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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관객을 동원한 '7번방의 선물' 의 김황성 작가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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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11. 15:05

|프론티어 기자단|

 

얼마전 개구리도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이 지나 갔습니다. 날씨도 많이 따뜻해져서 이전 정말 봄이 온걸 느낄 수 있는데요, 여러분은 혹시 '7번방의 선물' 이라는 영화를 알고 계신가요? 봄처럼 따뜻한 이야기로 천만관객을 울린 영화 입니다.

 

 

 감동적인 스토리와 잘짜여진 구성으로 대한민국 5분의 1을 스크린 앞으로 불러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런 시나리오를 쓴 김황성 작가님을 저희 프론티어 기자단에서 만나고 왔습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스틸컷

 

7번방의 선물은 대한민국 국민의 1/5에 해당하는 약 1200만 관객을 동원한 몇개 없는 1000만 관객 영화인데요, 간단히 영화를 소개해드리자면 죄질이 나쁜 흉악범들이 모이는 7번방에 6살 지능을 가진 '용구'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 용구에게는 예승이라는 7살짜리 딸이 하나 있는데요, 영화는 용구의 딸 예승이를 교도소 7번방에 몰래 데려와 키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려낸 영화입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스틸컷

이런 감동적인 스토리의 7번방의 선물에 교보생명이 나온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바로 예승이가  세일러문 가방을 받기 전에 학교에 메고 다니는 가방에 교보생명의 로고가 박혀 있습니다. 그럼 이런 감동적인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김황성 작가님을 지금부터 만나보겠습니다.

 

 

김황성 작가와 프론티어 기자단의 인터뷰는 프론티어 기자단이 묻고 김황성 작가님이 답하는 Q&A 형식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김황성 작가님께 다시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Q. 7번방의 선물을 쓰게 된 동기가 있으신가요?

 

천만관객을 동원한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라고 믿기 힘들정도로 겸손하셨던 김황성 작가님!

 

A. 어느 날 영화사에서 이전에 마음이2 작업을 끝내고 있었는데 새로운 소재가 있다며 전화가 왔었습니다. 그 사연인 즉, ‘유치원 차가 교도소 앞에 멈춰 있었고 교도소의 철문이 열리며 한 꼬마가 유치장에서 걸어 나와 차에 타더라~’ 하는 이야기였어요.

그 것을 보면서 ‘제소자의 딸이 그 곳에 있었다면? 그 중에서도 사형수의 딸이라면?’ 하는 생각이 들어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었던 제 원래 작품의 첫 제목은 ‘별’이었습니다. 그리고 ‘용구’도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들어 간 정상인의 컨셉이었죠.

그 이야기를 가지고 감독을 만났는데 그와(이환경 감독) 유영아 작가(타워, 웨딩드레스, 코리아를 씀)라는 분과 함께 각색을 하면서 주인공을 바보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아이 엠 샘에서 모티브를 써보고 싶었다는 의견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이를 통해 좀 더 재미있게 써보자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도소에서 아이를 키울 수 있냐는 것이었으니까요.

Q. 영화 제작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으신가요?

 

A. 영화 제작을 위해 이환경 감독을 만나 작업을 하다 보니, 제 동생의 친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김황성 작가님의 친동생은 배우 ‘김황도’씨 입니다.) 그리고 작품에 관한 것은, 제가 힘든 시절 교회로 이끌어 주며 위로해주고 도와주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제 동생과도 친했었죠. 그런데 그 소중했던 친구가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었어요. 그 친구의 이름이 ‘용구’입니다. 이 작품을 쓰면서 그 친구의 이름을 꼭 주인공의 이름으로 하고 싶었습니다.

 

Q. 예승이를 들여오는 과정이 매우 디테일 하던데요?

 

A. 연극 연출을 전공했던 친동생이 교도소 사역을 했었어요. 그리고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며 예승이를 들여오는 장면의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아내가 이 얘기는 하지 말라고 했는데, 제가 2번의 구치소 생활을 한 경험이 있어요. 굉장히 무너졌던 날이 왔었습니다. 그런데 그 경험을 통해 생활모습, 구조들을 포함해 교도소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할 수 있었죠. 사실, 7번 방은 제가 있었던 방이었습니다.

Q. 어려운 시기가 있었다고 하셨었는데 언제였는지 말씀 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A. 저는 30대 초반까지 굉장히 잘나가던 광고회사 직원이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의 월급이 6백만 원을 넘었고 여러 광고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들어왔었죠. 그리고 그 제의들 중 하나를 받아드려 회사를 옮기기 위해 다니던 곳을 나와 새로운 회사로 가려 했는데 IMF가 터져버렸습니다.

