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28. 10:10
막내 왔나?
병실에서 자기 위한 짐이 든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 이모들의 반가운 인사 소리가 들립니다. 23살의 휴학생인 저는 언제부턴가 병실의 막내가 되었습니다.
꽃봉오리가 영그는 1년 전의 이맘때쯤, 우리 엄마는 ‘하인두암’선고를 받았습니다. 물은 커녕 침을 삼키는 것조차 힘든 우리 엄마는 그 예쁘고 아름다웠던 1년 전 봄의 문턱에 멈춰 있습니다.
서른 세 번의 방사선 치료가 결정되고 두 달간의 통원치료 동안 엄마는 의연히 버텼습니다. 여전히 아빠와 동생의 아침 식사를 챙기고 집을 치우고, 저녁 식사를 만들었습니다. 진작 당신이 암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엄마를, 저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유난히 잠이 오지 않던 5월의 밤, 방문을 닫고 뒤척이다가 조금씩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부엌의 작은 조명을 하나 켜 놓고서 혼자 울고 있는 엄마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속 시원히 울지도 못하고 입을 틀어막고 뱉어내는, 억척스레 살아온 인생의 억울함이었습니다. 아마 그 누구도 잠들지 못했을 그 밤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엄마는 ‘식도암’선고를 받았습니다.
총 70여 번의 방사선 치료와 3번의 항암치료, 그리고 다시 새롭게 시작된 2번의 항암치료까지. 우리 엄마는 지금, 처음보다 커진 ‘하인두암’을 치료받고 있습니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암과의 전쟁이 어느덧 1년입니다. 그리고 제가 휴학을 하고 병실생활을 시작한 지 9개월째입니다.
근 1년의 병원생활 동안 느는 것이라곤, 나이 많은 병실 이모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 있는 변죽과 엄마를 대신한 억척스러운 생활력입니다. 제 방 청소도 제대로 못 하던 22살 소녀는 냉장고 청소도 거뜬히 해내는 23살 여자가 되었고, 라면을 끓이는 것이 고작이던 새내기 대학생은 나물까지 무치는 휴학생이 되었습니다. 낯가림이 심해 사람과 친해지는 것이 어렵던 맏딸은 환자들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병실의 막내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참 많이 억울했습니다. 초, 중, 고등학교 동안 장학금을 놓치지 않으며 공부했습니다. 그럼에도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하나 알지 못한 채 등 떠밀리듯 대학을 지원했고 그마저도 제가 원한 것이 아닌 타인이 원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이제 겨우 무언가를 해보고 싶은 욕심과 계획이 생기려는 찰나, 또다시 꿈을 포기한 채 멈춰야 했습니다.
왕복 5시간이 넘는 거리를 홀로 버스를 타고 다니며 오전에는 어질러진 집을 치우고 오후에는 병실에서 쪽잠을 잤습니다. 아픔에 예민해진 엄마의 어이없는 투정과 억지에도 뼈마디가 다 드러난 야위어진 모습에 차마 힘들다고 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꾹 참았던 지난날의 미련이 울컥하고 차오르는 날에는 가로등이 켜지는 버스 창밖을 보며,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물소리만 들리는 욕실에서 혼자 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가오는 내일이 간절했습니다. 쪽잠을 자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눈물을 흘려도 별 일 없이 지나가는 하루가 필요했습니다. 병원에서 더는 해줄 것이 없어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나도, 저는 우리 가족이 함께하는 희망이 필요할 뿐입니다. 계속 악화되는 엄마의 상태에 신경질 냈던 것을 미안해하며, 눈을 맞추고 억지로 물이라도 권해봅니다.
병이 기도와 식도를 막아 기관을 절개해 호흡을 도와주는 수술은 제 생일 앞날에 이뤄졌습니다. 엄마가 목소리를 잃게 된 날은 난생처음 케이크도, 미역국도 없이 보냈던 제 생일입니다. 수술이 끝난 후 엄마가 노트에 썼던 말은 ‘나중에 생일 밥 해줄게’였습니다.
아침이면 방문을 열며 제 이름을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어쩌다 늦으면 어디냐고 묻다가도 장난스러운 심부름을 시키던 엄마의 전화도 받을 수 없습니다. 항상 제일 먼저 일어나 챙겨주던 엄마의 밥상도 없습니다. 엄마가 부르는 제 이름이 듣고 싶고, 엄마의 전화를 받고 싶고, 엄마가 해 준 밥이 먹고 싶습니다. 그때는 이것이 이렇게 간절할 줄 몰랐습니다.
남들이 바라는 평생과 영원은 너무 큰 욕심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건 꿈도 꾸지 않은 채 그저 조금 있으면 다가올 내일이 평범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생명’이 얼마나 무거운 단어인지를 아는 사람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많은 것을 바랄 수가 없습니다. 무서움과 불안함, 모두가 예견하는 미래 속에서 저는 엄마의 딸이기에 희미한 빛조차 포기할 수 없는 겁니다. 나아지지 않는 엄마의 상태에 지친 하루가 반복 돼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끈을 놓을 수가 없는 겁니다. 생명이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랑스레 말할 수 있는 성과도, 눈에 띄게 보이는 변화도 없습니다. 누군가 언젠가는 물어보겠죠. 너는 휴학한 동안 뭘 했니? 남들은 어학연수, 아르바이트, 교환학생 등 감탄을 자아낼 답변을 하겠지만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 누구보다 소중하고 고마운 ‘내일’을 버텨내는 휴학 생활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절대 버릴 수 없는 ‘하루’의 연속이었다고 말입니다.
작년 봄에 멈춰버린 그 시간이 어쩌면 다시 시작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버텨낸 나날들이 었다고. 꽃이 피는 그 문턱 너머 다가오는 계절을 온 마음을 다해 기다리고 있다고.
저는, 23살의 휴학생입니다.
*본 게시물은 2018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수상작으로 상업적 용도의 사용, 무단전제, 불법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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