르바이트를 한 개 더 해야 했다. 새로 생긴 빈곤은 제법 많고 넉넉한 편이라 가족들이 모두 나누어 짊어졌지만 여전히 제법 무게가 나갔다. 아버지께서는 따로 별달리 그것들에 대해 말씀은 없으셨다. 다만 그전보다 더 일찍 일어나 집을 나서셨고 더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돌아오셨다. 꼭 본래 자신이 늘 지탱해온 짐을 조금 나눈 것에 대한 사죄를 하시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외에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더 흘러 우리 가족은 꽤 많은 궁핍을 덜어 내었고 더 이상 아버지의 주머니에서 구겨진 복권들은 나오지 않았다.

이제 나는 조금 더 씁쓸해지고 만다. 아버지 복권의 목적이, 그리고 그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명확해진 탓이다. 힘겹게 빚을 털어 내고 아버지는 일을 그만두셨다. 그리고 갑작스레 당신에게 주어진 많은 시간들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하셨다. 집을 비우는 일은 적으셨다. 이따금 친구들을 만날 때면 아이처럼 웃으시며 집에 돌아오셨다. 내가 집에 돌아올 때면 방에서 굳이 나와 엷은 미소를 띠어 주셨다. 대개의 시간은 티브이를 친구 삼아 하루를 마감하셨다. 누구보다 바쁘게 빛나야 했던 아버지는 꼭 서서히 식어가는 백색왜성이 되어 버리신 듯했다. 비추어야 했던 것들이 스스로 빛을 낼 수 있게 되자 아버지는 아주 가만히 옅어져 갔다.

어릴 적 다녔던 초등학교 운동장이 이렇게 작았던가 하는 생각을 이따금 한다. 그리고 함께 밥을 먹고 먼저 일어나는 당신의 등은 또 언제부터 이렇게 작았던가. 아버지는 소년의 위대한 사랑이 다다른 마지막 종착지다. 그가 자신의 별에서 내보낸 빛들은 가족을 지탱했고 내 꿈들을 보듬어 왔다. 오랜 여정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아버지는 서서히 빛을 잃고 백색왜성이 된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가 소중히 지켜온 어머니의 밝은 웃음과 내 청춘의 반짝거림이 어두워진 그의 별을 맴돌며 아주 오래전 잊혀 간 소년의 꿈을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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