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24. 09:44
지난 1991년부터 시작되어 늘 같은 자리에서 대중을 만나 온 광화문글판. 매년 계절마다 새로운 문안으로 옷을 갈아입으며 대중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해주었는데요. 그 문안 뒤에는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가 있습니다.
시인과 소설가, 평론가 등 다양한 인사들로 구성된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는 시민 공모와 위원들의 추천을 받은 문안들 중에서 해당 시기에 어떤 문장이 시민들과 만나면 좋을지, 치열한 토론과 투표를 거쳐 결정됩니다. 문안 자체의 의미뿐 아니라 사회적인 맥락 등 다양한 점을 고려하죠.
새해를 맞아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는 새로운 얼굴들을 맞이했습니다. 안희연 시인도 그중 한 명인데요. 지난 23년, 안희연 시인의 시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의 한 구절이 광화문글판 여름편 문안으로 선정된 것에 이어 25년, 문안선정위원으로 합류하며 광화문글판과 다시 한번 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특별히 광화문글판 35년이 되는 해이기도 한데요. 교보생명이 문안선정위원 안희연 시인을 만나, 문안선정위원으로 새롭게 합류하게 된 소감 등 광화문글판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작가님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시 쓰는 안희연입니다. 올해 1월부터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단추’라고 말하고 싶은데요. 단추는 자칫 사소해 보일 수 있고 쉽게 떨어질 수도 있지만, 정말 추운 날 단추가 있는 옷과 없는 옷의 보온력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잖아요. 옷과 옷 사이를 이어주는 존재라는 점에서도 중요하고요. 시인도 시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 마음과 마음 사이를 잇는다고 생각하기에, 저를 ‘단추’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Q.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 활동을 하시게 된 소감이 어떠신가요?
지난 2023년 여름에 저의 시구가 광화문글판 문안으로 소개되는 영광스러운 경험을 했었는데요. 당시에는 여름이 끝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까지 들더라고요(웃음). 그만큼 광화문글판에 시구가 실린다는 건 귀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문안 선정 작업에 초대를 해주셔서 기쁘게 합류하게 되었는데요. 23년 여름에 제가 느꼈던 귀한 마음을 많은 시민 분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문장이 가진 힘과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다는 사명감도 생기고요. 활동 기간 동안 우리 삶을 환히 밝혀줄 좋은 문장을 소개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Q. 문안을 선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첫 번째는 너무 어렵지 않되, 비밀스러움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척 어려운 일이죠(웃음). 직관적으로 다가와야 하지만, 그럼에도 비밀스러움을 품고 있어야 보는 사람들이 ‘저 문장은 무슨 뜻일까?’ 생각할 수 있거든요. 작은 물음표가 포함된 문장을 찾으려 해요.
두 번째는 메시지인데요. 첫 회의에 참여하면서 어떤 메시지가 전달되면 좋을까 위원분들이 심도 깊게 논의하시는 걸 보면서 많이 배우고 느꼈습니다. 앞으로도 희망을 주거나 위로가 되거나 성찰을 유도하는, 그러한 메시지적인 측면도 함께 고려하고자 합니다.
Q. 광화문글판을 한 문장으로 표현해 본다면요?
‘은빛 동전’이요. 호수에 던져진 동전처럼 광화문글판을 통해 우연히 마주한 문장 하나가 우리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니까요. 그 문장은 마음 깊이 가라앉았다 어느 순간 삶 위로 떠오르기도 합니다. 광화문글판이 이런 교감을 나누는 계기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광화문글판이 광장 한복판에 있다는 점도 상징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고 때론 갈등이 벌어지기도 하는 공간에 시의 문장이 자리한다는 건 굉장한 일이죠. 광화문글판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추구해야 하는 목표와 잊지 말아야 될 가치를 일깨워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화문글판은 ‘곁에 두고 싶은, 곁이 되어주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우리 곁에,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를 지니는 가족이나 친구처럼요.
Q. 디지털사회에서 본연의 가치와 모습을 지켜오고 있는 광화문글판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안부를 물을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더더욱 광화문글판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광화문글판이 ‘느림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글판의 문장을 읽었을 때 의미가 바로 파악되지 않을 수 있거든요. 그건 시의 힘이기도 할 텐데요. 의사소통 도구로서의 언어와는 다른, 보다 확장된 맥락이 만들어진다는 의미일 겁니다. ‘저 문장은 무슨 뜻일까?’ 곱씹어보는 과정 자체에 이미 속도를 지연시키는 힘이 있다고 봐요.
