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20. 13:00
전공 수업 첫날, 교수님은 나근나근한 목소리로 질문하셨다.
“졸업이 영어로 뭐죠?”
우리는 답했다.
“Graduation입니다.”
‘졸업하다’라는 동사 graduate에 명사 접미사 -tion을 붙여 만든 graduation. 완벽한 정답이었다. 시시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배우는 단어를 왜 물어보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교수님은 무언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거리셨다.
그때,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동기가 번쩍 손을 들고 말했다.
“Commencement.”
그제야 교수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보였다.
나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기에, 얼른 휴대전화로 사전을 검색했다.
‘(명) Commencement, 1. 시작 2. 졸업’
졸업은 끝이지만 동시에 시작이라는 건 논리적으론 모순이다. 하지만, 시간을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원형적인 것으로 본다면, 한끝이 다른 끝과 맞닿아있어 모순이 해결된다.
고등학생의 마지막 날이자, 나의 20살 대학생의 첫 번째 날은 그렇게 교수님의 질문으로 commencement가 되었다.
내가 스무 살이 되던 2012년 그해 봄은 그냥 봄이 아니었다. 신인 가수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 엔딩’이 전 교정을 흩날리고 있었으며, 교양관 벽면에는 국민 첫사랑 수지의 ‘건축학개론’ 포스터가 누군가 첫사랑의 크기로 걸려있었다. 우리 같은 새내기들은 중앙 광장 잔디밭에서는 동그랗게 앉아 자장면과 탕수육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영미 문학 교수님은 이렇게 좋은 날엔 야외수업을 해야 한다며 나무 아래에서 따스한 햇볕을 쪼이며 작품을 감상했다. 그렇게 나는 낭만 가득한 스무 살을 시작한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11학번 선배가 나에게 다가왔다.
“진원아, 진정한 새내기로의 시작은 사발식이란다. 토요일 사발식에 꼭 참석하렴!”
아. 이것이 말로만 듣던 사발식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사발에 막걸리를 듬뿍 담아 한 번에 마신 뒤 게워내는 행사. 이렇게 알고 있었다. 무서웠지만 물어보았다.
“형, 그런데 사발식은 왜 하는 거예요?”
“응, 그건 말이야, 옛날의 안 좋은 나를 비워내고 새로운 나를 시작하기 위한 하나의 행사야.”
정말이지 대학생을 시작하려면 여러 가지를 해야 하는구나고 생각했다. 사발식에서 비워낸 것이 나의 과거인지 아니면 나의 건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대학생을 또 시작했다. 모든 것이 잘 될 거라는 행복한 상상을 하며.
고등학생 때는 대학생만 되면 꽃길이 시작될 줄 알았다. 커피 한 잔을 테이크아웃 해서 수업에 들어가 노트북으로 교수님 말씀을 받아 적으면 당연히 A+를 받을 줄 알았고, 미팅만 하면 여자 친구가 생기는 것이라 믿었다. 또한,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책을 많이 읽으리라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 본다면 이러한 생각들은 망상에 가까웠다.
커피 한 잔으로는 버틸 수 없기에 석 잔, 넉 잔을 마시며 밤을 새워 공부해 B+를 받았으며, 여자들에게는 번번이 차였으며, 동아리 활동은 나에게 사회의 문법을 정확하게 알려준 무시무시한 곳이었으며, 광화문에서 사 온 책들은 먼지만 쌓여갔다.
나는 항상 취해 있어야 했다. 때로는 공부에 취하기도 했고, 어느 날에는 음악에 취하기도 했으며, 사랑과 술에는 항상 만취해 있었다. 아무것에도 취하지 않는 날에는 어김없이 공허함이라는 오랜 친구가 내 머리맡에서 코를 골며 함께 자고 있었다.
그렇게 여러 번의 시작과 끝으로 점철된 대학 생활의 1부는 막이 내렸다. 그리고 몇 번의 사격과 몇 번의 훈련을 마치고 나는 군화를 벗었다. 다시 돌아온 학교에는 익숙했던 얼굴들은 다 떠나가고, 몇 년 전의 나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신입생들이 놀이동산에 온 아이처럼 사뿐사뿐 돌아다녔다.
그 친구들도 조만간 깨닫게 되지 않을까? 청춘이란 달리기와 같이 준비, 땡! 하면 행복한 삶의 길이 대번에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삶은 살아 ‘가는’ 것과 살아 ‘내는’ 것, 그 사이의 어디쯤 있다는 것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스무 살 대학 생활의 시작은 봄에 핀 한 송이의 꽃이었다. 물론 지금은 져버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인생이라는 긴 길의 한 자락에 핀, 단지 한 송이의 들꽃이었다 해도, 그걸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그 꽃은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꽃이 진 자리에 떨어진 씨앗을 새로 심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다시 살아가겠지. ‘맨 처음 씨앗의 마음’을 가지고.고등학생의 3년의 마지막과 대학교의 시작이 맞닿아 있었듯이, 어느새 나는 대학교 4년의 마지막과 사회의 시작의 접점에 다시 한번 서 있게 되었다. 정확하게 언제부터 내가 어른이 된 건는 까먹었지만, 학생이라는 길은 어느새 끝에 다다라간다는 건 명징하게 느껴진다. 그 길이 끝나는 날, 나는 말할 것이다.
누군가엔 이제 ‘막’ 끝이지만, 나에겐 이제 ‘곧’ 시작이라고.
*본 게시물은 2016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수상작으로 상업적 용도의 사용, 무단전제, 불법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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