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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대학생동북아대장정! "가자! 고구려의 기상이 숨 쉬는 대륙으로" (총정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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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6. 17:42

 



안녕하세요, '가족·꿈·사랑'의 가족 여러분~! 프론티어 기자단 5기 설주환&임윤경입니다. ^ㅡ^ 저희가 함께 인사 드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요, 그 첫 번째 이야기로 저희는 올해 있었던 2014 교보생명 대학생동북아대장정(이하 동북아대장정)의 모든 것을 정리해드리려고 해요. 

앞서 다른 프론티어 기자들이 동북아대장정에서 느낄 수 있는 현장감을 생생하게 소개해드렸다면, 저희는 이번 답사의 의의를 파헤쳐나가기 위해 답사지의 기원과 역사를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보려 해요. 그럼 지금부터 2014 동북아대장정의 무대가 되었던 고구려와 발해 유적지로 함께 향해보아요!




2014 동북아대장정과 함께한 북방 이야기, 그것이 알고 싶다! 고구려 편



올해로 13번째 생일을 맞은 동북아대장정은 포용, 소통, 상생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던 고구려와 발해의 발자취를 쫓아 대륙의 북방에서 진행되었답니다.





드넓은 북방에서 저희 13기 대원들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고구려가 건국된 졸본성(오녀산성)부터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이었던 집안, 발해가 건국된 돈화, 그리고 발해의 가장 오랜 수도였던 상경성을 차례로 탐방했고 북방에서 활동했던 조상들의 리더십을 배우고 돌아올 수 있었답니다. 



또, 백두산 천지를 둘러보며 북방 민족의 넓은 기상을 가슴에 품고, 거란족의 후예인 다우르족과 교류하며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상경성을 탐방했답니다. 마지막 날에는 하얼빈의 안중근 기념관을 방문해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돌이켜보고 안중근 열사를 비롯한 순국선열의 넋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답니다.


이렇게 이번 2014 동북아대장정은 매 일정에 있어 역사적 배경이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어주었는데요, 이번 총정리 기사에서는 답사지의 역사적 배경을 좀 더 심층적으로 파고드는 시간을 가져볼게요.


먼저, 저희 13기 대원들이 탐방한 '북방'에 대해 소개를 해드리려 해요.



<만주 지도 (출처 : http://blog.daum.net/jhp1460)>



북방은 서쪽으로는 다싱안링산맥(大興安嶺山脈), 동쪽으로는 샤오싱안령산맥(小興安嶺山脈), 남쪽으로는 창바이산맥(長白山脈)으로 둘러싸인 평야 지대를 말해요. 

즉, 현재 중국의 동북 3성인 랴오닝성(遼寧省)과 길림성(吉林省), 그리고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지역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죠. 우리나라에서는 이 지역을 북방이라고 불리지만, 이 이름 외에도 이곳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답니다. 요동이라고 불렸던 지역을 포함해, 중국에서는 둥베이(東北)지역이라고 불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에요. 또 청나라 때에는 그곳에 거주하는 여진족이 자기 민족을 높여 부르는 이름인 만주(滿住)을 따서 만주(滿洲, Manchuria)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했는데, 현재에는 이 명칭을 통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여러분도 만주라는 명칭이 더 익숙하시죠~?



<중국의 옥수수 밭>



북방은 한반도의 4배에 이르는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겨울이 길고 추운 반면, 여름에는 덥고 비가 많이 와서 수수, 콩, 조, 옥수수 등의 밭농사 중심의 농업이 행해진다고 해요. 덕분에 우리 대원들은 이동하는 버스에서 내내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을 볼 수 있었답니다.



<졸본성(오녀산성) (출처 : 국악원 홈페이지)>



이렇게 넓은 대륙의 북방에서 끝없는 옥수수밭을 지나 저희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고구려의 건국지인 졸본성(오녀산성)이었어요. 고구려는 주몽이 이끄는 부여계 이주민들이 건국한 나라로, 주변 세력들은 자신의 세력으로 규합하고 중국의 한사군과는 투쟁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강성해졌답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나중에는 한반도 북부와 대륙의 북방지역을 아우르는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했다고 하는데요, 고구려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 바로 이곳, 졸본성(오녀산성)이에요.


졸본성(오녀산성)은 전쟁 시에 중심이 되는 고구려의 전시성 역할을 했어요. 지금도 졸본성(오녀산성)은 천연 ‘천혜의 요새’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데요, 이는 높고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성벽을 조금만 축조해도 적을 쉽게 방어할 수 있는 한편, 산의 정상에는 평지와 천지라는 샘이 있기 때문이에요. 

졸본성(오녀산성)과 같은 성곽 형식을 산정식 성곽이라고 하는데요, 성의 전체 둘레가 4,754m인데 그 중 인위적으로 축조한 성벽은 565m로 12%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이러한 이점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또 졸본성(오녀산성)의 성문은 옹성구조와 나팔형식을 취하고 있어 방어에 매우 유리했다고 해요. 

