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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대의 인물을 만나다, 사람을 아낀 성군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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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0. 5. 10:00

“우리는 ‘이 분’의 천 가지 업적 중에 1도 모릅니다.”

얼마 전 tvN의 <어쩌다 어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설민석 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분의 업적은 하루 종일 이야기해도 모자를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리더 1위 세종대왕! 세종은 황희, 김종서, 장영실 등은 조선의 황금기를 이끈 인물들이에요. ‘세종시대의 인물을 만나다’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의 주인공은 세종대왕입니다. 한글날 주간을 맞아 세종대왕에 대해 집중 탐구했습니다.



불안정한 시작

세종은 태종 이방원의 3남으로, 1397년 4월 10일(양력 5월 15일)에 출생했습니다. 세종은 셋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왕위를 물려받을 자격이 없는 일개 왕자에 불과했어요. 하지만 첫째 왕자였던 양녕대군은 왕세자임에도 불구하고 공부하길 싫어했어요. 사냥을 좋아하고, 왕자로서 품위가 없었죠. 그래서 태종은 왕세자를 바꾸기로 결정합니다. 그 후 두 달 만에, 세종은 왕위에 오르게 돼요.

왕위에 오른 세종을 따르는 신하는 전혀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태종이 왕위에서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거든요. 또 왕세자였던 양녕을 지지하는 세력도 남아있었죠. 뿐만 아니라 경험 많고 노련한 대신들은 왕을 쥐락펴락 하고자 했습니다. 게다가 세종이 집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태종에 의해 자신의 장인이 사사됩니다.

세종은 자신이 사랑하는 소헌왕후가 이 일로 인해 매우 슬퍼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소헌왕후의 눈물을 본 세종은 결심합니다. ‘이 일은 내 사람이 없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앞으로 내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하겠구나. 사람을 키우자.’ 이렇게 세종은 자신의 세력을 조금씩 만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사사(賜死) : 죽일 죄인을 대우하여 임금이 독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던 일.



세종의 인재 고르기


맡겼으면 믿어라!

세종은 인재를 고르기 위해 늘 고심했어요. 옛 왕들의 인사 관리법도 참고하고 하며 한 사람을 뽑는데도 늘 세밀하게 보고 발탁했습니다. 그러나 완벽한 사람은 찾기 어려운 법, 학식은 있으나 탐욕적인 사람, 정직하고 곧은 사람이지만 무식한 사람 등 다양한 인재들에게도 흠은 있었습니다.


(중략)

전조(前朝)의 태평할 때에 고신(告身)을 조사(朝謝)라 이르고, 대소 여러 관원을 모두 대성(臺省)에서 서경(署經)하게 하여, 그 법이 심히 엄했으니, 이것은 전조에서 처음 만든 것이 아니고, 곧 옛날의 양법(良法)의 전해진 뜻을 본받아 만든 것이니, 풍속이 아름답기를 5백 년의 오랜 세월을 유지한 것이 반드시 이에 말미암았을 것입니다...

-세종실록 57권, 세종 14년 8월 2일 무자 1번째기사 

이런 세종에게 신하들은 고려의 인사 발탁법을 제안해요. 고려는 ‘서경법’을 통해 인사를 발탁했다고 해요. ‘서경법’이란, 관리를 등용할 때 언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인사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의 청문회와 같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이를 보류하도록 했어요. 앞서 말했듯이, 인재는 등용해야 하나 누구나 흠은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세종은 결국 본인이 직접 인재를 발탁하기로 합니다. 이는 후에 세종이 나라를 이끄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혜택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들로 조말생과 김윤수 라는 인물들이 있어요. 조말생은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뇌물사건으로 인해 파직되고 말아요. 그러나 세종은 그를 다시 재임용하도록 합니다. 조말생은 이에 감복해 세종의 북방 정책에 크게 이바지 합니다. 또, 김윤수는 북쪽을 지키는 사람이었으나 여진족이 침략했던 사실을 세종에게 알리지 않아요. 조정에서는 그를 탄핵해야 한다고 했지만, 세종은 이를 눈감아 줍니다. 김윤수는 한달 뒤 재침입한 여진족을 격퇴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이와 같이 세종은 자신이 발탁한 사람은 끝까지 믿어주는 임금이었습니다.


