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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최우수상 - 카운터 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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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5. 24. 11:06

      쏟아는 주먹에 가드를 굳건히 올려 보지만 역부족이다. 턱을 당겨 고개를 숙이고 커다란 글러브로 얼굴을 최대한 가려 보지만 여유로운 상대방은 내 빈틈을 찾아 펀치를 꽂아 넣는다. 마지막 라운드가 시작한 지는 한참이나 된 것 같지만 공은 울릴 생각도 없어 보인다. 나는 맞기만 하는데도 힘들어 쓰러질 것 같은데 계속해서 팔을 휘두르는 저 사람은 어떻게 지치지도 않는 것인가.


“맞고 있지만 말고 팔을 뻗어! 상체를 계속 움직여!”


      링 밖에 서 있는 관장님이 뭐라 뭐라 소리를 지르신다. 그게 내 생각대로 되나. 이럴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링 위에서는 너무나 고독하다. 한 대 한 대 맞을 때마다 느껴지는 고통은 링 밖에서 나를 응원해 주는 누구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이 위기는 결국 나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할 과제이다. 하지만 다리는 굳어 버린 지 오래고 이젠 팔에도 힘이 빠져 가드조차 올리지 못할 것 같다. 살살 한다면서 나를 링 위로 끌고 온 희영이 형이 너무 야속하다. 땡! 드디어 공은 울렸고 의례적으로 포옹을 한다. 야, 쫄지 말고 미트 칠 때 배운 거 그대로 하라니까. 헉헉거리며 땀으로 흠뻑 젖은 헤드기어를 벗고 있는 내 뒷모습에 대고 관장님이 소리친다.


“너는 왜 돈 내고 맞고 오니? 그럴 거면 그냥 헬스를 해.”


스파링을 하고 온 날이면 어머니는 입술이 터져서 돌아온 내 모습을 보곤 항상 잔소리를 하신다.


“나도 몇 대 때리긴 해요.”


      서러워도 어머니 앞에선 자존심을 지키려 거짓말을 한다. 땀에 젖은 몸에 물을 뿌리고 있으면 방금 전 몇 시간 동안 열중해 있던 복싱의 여운이 점차 사라진다. 그러면서 나는 서서히 현실로 돌아온다. 터진 입술이 부어버린 게 거울을 통해 눈에 들어오고 맞으면서 턱이 너무 세게 돌아갔는지 목 주변 근육들이 아프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하지만 이쯤 되면 그 어떤 신체적인 고통보다 더욱 견디기 힘든 마음의 고통이 찾아 온다. 대학에 떨어졌다는 현실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고 이어서 마음은 무거운 돌덩이를 껴안은 듯 한없이 가라앉는다. 실패하고 말았다는 이 사실은 오늘 밤도 나를 계속해서 괴롭히며 쉽게 잠에 들지 못하게 할 것이다.


      늦잠을 자고 어영부영 낮시간을 보내다 저녁에 체육관에 간다. 몇 달간 변하지 않은 나의 생활 패턴이다. 모든 일에 의욕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체육관에는 꼬박꼬박 가는 이유는 단 하나다. 우연히 알아낸 마음의 고통을 잊는 효과적인 방법은 육체의 고통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현실적인 문제들(진짜 재수를 해야 되나, 그 비용을 생각하면 부모님께 너무 죄송한데,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잘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군대는 언제 가지.)이나 아직도 떨쳐내지 못한 미련들(면접 때 왜 그런 대답 밖에 못했을까, 수능에서 그런 바보 같은 실수만 안 했더라면, 애초에 너무 상향지원을 한 걸까.) 등으로 아무리 근심이 쌓여 있더라도 ‘이러다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육체가 힘든 지경에 이르면 ‘지금 당장의 문제는 일단 살아남는 것이다’라는 생각만으로 가득 차게 된다. 특히나 스파링을 하고 있을 때면 맞아 죽을 것 같은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로지 눈앞의 상황에만 온 정신을 쏟게 되어 그 순간만큼은 그 많던 번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무식한 방식은 일시적인 도피에 불과하기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체육관에서 만난 기범이 형은 나의 입시 진행 과정에 관심을 가져준 유일한 사람이다. 처음 체육관에 왔을 때 수능 끝난 고3이라 하니 수능은 잘 봤는지부터 시작하여 수시는 어떻게 됐는지, 수능 성적표는 채점한 대로 잘 나왔는지, 또 정시 지원은 어떻게 할 것이며 그 결과는 어떻게 됐는지까지 계속해서 물어왔다. 나는 안타깝게도 그때마다 기분 좋은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기에 최대한 짧게 답하며 그런 방향의 대화를 피하려 했다. 그래도 그는 항상 다 잘 될 것이라며 나를 위로해 주려 했다. 그런 그의 관심과 마음이 고맙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나의 상처들이 치유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마음의 병은 그렇게 나아지지 못한 채 계속해서 육체를 고통에 던져 놓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어느 날 관장님이 스파링만 하면 일방적으로 맞기만 하는 나를 불러 세웠다.