Q. 올해는 광화문글판이 35년이 되는 해인데요. 광화문글판이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길 바라시나요?
지금도 너무 좋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오래 지속되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계절마다 한 번씩 광화문글판을 통해 우리를 다녀가는 문장이 있을 때, 우리는 모두 ‘문장공동체’가 되잖아요. 같은 문장을 공유하는 공동체요. 그 자체가 저는 너무 좋아요. 그래서 광화문글판이 오래오래 지속되었으면 합니다.
‘텍스트힙(Text-Hip)’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글을 소비하거나 창작하는 것을 즐겨하는 젊은 세대들이 늘어나고 있는데요. 하지만 글을 쓰는 건 쉽지만은 않은 일이죠. 특히나 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남다른 감성을 갖고 있어야 할 것만 같고, 평범한 삶을 살아선 안 될 것 같은 ‘선입견’ 때문인데요. 안희연 시인은 어디에서 영감을 받고 있을까요?
Q. 시인을 꿈꾸는 분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정말 많이 읽고 써봐야 합니다. 그것 외에는 다른 묘책이 없어요. 읽고 쓰기의 과정이 주는 정직성을 믿고 성실하게 지속해 보는 것, 그 이상의 시 쓰기 공부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본인이 가진 목소리를 믿어야 합니다. 누구나 고유한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찾고 가다듬는 연습을 해나가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저는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을 학생들에게 자주 권합니다. 시인을 꿈꾸는 젊은 청년이 당시 대문호였던 릴케에게 시에 관한 이런저런 조언을 구하는데, 그 청년에게 보낸 릴케의 답장 열 통을 모은 책이에요. 릴케는 이렇게 이야기하죠. ‘세상 하늘 아래 시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낡은 것은 하나도 없다’. 결국 시선의 문제라는 말이에요. 저는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문장을 밖에서 구하려고 하니 어려워하시는 것 같아요. 출발 지점을 ‘나’로 삼아 보세요. 오늘 내가 느낀 아름다움, 지금 이 순간의 감정, 유년의 기억 등등 나로부터 출발하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고 오직 나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니까요.
Q. 독자들에게 어떤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제 시를 보시는 분들이 ‘나한테 이런 아름다움이 남아 있었나?’, ‘나도 아픔에 반응할 줄 아는 인간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독자들의 통각을 일깨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 내면의 무심과 무감과 무지를 깨워 보다 열렬하고 생생하게 삶을 실감할 수 있도록요.
Q. 매년 새해 목표를 적는다고 들었습니다. 올해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더 많은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될게’라고 작년 다이어리에 적어 두었는데, 제대로 못 지킨 것 같아서 올해 다시 해보려고요(웃음). 저는 알록달록한 이야기를 많이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요. 세상을 너무 흑백으로만, 평면적으로만 보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해요.
편견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치를 쌓으면서 이야기를 축적한 뒤 그것을 독자분들께 돌려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건, 더 폭넓은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더 뜨겁게 사랑하고 싶다는 열망이 담긴 말이기도 합니다.
Q. 마지막으로 봄을 기다리고 있는 시민들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다면요?
저는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조각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겨울을 잘 깎았기 때문에 봄이라는 계절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고요. 특히 올 겨울은 깎기보다는 깎임 당하는 일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요. 그럼에도 깎여 사라진 것에 매몰되기보다는 그로 인해 남은 것들에 애정을 기울여 보셨으면 좋겠어요.
겨울이라는 시간을 깎아서 나에게 무엇이 도착했는지 살펴보는 거죠. 봄이 온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이 나아지고 편안해지는 부분들이 있잖아요. 우리는 분명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겨울을 깎고 난 후의 남은 것들을 잘 보듬는 봄날을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울라브 하우게
“울라브 하우게는 노르웨이의 작은 마을 울빅에서 정원사로 일하며 소박한 삶을 살았던 시인이에요. 시를 배운 적이 없다고 해요. 그래서일까, 언어가 순결하고 깨끗한 마음을 선물해 줍니다. 한겨울의 자작나무 숲을 거닐 때 심리적으로 깨끗해지는 마음이 드는데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 시집이에요.”
『흰』 한강
“한강 작가님의 좋은 작품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흰』을 추천하고 싶어요. 시일까, 소설일까, 그 사이 어디쯤의 산문일까 장르를 특정하기 힘든 매력이 있거든요. ‘흰’이라는 색채의 상징성도 생각해보시고, 내가 만약 ‘흰 것’에 대해 쓰게 된다면 어떤 목록들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책과 교감해보시기를요.”
『단어의 집』 안희연
“제 작품 중에는 산문집 『단어의 집』을 추천드리고 싶어요. 단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일 뿐 아니라 사유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독자 분들이 자신만의 단어의 집을 꼭 만들어 보시기를 바라요. 책은 그저 도움닫기 판의 역할이고, 책을 덮음과 동시에 나를 이루는 단어들을 찾아나가고 각자의 단어의 집을 편찬해 보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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