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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식코>(2007) - 국가는 국민복지를 책임질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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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8. 16:02

ㅣ영화 식코ㅣ


 

 <식코> - 10번째 인물 (The 10th Man) 

얼마 전 개봉했던 브래드 피트 제작∙주연의 <월드워 Z World War Z>(2013) 라는 영화에는 이런 장면이 등장해요.

정체불명의 좀비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확산되면서 해결책을 찾아 나선 전직 유엔 조사관 레인(브래드 피트)은 유일하게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은 나라, 이스라엘을 방문합니다. 이스라엘은 일찌감치 거대한 장벽을 쌓고 스스로를 그 안에 가둠으로써 바이러스의 유입을 막고 있었죠. 프로젝트를 입안한 정보부 당국자를 만나 어떻게 미리 대책을 세울 수 있었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정부 조직 속에서 소위 ‘10번째 인물(The 10th Man)’입니다. 9명이 동일한 결론을 내놓더라도 어떤 이유를 찾아서든 그것이 틀렸다고 말해야 하는 사람 말입니다. 9명 모두가 틀릴 경우도 대비를 해야 하니까요.”  

<월드워 Z>의 ‘10번째 인물’은 2차 세계대전으로 무려 600만 명이 학살당한 아픈 과거와 적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 등 이스라엘의 특수한 환경에서 영감을 받은 설정일 겁니다. 동시에 한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모두가 동일한 가치관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만이 아니라 반대 의견을 허용하고 때로는 그로부터 창조적 아이디어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대목이기도 하죠.

<월드워 Z>(2013)의 한 장면 (출처: IMDb.com)

오늘 소개해 드릴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 Sicko> (2007)는 자타공인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의 치부를 파헤치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10번째 인물’의 교훈에 비추어 보면, 이런 성역 없는 비판이 허용된다는 사실 자체가 역설적으로 미국의 힘을 보여 주는 셈이 되겠지요. 

 <식코> - 저널리스트인가, 선동꾼인가?

먼저 마이클 무어 감독을 소개해 볼까요? 마이클 무어는 미국 북동부 5대호 연안에 위치한 플린트市(그의 영화들에서 고향 플린트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에서 태어나 저널리즘을 전공한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로저와 나 Roger & Me>(1989)라는 다큐멘터리로 데뷔해요. 강력한 구조조정을 통해 회사를 구한 영웅으로 칭송 받던 GM의 전직 CEO 로저 스미스(Roger Smith)를 감독 자신이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인터뷰를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회사는 살아남았지만 그 대가로 대량해고 당한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과 플린트 등 산업중심 도시들의 피폐화에 대해 답변을 요구하는 형식을 통해 레이거노믹스 이래 지속되던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 작품이었죠.

          <로저와 나>(1989)                    <볼링 포 콜럼바인>(2002)                      <화씨 9/11>(2004)

                    (출처: IMDb.com)                        (출처: IMDb.com)                             (출처: IMDb.com)

이후 발표하는 작품들마다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켜 왔어요.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을 계기로 총기규제를 둘러싼 정치권과 총기산업의 밀착 관계를 파헤친 <볼링 포 콜럼바인 Bowling for Columbine>(2002), 9/11 사태 이후 비정상적 애국주의가 확산되고 있는 미국의 자화상을 그린 <화씨 9/11 Fahrenheit 9/11>(2004), 미국식 의료보장체계의 실상을 고발한 <식코 Sicko>(2007), 건강함을 잃고 피폐해진 미국 자본주의의 현황과 문제점을 되짚어 보는 <자본주의: 러브스토리 Capitalism: A Love Story>(2009) 등을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을 수 있겠네요. 

정치권과 기득권층을 향한 거침 없는 독설과 조롱, 풍자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유수의 국제 영화제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아 왔습니다. <볼링 포 콜럼바인>으로 2002년 칸 영화제 대상과 2003년 아카데미 최우수 다큐멘터리 상을 받았는데, 당시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트로피를 받을 때는 이라크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부끄러운 줄 알라”며 직격탄을 날려 국제적인 화제가 되기도 했죠. 이후 <화씨 9/11>은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식코> 역시 2008년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어요.  