그리곤 졸지에 백수가 되어버렸어요. 그대로 있을 수 없어 대출을 받아 비디오 가게를 시작했는데 이중계약 사기를 당해 쌓아놨던 돈도 다 날려버리게 되었죠. 그렇게 나는 바닥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막노동도 해보고 음란CD판매에도 손을 댔었어요. 마침 그 당시 막내 여동생의 결혼식이 있어 그 자금을 대주어야 했었거든요.

결국 동생 결혼 자금은 대준 뒤 자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식을 보러 갈 수는 없었죠. 그렇게 구치소를 갔다 오게 되었어요. 그 당시에는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작품을 쓰면서  ‘아 이 순간을 위해서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한달 반정도의 구치소 생활을 하였고 사회봉사의 시간을 가지며, 지금의 7번 방 이야기는 시작되었던 것 같아요.

 

Q. 카피라이터의 삶을 사셨다고 하셨었는데, 어떻게 작가가 되신 건가요?

 

 

A. 어렸을 때 영화를 너무 좋아했어요. 부모님께서 모두 일을 하시며 내게 용돈을 주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돈으로 영화를 자주 봤었죠. 그런데 그 때, 만화영화인줄 알고 본 ‘소년 007’(나를 사랑한 스파이)이라는 영화가 알고 보니 성인영화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 영화라는 것에 푹 빠져버렸어요.

그 영화를 통해 많은 영화들을 찾아보게 되었고 영화를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딱 그 정도였어요. 영화를 내 업으로 삼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이전에 말했듯이 내 삶이 무너져 내렸을 때, 부모님 재산마저 탕진하고 완전히 꺾였을 때, ‘죽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었습니다. 광고회사에 다녔던 나는 광고가 내 인생의 전부인줄 알았었기에 더욱 막막했거든요. 그렇게 갈 곳도, 할 것도 없는 상태에서 동생의 집을 찾아갔어요. 그러다가 할 일이 없어 우연히 교회를 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교회 커뮤니티 사이트가 있었고 그곳에 심심풀이로 에세이를 올리기 시작했었습니다. 내가 겪었던 일들, 느꼈던 감정들을 그냥 생각 없이 올렸어요. 그런데 그 것이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습니다. 동생이 어느 날 와서는,


“교회 청년부 사이트에 글 올렸어?”
  “응”
“어디서 베꼈어?”
“베낀 거 아닌데?”
“뭘 베낀 게 아니야! 잘 썼던데!”
“내가 썼다니까!”
“그래? 그럼 또 써봐!”


이렇게 쓰다 보니 어느새 70편이 넘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반응이 좋으니깐 기분이 좋아졌고 글을 잘 쓰려고 점점 더 노력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일상의 모든 이야기를 다듬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교회에서 글을 쓰던 생활 중에 영화관련 일을 하는 동생의 친구가 커뮤니티 사이트의 내 글을 보고는 ‘영화 시나리오를 써보는 게 어떻겠냐?’ 라며 권유를 했었고, 그렇게 해서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어느새 영화사와 작품계약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Q. 그 첫 작품 이름이 무엇인가요?

 

A. 시그니쳐라는 작품입니다. 지금 러브픽션과 도가니를 제작했던 삼거리 픽쳐스에서 현재 영화제작 준비 중에 있습니다. 곧 극장에서 찾아볼 수 있겠네요.

 

Q. 이번 영화의 주인공인 ‘용구’를 비롯하여, 작가님의 작품인 ‘챔프’, ‘마음이’ 등의 영화에는 사회적 약자가 많이 등장하는 것 같아요. 그들에 대한 작가님의 특별한 생각이 있으신가요?

 

 

A. 장애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봤습니다. 약자에 대해서 그리고 다름과 틀림에 대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어떤 장애인이 있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사람이 옆에 앉았을 때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은 불편해하고 싫어합니다.

그 사람이 죄를 지었거나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거리를 두게 된다. 만약 그 장애인이 졸다가 여자친구의 어깨에 머리가 닿았다고 생각을 해봐요. 당신은 가만히 있을 것일까요? 아마 화를 내지는 않을까요? 그 것은 다름과 틀림을 넘어 편견이에요. 나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이유 없이 싫어하고 거리를 두는 것이죠. 특히 세상의 시점, 예를 들면 스펙 같은 것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이 그러하다고 생각해요.