옹성 구조라는 말이 약간 생소하실 텐데요, 옹성구조는 성벽이 성문을 포옹하고 있는 형식으로, 성문을 넘으려는 적군의 후방 공격이 가능해 방어에 효과적인 구조랍니다. 옹성구조를 이용하면 성문을 이중으로 방어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하니, 고구려인들의 지혜가 돋보이죠? 또 졸본성(오녀산성)에는 고구려인의 지혜로운 문화인 온돌 유적이 남아있어 졸본성(오녀산성)이 고구려인들의 성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답니다.


아까 언급해드렸다시피 졸본성(오녀산성)은 전시성이기 때문에, 고구려의 백성들은 평소에는 평시성인 홀본성에서 생활하다가 전쟁이 나면 졸본성(오녀산성)에 올라 전쟁을 치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이는 고구려는 평시성과 전시성(방어성)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독특한 도성 방식을 구축했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이 졸본성(오녀산성)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어요. 바로 장기전에 약하다는 점이죠. 

성이 험준한 산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미리 많은 군량미나 군사장비를 위에 옮겨놔야 했으니, 무척 힘들었겠죠? 이러한 졸본성(오녀산성)의 약점과 대륙으로 더 나아가기 위한 거점 마련 등등을 이유로 고구려는 도성을 국내성으로 옮기게 돼요. 그곳이 바로 저희가 다음으로 방문한 집안 지역이랍니다.


 

<집안박물관>



지금은 집안이라고 불리는 국내성은 고구려의 두 번째 평시성 이었는데요, 오랜 기간 고구려의 도성 역할을 했기 때문에 아직도 집안에는 많은 고구려 유적지들이 남아있답니다. 이전에 고구려는 평시성과 전시성(방어성)이 세트로 움직이는 도성 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 드렸죠? 졸본성과 오녀산성이 각각 평시성과 전시성, 한 조를 이루어 도성을 구성한 것과 같이, 국내성의 전시성은 환도산성이었어요.


<환도산성>



산성자산에 위치하고 있어 산성자산성이라고도 불리기도 하는 환도산성은 산성자산의 험준한 능선을 잘 활용한 성벽이 구축되어 있어요. 이러한 성곽을 포곡식 성곽이라고 하는데요, 이는 3면이 산의 험준한 능선과 암반으로 막혀있는 것이 특징이에요. 한편, 이런 경우 방어에 유리한 옹성을 짓는 것이 어려운데요, 고구려인들은 어긋문식 성문 구조를 이용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했어요. 어긋나게 성문을 만들어서 옹성처럼 적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이중방어 체제를 갖추고자 한 것이죠


<산성하고분군>



한편 집안에는 많은 고구려 고분이 남아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태왕릉과 장군총, 그리고 산성하 고분군인데요, 이 중 산성하 고분군은 환도산성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답니다. 이번 답사의 길잡이 선생님은 고분군을 무덤 떼라고 하셨는데, 실제로 산성하 고분군에 정말 많은 무덤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선생님의 표현이 이해가 갔던 기억이 나요. 이처럼 산성하 고분군에는 많은 무덤이 남아있고, 이는 세계 최대의 규모라고 하니 정말 대단하죠?

집안에 남아있는 많은 무덤의 형태는 돌을 쌓아서 만든 적석묘인데요, 우리가 일정 중에 돌아본 태왕릉과 장군총은 적석묘 중에서도 완성된 형태에 속하는 계단식 적석묘였답니다.



<태왕릉 앞에서 한 컷, 찰칵!>



이 중에서 태왕릉의 경우, 지금은 많이 훼손되어 조금 초라해졌지만, 과거에는 정말 크고 위엄을 자랑하는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해요. 

태왕릉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무덤 안에서 ‘태왕릉이 산맥처럼 안녕하길 바란다’는 뜻의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고 새겨진 벽돌이 나왔기 때문인데요, 광개토대왕릉비와 가까워 광개토대왕의 무덤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아직 무덤의 정확한 주인은 알 수 없다고 해요. 그래도 아직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인들의 염원이 조금은 이루어진 것 같죠?



<장군총>



동양의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장군총 역시 집안에서 만나볼 수 있는데요, 장군총의 경우 보존이 잘 되어있어 아직도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어요. 장군총은 태왕릉의 2배에 해당하는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답니다. 굉장히 크죠? 장군총의 경우 규모도 크지만, 가장 완벽하고, 또 완성된 형태의 적석묘라고 할 수 있어요. 

태왕릉보다 규모는 더 크지만,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모습이 바로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답니다. 또 이와 더불어 태왕릉의 경우, 묘실이 무덤의 맨 위층에 위치하여 다소 좁았는데, 장군총은 그보다는 더 아래쪽에 묘실을 위치시킴으로써 묘실을 위한 공간을 더 넓게 지을 수 있었고, 이에 따라 태왕릉의 4배에 이르는 큰 묘실이 나타나는 것도 장군총이 태왕릉보다 더 발전된 단계의 적석묘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오회분 5호묘 (출처 : http://www.thingskorean.com/)>



이렇게 고구려 무덤에는 적석묘 형식의 무덤도 많이 나타나지만, 이후에는 당의 영향을 받아 흙무지돌방무덤이 유행하게 돼요. 그리고 석실에 죽은 이를 위한 벽화를 그리기 시작하는데요, 처음에는 죽은 이가 사후세계 필요할 여러 물품을 주제로 벽화를 그렸지만, 이후에는 도교의 영향을 받아 사신이나 신선, 괴수, 일월신 등을 주제로 벽화를 남겼다고 해요. 