소문난 민주당 지지자인 마이클 무어는 오바마 대통령의 대선 캠페인에 적극 참여했었고, 지난 2011년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월 스트릿 점령 (Occupy Wall Street) 운동에도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던 인사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그밖에 『The Awful Truth』, 『Michael Moore Live』 등의 TV쇼를 진행했고, 유명 락그룹 레이지 어게인스트 머신 (Rage Against The Machine)과 그룹 R.E.M.의 뮤직비디오를 감독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마이클 무어는 단순한 영화감독을 넘어 하나의 미디어 브랜드가 되어 버린 느낌이에요. 

이런 마이클 무어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으로 나뉩니다. 간과하기 쉬운 사회의 병폐를 날카롭게 파헤치는 저널리즘적 다큐멘터리의 선봉이라고 평가하며 그를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선정적 주제와 얕은 논리로 저명인사들을 웃음거리로 만들며 인기를 얻는 일개 선동꾼쯤으로 헐뜯는 측도 있죠.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줄지는 그의 영화들을 직접 보신 후 판단하면 될 듯해요. 다만 다큐멘터리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여주는, 지극히 객관적인 장르로 생각하는 경향에 대해서는 영화에 대한 매우 흔한 오해 중 하나라는 점을 꼭 말씀드리고 싶군요.

어떤 장르든 일단 카메라로 포착한 뒤 편집을 거치는 모든 영상엔 반드시 연출자의 연출 또는 의도가 개입되기 마련입니다. 다큐멘터리의 아버지 로버트 플래허티(Robert J. Flaherty)의 <북극의 나누크 Nanook of the North>(1922) 이래 연출과 의도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운 다큐멘터리는 단 한 편도 없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어요.

 <식코> - 무너진 아메리카 드림 

우선 마이클 무어는 자신의 홈페이지 michaelmoore.com에 의료보험 관련 문제에 대한 제보를 요청하는 공지를 올린 후 1주일 만에 2만 5천 통의 이메일을 받습니다. 사연을 모두 읽는 데 한 달, 그리고 이후 130일 동안 500시간 분량의 촬영이 진행됐다고 하네요.  

영화가 시작하면, 다양한 사유로 병원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과의 인터뷰가 이어집니다.

오리건 주에 사는 릭(Rick)은 목재를 다듬다 왼손 중지와 약지의 각 첫마디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하죠. 병원에서 중지 봉합에 6만 달러(한화 6천6백만 원), 약지 봉합에는 1만 2천 달러(한화 1천3백만 원)가 든다는 진단을 받은 릭은 약지만 봉합한 채 중지엔 골무를 끼우고 다닙니다. 그가 유달리 로맨틱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영어로 약지는 Ring Finger, 즉 반지를 끼는 손가락), 모아 놓은 돈도 없고 보험도 들어 놓지 못한 그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죠. 이렇게 미국에서는 약 5천만 명의 인구가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어요.


영화 <식코> 중에서 (출처: IMDb.com)

의료보험에 가입돼 있는 사람들도 안심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의료보험 혜택을 받고 있는 나머지 2억 5천만 명의 미국인들을 위한 얘기거든요.

인정받는 기술자였던 래리와 한 신문의 편집인이었던 도나 부부는 평생을 열심히 일하면서 남부럽잖은 삶을 살아왔고, 여섯 명의 자식들도 모두 명문대학을 졸업시켰습니다. 하지만 래리가 두 차례의 심장발작을 일으키고 도나가 암에 걸리면서 직장 의료보험이 제공하던 보상한도를 소진하고 난 후 결국 파산하고 말았죠. 이제 이 노년의 부부는 출가한 딸의 창고 방에 얹혀사는 서글픈 신세로 전락하고 말아요.

은퇴할 나이가 훌쩍 지난 79세의 프랭크씨도 여전히 마트의 잡역부로 일하고 있습니다. 박봉이라도 일을 계속해야 부부의 약값을 공제받을 수 있으니까요. 약값에 인생의 황혼기를 저당 잡힌 셈이죠.  