      “너는 인파이팅을 하지 못할 거면 차라리 카운터를 쳐라.”


      대뜸 등장한 카운터란 무엇인가? 상대방의 선제 공격을 우선 회피한 뒤 공격하기 위해 주먹을 날리면서 생긴 빈틈을 찾아 역습의 펀치를 날리는 것이다. 관장님이 보시기에 내가 몇 달간 주먹에 맞기만 하다 보니 나에게 날아오는 주먹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기고 그것을 회피할 수 있는 순발력이 생겼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그러면서 나에게 후안 마뉴엘 마르케즈라는 복서의 경기영상을 참고하라고 하셨다. 마르케즈는 전설적인 복서인 파퀴아오에게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8년간 그를 따라 체급을 월장하며 따라다녔다. 그리고 지겨운 도전이라며 모두가 비난하던 4번째 경기만에 그의 장기인 카운터 펀치를 통해 보란듯이 KO로 승리를 얻어냈다. 그는 커리어 내내 수많은 다운을 당했지만 그때마다 정신력으로 버티며 다시 일어섰고 그 결과 단 한번도 KO로 패배한 적은 없다. 포기를 모르는 그의 집념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날부터 나는 관장님의 특훈 아래 일명 ‘슥빡’을 연마했다. 상대의 주먹을 몸을 낮추며 피하는 ‘슥’, 그리고 상대의 주먹이 채 회수되기도 전에 내가 먼저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날려버리는 ‘빡’. 수주 간의 미트 트레이닝을 거치며 나는 이 기술 하나면 스파링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또한 수험 기간동안 공부라는 핑계로 혐오스럽게 불어났던 몸뚱이가 어느새 보기 좋게 홀쭉하게 되어 나름 민첩해진 것을 느끼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곧바로 허무하게 깨어지고 말았다. 기계적으로 연마한 동작은 실전에서 먹히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날아오는 주먹은 아직도 반응하기 힘들었고 어쩌다 슥 피했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은 쉽사리 나의 힘이 잔뜩 들어간 주먹을 맞아 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다시 익숙한 고통 속에서 씁쓸한 좌절을 맛봤다.


“과외 좀 해줄 수 있을까?”


      평소와 다름없이 고통으로 고통을 잊던 어느 날 운동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기범이 형은 느닷없는 부탁을 해왔다. 나는 처음 그 말을 듣고서 그의 가족 중에 과외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줄 알았다. 하지만 멋쩍게 부탁하는 그의 태도에서 과외의 대상이 본인임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꼭 교사가 되고 싶다는 그는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서 십수 년 만에 다시 수능 공부를 시작해보려 한다고 말했다. 인생이 걸린 새로운 도전을 하는 그를 생각해서라도 나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실패한 사람인데요. 과연 내가 누구를 가르칠 자격이나 있을까. 나는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다음 날에도 운동이 끝난 후 다시 부탁했다. 나는 그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 말았지만 애써 외면하며 또 한 번 거절했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조금 불편했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그날 밤 정말로 오랜만에 기분 좋게 잠들었다.


