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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역사가 잠들어있는 중명전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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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5. 11:11

|덕수궁중명전|

 

광화문에는 역사여행을 떠나기 좋은 장소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 많이들 방문하는 곳이 바로 궁입니다. 광화문에는 덕수궁, 경복궁 등 여러 가지 궁들이 모여있는데요. 오늘은 궁이 아닌 궁 옆에 있는 숨겨진 역사의 장소로 함께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중명전으로 떠나는 역사여행 함께 가보실까요?

 


 

 

혹시 중명전 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덕수궁 돌담 길을 따라 정동극장을 무심히 지나쳐 걷다 보면 작은 골목길 앞에 중명전 이라는 입간판을 볼 수 있어요. 많은 사람들은 덕수궁만 보고 돌아가지만 사실 덕수궁 옆엔 중명전 이라는 전각이 있답니다.

 

 

덕수궁 중명전은 1897년 황실도서관으로 탄생한 곳입니다. 하지만 이 전각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비운의 장소가 되고 말았죠. 이 곳에서 바로 치욕스러운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답니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덕수궁과 달리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중명전. 시간이 흐르고 흘러 지금은 고층빌딩에 둘러싸여 있지만 몇 백 년 전에도 고종은 이렇게 겨울의 시린 하늘을 보면서 중명전에 머물렀겠죠. 1904년 덕수궁 화재 이후 고종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어요. 조선의 왕이 몇 년간 머물렀을 건물이 너무 소박해서 입구를 들어서며 마음이 좋지 않네요.

 

 

중명전은 독립문을 설계하기도 한 러시아인 사바찐에 의해 설계되었어요. 그래서 서양식 전각 느낌이 난답니다. 근대문물 수용에 앞장섰던 고종의 의지가 담겨있어요.

 

 

하지만 그 옛날 조선에는 화재가 자주 있었나 봐요. 우리가 만나고 있는 중명전은 사바찐이 만든 그 건물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랍니다. 1925년 화재로 전소되어서 그 후 다시 재건된 모습입니다.

 

 

중명전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이에요. 원래 이름은 수옥현 이었는데 고종이 거처를 옮기면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 이름 그대로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광명을 잇지 못한 게 안타깝네요.

 

 

지금은 이렇게 관광객들에게 역사의 현장으로 기억되며 을사늑약의 암울했던 사건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들어가기 전에 겨울 햇살이 유독 따스하게 느껴져 중명전 테라스에 잠시 앉아보았어요.

 

 

대한제국의 운명이 엇갈린 곳. 덕수궁 중명전이란 안내 책자 속 고종의 모습. 그리고 국사책에서 본 헤이그특사의 사진도 보여요. 일제의 협박을 받으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뺏기던 그날의 긴박함은 온데간데 없이 현재의 중명전은 고요하고 차분할 뿐입니다. 도심에 이렇게 조용한 장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관광객의 발길이 뜸했어요.

 

 

중명전의 서양양식은 지금 보아도 느낌이 색다르고 멋집니다. 독립문을 설계한 사바찐의 설계라 그런지 독립문의 아치형 느낌이 군데군데 보이는 것 같아요.

 

 

문을 열고 중명전에 들어서면 긴 복도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방들이 보입니다. 처음 중명전은 1897년 도서관의 용도로 지어졌다가 나중에는 고종이 기거했고 을사늑약 이후에는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방들이 큼직큼직한 걸 보니 처음에는 서고로 쓰였을 모습이 상상됩니다.

 

 

바닥은 예전 모습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었어요. 투명판으로 보호되어 있는데요. 투명판으로 보호되어 있는데요. 화려한 타일의 모습이 멋집니다.

 

 

먼저 오른쪽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가보았어요. 이 곳에서는 중명전의 복원 전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전시하고 있어요.

 

 

서양인이 설계해서인지 중명전 에는 벽난로가 방마다 보였어요. 우리나라 특유의 아궁이와 온돌이 없는 대신 100여년 전 이곳에서는 벽난로로 난방을 했을 모습이 떠올랐어요. 멋은 있지만 한겨울에는 춥지 않을까 싶어요.

 

 

벽난로 위에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모습이 보입니다. 중명전은 1963년 영친왕 부부에게 기증되었어요. 그 후 민간에 매각되었다가 2006년부터 문화재청이 관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중명전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지도입니다. 앞 쪽의 노란색 부분은 덕수궁의 모습이고 검은색 부분의 미 대사관저를 사이에 두고 작은 노란색 부분인 중명전이 보여요.

 

 

중명전을 만든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의 사진.

1883년 한국 정부에 고용되어 인천과 서울에서 활발한 건축활동을 했어요. 그는 고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약 20년간 머물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양식 건물을 설계했습니다.

 

 

이번엔 왼쪽 방으로 들어가보았어요.

 

 

중명전 에서 가장 규모가 큰 방입니다.

 

 

이 곳에서는 을사늑약의 전문 복사본을 볼 수 있어요. 국사시간에 전문 내용을 열심히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 이렇게 그 현장에 와서 을사늑약문을 보니 정말 우리나라의 운명이 이 종이 한 장으로 바뀐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픕니다.

 

 

이 방에는 을사늑약이 체결될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는 사진과 인터뷰 내용들이 동영상으로 나와요. 1905년 11월 18일 새벽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중명전을 침범하고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보호국으로 만듭니다.

 

 

국사책으로 배운 내용을 이곳에서 직접 체감 할 수 있다면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맞은편 방으로 들어가보았어요.

 

 

이 곳은 헤이그특사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어요. 고종은 을사늑약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회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죠.

 

 

특사 3인의 모습과 헤이그특사의 험난한 여정들이 한눈에 들어왔어요.

 

 

비록 특사들은 회의장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각 국의 대표들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고 [만국평화회의보]와 각국 신문기자단이 모인 국제협회에 한국정부의 입장을 알리는 등 외교적 노력을 펼쳤죠.

하지만 약소국을 대표하는 이들은 머나먼 타국에서 고생한 보람도 없이 머나먼 타국에서 고생한 보람도 없이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고 돌아와서도 일본에게 보복을 당하죠.

헤이그특사 파견은 실패했다고 한 줄로 기억되기에는 세 사람의 도전은 아주 값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이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것이 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는 유일한 길이겠죠.

 

 

중명전은 2층 건물 양식이지만 안타깝게도 2층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어있지 않아요. 어떤 모습인지 공개된 사진 자료도 없어서 그냥 돌아서는 발걸음이 아쉽기만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오래 전부터 중명전 테라스 벤치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노부부의 모습이 눈에 띄었어요. 그 옛날 중명전 에는 저렇게 큰 고층빌딩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지도 않았고 이렇게 일반백성들이 들어올 수도 없는 곳이었죠.

겨우 120여년전 일인데 고종황제도 이 모습을 본다면 격세지감을 느낄 것 같아요.

 

 

정동에는 우리가 가봐야 하는 유서 깊은 근대유산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다같이 돌자 정동 한 바퀴'라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도 주말에 시간을 내서 가족들과 함께 정동 탐방에 나설 생각입니다.

 

 

덕수궁 중명전도 탐방대상지에 포함되어있어요. 덕수궁에는 덕수궁과 덕수궁 돌담 길만 있는 게 아니라 꼭 한 번 둘러볼 만한 중명전도 있다는 사실 기억해주세요.

 

 

<덕수궁 중명전>

정동극장 뒤편 위치

관람료 : 무료

관람시간 : 10 : 00 ~ 17 : 00 (월요일 휴관)

주차공간이 없으니 대중교통을 이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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