그밖에 고지사항이나 신체조건 등등 온갖 핑계로 보장을 축소하거나 거부하는 민영보험회사들의 횡포에 가입자들은 손사래를 내젓기 마련입니다. 개중엔 적합한 골수 기증자를 찾아 놓고도 지나치게 실험적인 치료라는 이유로 보험회사가 보장을 거부해 피보험자가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례까지 소개돼요. 병원비를 내지 못한 노인들이 빈민 요양소에 내팽개치듯 맡겨지는 현실도요. 덕분에 미국의 의료보험회사들은 매년 엄청난 수익률을 갱신하고 있고, 경영진은 천문학적인 액수의 보수를 챙깁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대하다는 미국, 아메리칸 드림으로 상징되던 이 풍요의 땅에서 대체 왜 이런 가슴 아픈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이웃 캐나다는 물론 영국, 프랑스 하물며 쿠바까지도 시행하고 있는 보편적 복지 시스템으로서의 공영건강보험체계가 왜 미국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걸까요?

마이클 무어가 진단하기에, 그것은 의료계 권익단체의 밥그릇 챙기기, 제약회사와 민영의료보험 회사들의 탐욕, 그리고 그들의 로비에 넘어간 정치권, 이렇게 삼자의 담합으로 탄생한 소위 미국식 민영의료보험제도에서 전적으로 기인합니다. 메디케어(노년층 의료보험)와 메디케이드(저소득층 의료보험)에 가입이 가능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민간에서 의료보험 문제를 해결하도록 돼 있기 때문에 중산층 서민은 높은 의료비 부담을 감당하지 못하고, 의료보험사는 각종 질병에 취약한 계층의 가입을 기피하거나 지급률을 낮추면서 수익 극대화를 꾀하는, 이중의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죠.  

 <식코> - 오바마 케어 (Obama Care) 

영화의 말미 감독 자신의 독백은 <식코>가 주장하는 바를 잘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린 모두 한배를 탄 운명입니다. 각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도와야만 하죠. 외국에서 아픈 사람을 돕거나 자녀들을 가르치고 아기를 돌보며 이웃과 잘 지내는 좋은 방법들을 찾아내고 있다면, 우리(미국인)는 왜 그러지 못하는 걸까요? 세상은 ‘우리’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닙니다. 권력 있는 자들은 우리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길 원하지 않습니다. 서구 세계에서 유일하게 보편적 무상 의료복지(Free Univesal  Health Care)를 받지 못하게 하고 있죠. 하지만 우리가 의료비나 대학 학자금, 육아 등의 문제를 더 이상 팔짱만 끼고 지켜보지 않는다면, 두고 보세요. 머잖아 새로운 미국으로 거듭 날 수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 저는 정부에 제 빨래나 시켜야겠네요.”

<식코> 한국개봉 포스터 (출처: <식코> 국내 수입∙배급사 스폰지하우스 공식카페)

우리는 미국의 의료보험체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의 형태를 갖추게 됐고 그것이 가진 장단점이 무엇인지까지 세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식코>를 통해 마이클 무어가 제기한 문제의식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건강보험제도의 개선이 오바마 대통령의 가장 큰 대선 공약이었다는 사실은 기억하실 거예요.

의료 사각지대를 없애자며 오바마 행정부가 역점을 두고 추진했던 개혁안은 거센 반대에 부딪혀 지연을 거듭했고, 재선에 성공한 후에도 여전히 난항을 겪고 있는 것 같네요.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오늘 미국에서는 건강보험 개혁안, 즉 전 국민이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오바마 케어(Obama Care: 환자보호 및 적정부담 보험법 Patient Protection and Affordable Care Act, PPACA)의 시행에 필요한 예산안을 놓고 공화당과 민주당이 격하게 대립한 끝에 처리기한을 넘기면서 행정부 기능이 잠정 폐쇄(Shut Down)되는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남의 나라 일이라곤 하지만, 상당히 첨예한 문제인 것만큼은 틀림없는 것 같죠?  

2013년 새로운 정부의 출범을 맞은 우리나라 역시 보편적 복지의 확대 문제와 관련한 논란이 뜨겁습니다. 깊이 고민하고 세심하게 다듬어서 모두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추진되어야겠죠. 이 과정에서 <식코>의 사례도 타산지석으로 삼으면 좋을 듯 싶네요. 

다음 포스팅에선 이제까지의 작품 위주에서 잠시 벗어나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이라는 불세출의 배우에 대해 소개해 드릴 예정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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