      개운한 아침을 맞은 다음 날, 나는 결심했다. 그리고 기범이 형에게 과외를 하겠다고 했다. 그는 하루 사이에 갑자기 바뀐 나의 태도에 꽤나 놀란 눈치였지만 그래도 연거푸 고맙다고 했다. 하지만 고마운 건 오히려 나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나의 실패한 입시 결과를 두고 나를 딱 그 정도의 사람으로 단정지었다. 하지만 그는 나의 실패한 결과만이 아닌 그것에 이르는 과정을 알아봐 주었고 거기에 들인 노력을 인정해 주었다. 누구나 노력은 한다. 하지만 누구나 원하는 성공을 하지는 못한다. 성공한 자들과 실패한 자들 사이에 분명히 노력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패한 사람들의 노력을 정말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무시해 버릴 수 있을까. 세상은 결과만을 보고 남는 것은 결과만 있을 뿐이라고 하지만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면 그 노력의 가치를 알고 있을 사람은 결국 본인 자신이다. 그에게 과외를 해주기 위해 수능이 끝난 후 쳐다보기도 싫었지만 미처 버릴 수는 없었던 나의 수많은 노력의 흔적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과외를 하였고 동시에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마음의 병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나 스스로 잃어버린 시기라고 치부하던 날들 역시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일깨워 준 그가 정말로 고맙게 느껴졌다.


“오늘은 정말 살살 할게.”


희영이 형이 오랜만에 나를 살살 꼬신다. 하지만 이제 안다. 막상 실전에선 살살이란 것은 없다는 것을.


“정말 살살이죠?”


      나는 그렇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스파링에 응해 준다. 공이 울리고 첫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초반부터 맹렬하게 날아오는 주먹을 한껏 피해 보려 애써 봤지만 결국 턱을 맞고 말았다. 많이도 맞아본 것 같은데 그럼에도 역시나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젠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다. 주먹에 맞으면 당연히 아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전처럼 예상되는 고통에 미리 움츠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먼저 주먹을 맞추려 힘껏 휘둘렀다. 하지만 노련한 상대방은 내 움직임을 다 읽었다는 듯 여유 있게 피해 버리고 내 펀치는 허공으로 향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경기가 계속된다면 나는 점점 무기력함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점점 체력이 고갈되고 라운드 초반에 보였던 그 기세는 점점 죽어 간다. 결국 나는 코너에 몰리게 되고 매번 그랬듯이 일방적인 경기가 되어간다. 나는 너무 강한 상대에게 압도당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하지만 왠지 오늘만큼은 절대로 포기하기가 싫다. 송곳 같은 펀치를 맞을 때면 너무 아프지만 그럼에도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날아오는 주먹을 최대한 보려 한다. 때리기만 하던 상대도 지쳤는지 뒤로 잠깐 물러서 한 텀을 쉬었다가 다시 가볍게 잽을 던지며 들어온다. 이 순간 내 몸은 반응했다. 슥빡! 몸을 오른쪽으로 숙이며 잽을 피한 뒤 곧바로 나의 오른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순간적으로 전기가 찌릿하게 흐른 뒤 펑 폭발하는 느낌이 났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짜릿한 파열감이었다. 너무나 강렬한 느낌에 오히려 주먹을 맞춘 내가 순간 당황했다. 이 정도면 충격이 컸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상대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멀쩡하다. 역시나 세상은 만만치 않다. 이제는 불의의 일격에 맞은 것에 기분이 나빠졌는지 전보다 더욱 강한 세기의 주먹이 날아온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는다. 비록 당장은 시련 속에 있을지라도 내게는 앞으로 다가올 라운드가 아직도 충분히 남아 있다. 그리고 나에게 그 어떤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언제든지 카운터 펀치를 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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