오회분 5호묘는 이러한 흙무지돌방무덤의 양식과 벽화 모두 그래도 간직하고 있었답니다. 오회분은 무덤이 꼭 투구를 뒤집어 놓은 투구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요, 모두 고구려 귀족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아직도 벽화들은 대부분 어제 그려진 것처럼 색채 등이 잘 남아있었지만, 지금 무덤이 개방되면서 차가운 무덤 내부와 따듯한 외부 공기가 만나 계속 이슬이 맺히면서 빠른 속도로 벽화가 훼손되고 있다고 해요. 참 안타깝죠?



(출처 : http://twewoo.com.ne.kr/8JilL/I.htm)



집안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시내 중심에 국내성터가 있다는 점이었어요. 아직도 많은 유물들이 집안에서 출토 중이라고 하는데요, 이곳에서 많이 출토되는 유물들은 집안 박물관에 전시 중이에요. 하지만 현재 이 집안 박물관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것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안타까웠어요. 

예를 들어, 집안 박물관에는 고구려의 유물 중에서도 당의 영향을 많이 받은 유물들이 집중 전시되고 있었는데요, 이는 고구려가 중국에 대항하는 자주국이었다는 점을 왜곡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인으로서 속상했답니다. 이처럼 현재 한국, 중국, 일본은 역사에 대해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요. 지정학적으로 서로 큰 영향을 끼치며 함께 역사를 공유해왔지만, 서로의 이익과 자존심 때문에 공통의 동아시아 역사를 기록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인데요, 이를 실감한 곳이 바로 집안이었답니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집안 유물들은 촬영이 불가능해요. 또 저희는 집안을 탐방하는 동안 중국의 경찰인 공안과 함께 움직여야 했답니다.



<광개토대왕릉비>



이처럼 집안에는 중요한 유적이 많이 있는데요, 집안에서 만난 중요한 유적지에 광개토대왕릉비가 빠질 수 없겠죠?!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고구려의 역사와 아버지의 업적을 비석에 새긴 것인데요, 이는 당시 고구려의 역사와 정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정세를 보여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사료라고 해요. 

또한 비석에는 고구려의 지배이념이나 정신이 담겨있고, 비석의 서체를 통해 당시 서체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 외에도 많은 가치를 담고 있어요. 광개토대왕비는 414년 그 자리에 세워진 이후 아직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요, 1,500여 년 동안 묵묵히 서 있었던 광개토대왕비를 보며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또한 최근에는 광개토대왕비에 새겨진 수묘인 제도를 뒷받침해주는 비석이 2012년에 발견되었어요. 바로 집안 고구려비가 그것이에요. 예전에 왕릉은 도굴되기가 매우 쉬웠다고 하는데요, 따라서 왕릉을 아무도 모르게 했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고구려인들은 왕의 위엄을 지키고 이를 과시하기 위해 왕의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을 정했답니다.

이때, 누가 왕릉을 지키는 중요한 업무를 했는지가 중요하겠죠?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수묘인을 광개토대왕 때의 정복지 주민들로 정하고 있는데요, 이는 자신이 복속시킨 곳의 주민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포용하려는 광개토대왕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요. 



<집안 고구려비 (출처 : 뉴시스)>



하지만 수묘인 제도가 실제로 시행되었다면 있어야 할 비문이나 이 이후를 기록한 자료가 없어, 실제로 역사학계에서는 수묘인제도가 시행되었을까 라는 의문이 있었는데, 이를 해결해준 것이 현재 집안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집안 고구려비에요. 집안 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수묘인 제도에서 시행되었던 제사 등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정복민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포용하고, 이를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만들고자 한 수묘인이 실제로 시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답니다. 이 비 역시 훼손이 심해서 정확한 내용은 아직 더 연구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고구려인들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더 알고 배울 수 있으니, 기쁜 일이죠?



지금까지 동북아대장정 동안 탐방했던 고구려 유적지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어떠셨나요? 북방에서 활동하며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성장했던 고구려의 기개가 느껴지시나요?! 사실 다시 일정을 정리하다 보니, 대장정 기간 동안 힘들어서 놓친 부분도 있었던 것 같아요. 이번 기사를 읽고 동북아대장정에 참가했던 대원들은 반짝반짝 빛을 발했던 그날의 일들을 다시 떠올리고 놓쳤던 부분은 다시 채우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아직 동북아대장정에 참가하지 않은 분들도 동북아대장정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기회가 되길 바라며 이번 기사를 마칠게요. 다음 번에는 동북아대장정 총정리, '발해편'과 '인터뷰편'에 남아 있는데요, 남은 이야기에도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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