단점보다 장점을

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임금이 여러 승지에게 이르기를,

"의견을 올린 사람이 말하되, ‘전선(銓選)의 임무는 임시(臨時)에 맡을 만한 사람을 뽑아 임명하라.’ 하니, 이 말이 어떠한가. 집현전으로 하여금 역대(歷代) 제왕의 사람을 쓰는 법을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71권, 세종 18년 2월 30일 병인 1번째기사 


세종 12년 11월 14일에 있었던 일이에요. 세종은 아침식사를 먹고, 왕이 늘 해왔던 공부시간인 경연에 나갑니다.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재의 등용에 대해서 신하들과 이야기 나누게 됐는데, 세종이 말하기를 “송 태조(宋太祖)가 인재를 등용한 방법은 훌륭하였다. 그러나 많이 등용하면 우수한 사람만 뽑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많은 이에게 은혜를 베푼 특전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라고 이야기 합니다. 정인지는 이에 대해서

"송나라의 태조가 많은 인재를 뽑아 쓴 것은 사실상 훌륭한 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등용하였다 할지라도 각기 한 가지씩의 특별한 장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점을 잘 활용했기 때문에 천하의 인재를 빠뜨리지 않은 것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세종은 정인지 의견에 동의했어요.

세종 26년에 있었던 과거시험에서 세종은 인재 등용에 관해서 질문했는데요. 이 과거에서 강희맹이란 사람이 급제를 합니다. 그의 답안 일부를 통해서 세종의 인재 발탁 방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만들어 낼 수는 있습니다. 먼저 사람을 기용한 이후에 키워내는 것입니다. (중략) 또 다른 방법은 개인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결점만 발견하면 아무리 유능해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기단녹장(棄短錄長)의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기단녹장(棄短錄長)이란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한다는 의미입니다. 세종은 이와 같이 장점을 부각시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최윤덕 장군이에요. 세종이 최윤덕을 우의정에 등용하려고 했을 때 “최윤덕은 곧고, 착실하고, 거짓이 없으며, 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다. 뿐만 아니라 태종의 신임도 받았으며 여진 정벌의 공도 있다. 그러나 무신 출신이라 세련됨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는 고민을 합니다. 세종은 정승이라면 다른 신하들보다 지혜롭고, 말을 해도 깔끔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영의정 황희가 세종에게 조언을 해요. “말씀하신대로 그와 같은 장점이 있는데, 그깟 세련됨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에 세종은 무릎을 탁 치며 바로 최윤덕을 우의정으로 등용하게 됩니다.


출신은 아무 의미 없다


어느 날 세종은 신하들에게 물었습니다.

“장리(贓吏)의 자손을 어떤 이는 등용하여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등용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니, 마땅히 일정한 법을 세워야 되겠는데, 만약 등용한다고 하면 어떤 벼슬을 주어야 하겠는가?”

장리죄란 나라의 재산을 빼돌린 죄로 현대의 횡령죄와 같아요. 나라의 관리가 재산을 빼돌리다니, 이에 대해서 신하들의 이야기가 분분했습니다.  안숭선이라는 신하는 그러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자식을 등용한다면,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거리낄게 없게 되니 등용하면 안 된다고 했고, 김종서는 마땅히 등용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자 황희와 맹사성등 재상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옛 사람들이 인재를 등용할 때는 가족의 일이나 다른 관계에 구애받지 않고 등용했습니다. 비록 장리죄를 저지른 자의 자손일지라도 만약 현명하고 재능이 있다면 등용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왜 정승, 육조, 대간의 벼슬은 못하고 낮은 군관직에만 써야겠습니까? 한계를 정해놓고 쓰는 것은 그 임금의 도량이 좁은 것입니다. 물론 국가가 징벌하는 것은 없앨 수는 없지만, 사람 쓰는 일에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죄를 범했다고 그 자손을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세종은 등용하는 것이 옳겠다고 대답했답니다. 이와 같은 세종의 생각은 계급보다 능력을 먼저 보는 혜안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장영실과 같은 인물이 세종시대에 빛을 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재양성소, 집현전

