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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장려상 - 화맹(花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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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17. 17:06


나는 언젠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읽고 다음과 같은 일기를 쓴 적 있다. ‘타인에 게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은 결국 자신이 믿고 말고의 문제, 즉 환상에 불과하지만, 모 든 타인은 육체를 지닌 채 현실에 매여 있다. 그 부조화가 비극의 시작이다.’ 나는 지금 아버지에 대해 쓰기로 했다. 수필의 형식으로 쓸 수밖에 없다. 이 문제에 대해 쓰지 않 고 다른 글을 쓴다면 그것들은 전부 할 말을 회피하기 위한 넋두리에 불과할 것이다. 아버지는 암에 걸렸다. 나는 담배를 끊기로 결심했다. 

지금 이 글을 적어나가는 시각으로부터는 하루 전, 대략 35시간 정도 전에 아버지의 병환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건강검진 결과를 받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역시 암이 맞았어, 라고 털어놓은 것이었다. 번잡한 감정이나 사실을 숨기려는 의도가 전혀 없이 담담한 목소리라서 오히려 거짓말처럼 들렸다. 목구멍 근처에 자신을 죽이려고 용을 쓰는 세포덩어리를 달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보다는 슬프고 과격해야 할 것 같았다. 궁 금하지 않을까. 어떻게 생겼을지. 병마를 이기지 못한 환자들은 자신을 살해한 암세포 를 끝내 보지 못할 것이다. 절제하지 못한 환부가 있는 탓에 죽었을 것이므로. 육안으 로 확인하지 못한 존재로 인해 죽게 된다면, 스스로의 죽음이 무슨 질 나쁜 소문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사람들 네 명 중에 한 명을 죽이고 돌아다닌다는 살인마가 내 모가 지에 칼날을 박아 넣었는데 그 놈 얼굴도 보지 못하고 죽는다. 과연 이 놈이 그 놈일 까. 모든 암환자들이 자신의 몸 속에 암세포가 증식하고 있다는 걸 절감할 수 있을까. 나는 아버지에게 그게 정말이냐고, 확실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내가 아버지에 대해 아 는 것들이라고는 확실한 게 하나도 없었으므로 새삼 물을 필요도 없다는 생각에 굴복 했다. 

사진 찍기를 혐오하던 때가 있었다. 렌즈를 마치 애인의 얼굴인 양 웃으면서 바라봐 야 하는 일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그 찰칵, 하는 소리. 셔터를 누르면 섬세한 칼날을 귓가에 벼리는 듯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인생의 단면이 필름에 기록된 다는 게 불편했다. 무의미한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작업이란 표현은 적합한 것이다. 가 족과 함께 성수기 관광객 행렬에 섞이면 정말이지 창작의 고통이란 관념이 관광 코스 로 실재화된 것 같았으니까. 정해진 코스마다 주기적으로 사진 찍는 장소가 있었고, 광객이란 작자들은 전부 사진가 지망생이라도 되는 건지 기념사진 찍어대기에 바빴다. 봄은 생각보다 무더운 계절이었다. 사람들은 땀을 흘리고 만면의 근육을 찌푸리면서도 사진 촬영은 빼놓지 않았다. 과천의 어느 벚꽃나무길이었다. 초등학생도 되기 전, 나는 왜들 그렇게 주변 풍경에 저마다 몸뚱이를 끼워 넣고 사진을 남기려는지 이해할 수 없 었다. 벚꽃길을 한바퀴 돌고 나서 창작물을 확인해보면 어색한 표정을 짓는 자화상이 필름에 한가득 말려 있었다. 

