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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최우수상 - 비포장도로에는 발자국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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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5. 24. 10:34


연신 차창에 머리를 부딪쳤다.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차창 너머로 먼 데서 동이 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환한 빛은 산등성이 너머로 자취를 감췄다가, 이내 온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그제야 잠이 좀 깨는듯했다. 시트에 몸을 기댄 채 유리창 너머 백미러로 시선을 옮겼다. 백미러는 차가 지나왔던 길을 길게 비추고 있었다. 타이어는 멈추지 않고 축축한 흙바닥에 곡선을 그려냈다. 나는 울퉁불퉁한 도로 탓에 차체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목적지에 다다랐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 날의 나는, 병원에 장기간 입원하게 된 할머니의 짐을 챙기러 엄마를 따라 할머니 집으로 가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엄마는 내내 말이 없었다. 엄마는 뻥 뚫린 고속도로의 끝을 바라보면서 의사의 말을 되새기고 있었을 것이다. 암이 온몸에 전이되어 수술조차 하지 못할 만큼 늦었다는 말을, 병실에 누워 임종을 기다리는 게 최선이라는 말을. 귓가가 아닌 가슴으로 날아와 꽂힌 그 말을 수도 없이 곱씹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정면을 응시하는 엄마의 옆얼굴을 잠시 쳐다보다 다시 눈을 감았다. 작고 낡은 자동차는 거친 흙길 위에서 몸을 이리저리 떨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해는 이미 맨눈으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밝아져 있었다. 할머니 집은 차에서 내리고도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시골 깊은 곳에 있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운동화 끈을 고쳐 비포장도로에는 맸다. 그새 엄마는 저 멀리까지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잰걸음으로 엄마의 뒤를 쫓았다. 이따금 자라다 만 잡초가 발목을 간질였다. 나는 허리를 숙여 그 언저리를 손톱으로 긁었다. 이미 발갛게 풀독이 올라있었다. 

녹슨 대문은 듣기 싫은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마당 한편의 수도꼭지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멈추지 않은 채 흐르고 있었다. 수도꼭지를 잠근 엄마는 마당부터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도 말없이 엄마를 따라 할머니의 물건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엄마는 이따금 이마에 손을 짚거나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채로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다시 움직였다. 특정한 물건이나 공간과 닿을 때마다 그 안에 담긴 추억을 생각하는 듯했다. 그럴 때면 나는 엄마의 집중을 깨지 않도록 숨죽여서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어쩐지 슬픈 표정인 엄마를 못 본 체하는 것이 나의 도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할머니의 옷가지를 개 종이가방에 넣으며 엄마는 말했다. “이제 할머니는 여기에 다시 오시지 않을 거야. 지금 남아있는 흔적들이 이 집에서의 마지막 온기인 거지.” 나는 그제야 가만히 멈췄던 엄마의 모습이 추억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남을 수 있게 하려는 행위였음을 알았다. 나도 그 자리에 서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엄마와 나는 오래된 벽지를 손으로 쓸어내리는 것을 끝으로 할머니 집을 나섰다. 

할머니는 그로부터 한 달 후, 종일 옆을 지키며 간호하던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홀로 임종을 맞이했다. 예상했던 죽음이라고 슬픔이 덜한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영정사진을 품에 끌어안고 많이도 울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장례식 내내 할머니의 얼굴이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사진을 보고 기억해내고 싶었는데, 대신 엄마의 여린 어깨너머로 삐져나온 액자 모서리만 한참을 쳐다보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주름진 손이 전부였다. 할머니의 얼굴은 아무리 노력해도 떠오르지 않았는데, 손을 맞잡았을 때의 온기와 촉감은 생생하게 그려졌다. 나는 할머니의 손금보다 더 깊게 팬 주름을 손가락 끝으로 따라 훑었던 기억을 되새겼다. 할머니의 손은 어느새 내 손보다 훨씬 작아져 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였어, 내가 다 자란 후에도, 내가 할머니의 나이가 될 때까지 계속 할머니인 채로 항상 내 옆에 있을 줄만 알았다. 나는 할머니를 조금이라도 더 기억해내기 위해서 양손을 맞잡고 쓸어내렸다. 매끄러운 살결에는 주름이 없어서, 할머니가 곁에 없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 번 차올랐던 눈물은 수도꼭지처럼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할머니는 수도꼭지를 잠그는 것을 잊어버린 게 아니었다. 내가 울음을 멎지 못하는 것처럼 수도꼭지를 완전히 잠글 힘이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마당 한쪽의 가느다란 물줄기를 떠올리며 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장례를 마치고 유품을 정리하러 할머니 집에 다시 갔을 때, 나는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오는 날이면 종일 길의 풀을 베고 돌부리를 솎아냈다는 것을. 길이 평평해질 때까지 고무신 밑창이 닳도록 굽은 걸음을 몇 번이고 왕복했다는 것을. 무릎께까지 무성하게 자란 잡초가 맨다리를 간질이고서야 문득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포장도로 같은 할머니의 생을, 맨손으로 돌부리를 파헤쳤을 손끝을. 그리고 그 손을 마지막으로 잡았을 때의 온기를. 좁은 길목에 서서 내가 걸어오는 모든 순간을 지켜봤을 할머니를 떠올렸다. 나는 허리를 굽혀 풀을 뽑았다. 할머니가 나중에 하늘에서 내려다보아도 집을 찾아올 수 있게, 할머니의 길이 다시 길처럼 보이도록 쉬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엄마는 할머니가 걸어온 길을 따라 엄마가 되었다고 했다. 나도 그 길을 따라 언젠가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될 것이다. 내 손에도 손금보다 짙은 주름이 파이면 그때 할머니의 손을 다시 맞잡고 싶다. 할머니의 손에서부터 시작한 주름이 내 손으로 다시 이어질 때까지. 맞닿은 주름이 하나의 길이 될 때까지.

*본 게시물은 2016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수상작으로 상업적 용도의 사용, 무단전제, 불법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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