세종은 왕으로서 할 일이 무척이나 많았어요. 자신의 일을 거들어 줄 유능한 인재가 많이 필요했죠. 그래서 집현전을 세우고 인재들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집현(集賢), 말 그대로 똑똑한 인물들을 모으는 곳이에요. 이 집현전을 다른 표현으로 국가저재지지(國家貯才之地)라고도 합니다. 국가의 인재들을 모아놓는 곳 이라는 뜻이에요. 현대에 인재 풀(Pool)과 같은 개념입니다. 대표적인 집현전 학사들로는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있습니다. 집현전 학사들은 조선 제일의 학식을 갖춘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세종은 이들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집현관(集賢官)을 제수한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다만 글을 읽혀서 실제 효과가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각각 직무로 인하여 아침 저녁으로 독서에 전심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본전(本殿)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어 성과(成果)를 나타내어 내 뜻에 맞게 하고, 글 읽는 규범에 대해서는 변계량(卞季良)의 지도를 받도록 하라."

-세종실록 34권, 세종 8년 12월 11일 경오 4번째기사 

그러나 그들은 경전, 역사서, 자서, 시부 등 다양한 책을 읽고 월말에 보고해야 했으며, 열흘에 한 번씩 시험도 쳤습니다.


유관(柳觀)과 변계량이 집현전에 모이어 집현전 관원들에게 시(詩)를 시험하였다.

-세종실록 8권, 세종 2년 5월 25일 임진 3번째기사

세종은 질문하는 임금이었고, 언제 물어 와도 대답해야 했기 때문에 매일 공부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준비된 인재들이 국가에 늘 있었으니, 세종은 인재 등용에 거리낌이 없을 수 있었습니다.



세종의 인재들

세종의 이와 같은 인재 발탁에는 한 가지 이유만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정치인 ‘애민(愛民)’을 도와줄 인재가 필요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어떤 인물이든 가리지 않고 등용했어요. 그 결과 황희와 같은 훌륭한 정승이 나라를 살피고, 김종서와 같은 장군이 북방을 지켰습니다. 또, 박연은 우리나라의 음악을 만들어 내었고, 이순지는 우리나라의 천문에 대해 통달할 수 있었습니다. 신숙주와 성삼문과 같은 학자들은 우리나라의 학문 수준을 크게 높여주었습니다. 세종시대 인물들의 자세한 업적이 궁금하시면 아래 포스팅을 읽어보세요.


<세종시대 인물을 만나다, 황희 편> 

http://kyobolifeblog.co.kr/2046

<세종시대 인물을 만나다, 김종서 편>

http://kyobolifeblog.co.kr/2096

<세종시대 인물을 만나다, 박연 편>

http://kyobolifeblog.co.kr/2151

<세종시대 인물을 만나다, 이순지 편>

http://kyobolifeblog.co.kr/2180

<세종시대 인물을 만나다, '시대의 라이벌' 성삼문과 신숙주>

http://kyobolifeblog.co.kr/2245


"지금 인재가 매우 왕성하여 정사를 다스릴 인재와 무예에 뛰어난 선비가 상당히 많은바 다 벼슬하기를 원하고 있으니, 비옵건대, 등용하는 길을 열어 주소서.“   

-세종실록 55권, 세종 14년 2월 7일 병신

요즘 인력난이라고 부르는 현실에서 세종의 혜안은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가꿈사 프론티어 9기 임병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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