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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시인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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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9. 18. 15:25

2017 대학생동북아대장정의 주제는 ‘어둠을 밝힌 청년정신’입니다. 주제 인물로 선정된 기업인 신용호와 시인 윤동주의 흔적을 중국에서 직접 보고 돌아왔는데요, 윤동주 삶 속에 청년정신이 어떻게 녹아있었는지 같이 찾아보도록 해요!



명동촌, 윤동주의 고향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명동촌에서 태어났습니다. 명동촌은 1899년 문병규, 남종구, 김약연, 김하규 등 네 가문 사람들이 집단 이주하여 만든 마을입니다.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도 1900년에 명동촌으로 이주하였고 명동촌 이름의 뜻은 ‘동쪽, 곧 한반도를 밝히는 곳’이라고 합니다.


명동촌에 있는 명동 교회에는 윤동주의 생애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윤동주의 학창시절

윤동주의 학창시절은 어땠을까요? 윤동주는 명동소학교 5학년이었던 1929년에 송몽규, 김정우, 문익환과 함께 <새 명동>이라는 잡지를 냈습니다.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후인 1932년에는 용정 은진중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은진중학교는 용정에 있던 5개의 학교와 통합하여 대성중학교가 되었고, 대성중학교는 다시 용정중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알려진 바로는 윤동주는 은진중학교 재학 당시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융변 대회에 나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문학 소년의 면모도 소학교때부터 일찍이 갖추었지만 활동적인 모습 또한 있었던 것입니다.


윤동주가 다녔던 대성중학교에는 윤동주 교실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윤동주의 학창시절을 엿볼 수 있습니다. 대성중학교에서 공부하던 윤동주는 1935년 숭실중학교로 편입하지만 신사참배를 거부한 숭실중학교는 금방 폐교되고, 윤동주는 1936년에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으로 편입을 했습니다. 당시엔 정규 교육 과정이 정해져 있지 않아 기회가 되는 대로 학교를 다닌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윤동주가 느낀 일제강점기

윤동주는 1938년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윤동주가 태어나기도 전인 1910년부터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였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윤동주는 일제의 억압을 받고 자랐습니다. 


<새로운 길>


-윤동주-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너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문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의 <새로운 길>은 이 당시인 1938년 5월에 쓰였습니다. 그 시 속에는 비록 암담하고 어두운 현실이지만 자기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로 꿋꿋하게 향하겠다는 윤동주의 의지가 보입니다.

일제가 우리민족을 억압하는 방법 중 대표적인 것이 강제로 이루어진 창씨개명입니다. 일본 유학을 위해 윤동주는 어쩔 수 없이 ‘히라누마 도주’로 창씨개명을 하게 됩니다. 창씨 후 윤동주가 느꼈던 괴로움은 1939년 9월에 쓰인 시 <참회록>에서 드러나기도 합니다.

1941년에도 윤동주의 창작 활동은 이어졌습니다. <십자가>, <길>, <별 헤는 밤> 등이 이 해에 쓰인 시들입니다. 낯선 일본 땅에서 공부를 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나 너무나 멀리 있는 이상에 좌절 하는 모습, 그럼에도 계속 나아가려는 모습 등이 윤동주의 시속에서 자주 보입니다. 


<서시>


-윤동주-


죽는 날가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무엇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첫 시인 <서시>에서는 직접 부끄럼과 괴로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당시 시를 쓰던 윤동주는 일제강점기라는 현실을 몸소 느끼며 괴로워했던 것을 저희는 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쉽게 씌여진 시>


-윤동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럽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씌여진 시>는 윤동주가 1942년에 일본 릿교대학에 입학 후 쓴 시입니다. 일제는 그 당시 우리민족의 민족성을 빼앗기 위해 한글을 이용한 창작 활동을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윤동주는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 창작 활동을 계속 했습니다. 자신의 이상과 현실의 대립을 느낀 윤동주의 심적 갈등은 그의 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윤동주의 체포와 마지막

그는 같은 해 10월에 도시샤대학으로 편입하지만 다음 해에 바로 일본 경찰에 검거됩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불령선인으로 지목당해 감시를 당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윤동주는 1943년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1944년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사실상 윤동주의 창작활동은 그의 생애보다 더 빨리 끝난 것입니다.


윤동주는 1945년 2월에 광복을 보지 못한 채로 옥사합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 정확한 사유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옥중에서 정체 모를 주사를 주기적으로 맞은 기록이 남아있어 일체 생체실험의 희생자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그렇게 윤동주는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수 많은 창작물을 남겼는데요, 그가 생전 썼던 시들은 묶여 1948년 유고 시집으로 발간되었습니다. 그의 짧은 생애 속 가득했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애국심을 같이 느껴보며 그가 지녔던 청년정신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가 자주 썼던 ‘부끄러움’에 대해서도 느낄 수 있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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