명문대 출신, 해외파, 유망직종 등을 선호하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하대하고 무시하는 것, 이미 선을 긋고 들어가는 것들, 그렇게 기본적으로 깔고 가는 태도가 너무 싫었어요. 그런 감정이 저의 작품들에 반영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작품을 쓰면서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분명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작품을 통해 험악하고 악질인 7번 방의 범죄자들이 용구와 예승이를 통해서 변화되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편견을 떠나보고 싶었습니다.

 

Q. 혹시 저희 같은 대학생들, 청년들을 위해 작가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A. “과실을 따지지 마라!” 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나중에 먹게 될 과일만을 생각하고 맹목적으로 매달리지 말았으면 합니다. 과실만을 따지게 되면 그 과정은 무시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실만을 위해 어떠한 편견과 잘못도 합리화됩니다. 가치가 변하게 되고 무시되게 되는 것이죠.

지금은 내가 천만 작가라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도 그 이름만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과거의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결과만 바라봤기 때문이죠.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생각하기 이전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생각하세요.

내가 정말 좋아하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살아가길 바래요. 길은 별의 수만큼 많이 있습니다. 목적만을 생각하다가 그 과정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목적을 위해 과정의 고통을 견디려고만 하지 말고 좋아하고 과정이 즐거운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목표에 닿을 수 있습니다.

Q. 작가라는 꿈을 가진 이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A. 절박함을 느끼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나머지는 필요도 없어요, 기능적인 면은 부가적으로 배우는 것일 뿐입니다. 작가에 대한 절박함, 작품에 대한 절박함을 가지고 글에 몰두해야 해요. 그리고 그 과정을 재미있어 해야 합니다. 나는 잘 된 영화를 보고 시나리오로 써보는 연습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즐기며 나의 기술적인 측면을 끌어올렸죠. ‘내가 이 글을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 라는 절박함을 가지고 글을 쓰기 시작하니깐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르고 글을 쓰게 되더라고요. 스스로에게 절박함을 주면 더 글을 잘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절박함’과 ‘재미’을 가지세요.

 

Q. 작가님의 앞으로의 목표는 어떻게 되시나요?

 

A. 내 개인적인 목적은 할리우드를 가보는 것입니다. 모든 스텝의 도움으로 천만 작가의 계단에 올라오게 되니깐 더 높은 곳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할리우드에 진출한 한국 감독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작가로서 할리우드에 진출한 작가는 아직 아무도 없습니다.

그 곳에 가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나의 부족함을 찾고 채우며 많은 이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요. 그리고 나의 이런 모든 것들을 세상에 돌려주고 싶습니다. 사회적인 말로 ‘재능기부’라는 것을 하며 내가 받아 온 것들을 다시 돌려주며, 내가 힘들었던 것처럼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면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Q. 전국민 5명 중 1명이 영화관을 찾게 한 천만 작가가 되었습니다.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A. 얼떨떨합니다. 작가는 첫 번째 스텝일 뿐이에요. 글을 다 쓰고 난 순간 내 역할은 끝난 것이었습니다. 감독을 비롯한 다른 스텝들이 최선을 다해 천만을 만들어 준 것이죠. 나는 하나의 작품을 끝냈으니 새로운 현재의 작품에 몰두할 뿐입니다.

물론 새 작품에 임하면서 ‘천만 작가’라는 이름이 부담감으로 다가옵니다. ‘차라리 9백만에서 멈춰버리지!’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습니다. 이전에 ‘챔프’ 라는 작품은 70만에 그쳐 흥행에 실패했지만 그에 대해 나를 질책했던 사람은 없었거든요. 그렇지만 이젠 많은 이들이 내게 기대를 걸고 있고 이전과는 다를 것이라고 느낍니다.

그런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나에겐 ‘천만이라는 숫자가 큰 의미가 없다!’ 고 여기는 것입니다. 다시는 못 올 수도 있는 천만의 기회지만, 천만이라는 과실만을 생각을 한다면 분명 내 과정은 무시될 것입니다. 지금 도전하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TVN에서 새 드라마를 시작했고 영화작품들을 다시 쓰기 시작하면서 바빠졌는데 그러한 것들이 과실만을 위한 것이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앞 서 언급했듯이 난 첫 번째 스텝으로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지금 쓰고 있는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주시고 천만 작가였다는 결과만을 바라봐주질 않았으면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따뜻한 감동을 안겨준 영화, '7번방의 선물'의 김황성 작가님과의 인터뷰 였습니다. 바쁘신 시기에 프론티어 기자단을 위해 짧지 않은 시간을 내주셔서 좋은 말씀을 해주신 김황성 작가님께 다시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과실이 아닌 과정이 아름다운 작가로서, 다시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해주는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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