부모님은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기록하고 싶어했다. 다섯 살 터울의 누나를 키워봤 으니 어리고 귀여운 모습은 순식간에 청소년의 골격 틈으로 사라진다는 걸 잘 알고 있 었을 것이다. 헌데 나는 사진기만 들이대면 메두사 모가지라도 마주한 양 표정이 굳었 고, 고민하던 부모님은 묘책을 내놓았다. 당시만 해도 최첨단 기계였던 캠코더를 장만 한 것이었다. 웬만한 라디오 크기의 캠코더를 오른쪽 눈에 대고, 반대쪽 눈가는 찡그린 채 입술은 한껏 웃으며 나를 촬영하던 아버지가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런 아버지를 찍 은 사진은 한 장도 없는데도 아주 선명하게. 어머니에게 촬영을 맡겼던 적이 있다. 아 버지는 양팔로 나를 들어올리고 뺨에 입을 맞추려고 고개를 쑥 뺀다. 나는 수염이 꺼 끌한 게 싫다며 떼를 쓰며 밀쳐내었다. 아버지는 그게 좋은지 실실 웃는다. 다시 입을 맞춘다. 나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 되고, 촬영하고 있는 어머니가 화면 밖에 서 깔깔 웃는 소리가 들린다. 이 장면은 텔레비전에 연결해서 촬영본을 꽤 여러 번 보 았으므로 더욱 선명한 기억이다. 다들 지금보다 젊었던 우리 가족이 둥그렇게 돌출된 브라운관 앞에 앉아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런 날이 있어서 다행이다. 이제는 그 촬영본이 담긴 테이프가 어디에도 없기 때문 에. 바람이 많이 불던 내 초등학교 입학식과 흙먼지 날리는 운동회와 가족 소풍을 떠 났던 날을 담은, 유일하게 내 유년기의 몸동작과 목소리를 담은 기록물은 몇 번의 이 사를 거치며 사라졌다. 이제는 가족 중 누구도 비디오 테이프를 화두에 올리지 않는다. 아버지는 얼마 전에 서울을 떠나며 낡은 짐들은 버리기를 원했다. 나는 강박적으로 사 진을 찍어대던 이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당신은 그럼에도 삶에서 바라던 것을 얻었나요? 얻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었나요? To call myself beloved, to feel myself beloved on the earth. 이 땅에서 나 자신이 사랑받 는 존재였다고 말하고 느끼는 것. Myself. 카버의 문장에서 타인이 나를 사랑했는지의 여부는 중요치 않다. 내가 어떻게 느끼고 공표할 수 있는지가 중요할 뿐.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가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타인이 나를 사랑했는지 가늠해보 려는 시도는 가망 없는 일을 넘어서 어리석은 몸부림일 것이다.

아버지의 목에 암세포가 기생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나는 한 방울의 눈물도 흘 리지 않았다. 몇 해 전에 할머니가 위암 판정을 받았을 때와는 대조적이었다.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자신이 낯선 사람 같았다. 아버지는 커튼 쳐둔 창문을 등지고 침대에 앉아 연신 쿨럭였다. 참담했지만, 나는 그가 없는 삶을 차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집안의 풍 경이 어떻게 달라질지와 저녁 식탁의 분위기는 어떨지. 충격적이었던 것은 아버지가 소거된 가정 상황에 대해 떠오르는 문제들이 전부 경제적인 곤궁뿐이라는 점이었다. 그가 없는 삶이 헛헛하지는 않을지 따위는 급하게 생각할 거리가 아닌 모양이었다. 당 장 줄어들 수익, 내가 책임져야 할 몫과 싫어도 해야 할 일들만을 계산하고 고민했다. 병마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돈 벌어다 주는 경주마쯤으로 치부하는 것 같아 불편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위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들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 기억이 면죄부라도 되는 양 죄책감을 지워내었다. 그러나 내가 간직한 추억들마저 불완전한 편집본이었다는 걸 곧 알게 됐다. 

아버지는 집에서 자주 나를 불렀다. 이름을 큰 소리로. 그러면 나는 부름에 따라 그 의 앞에 가야 했고, 그는 자신의 용건을 말하곤 했다. 그 권위적인 태도를 수 년간 미 워했다. 이제 목이 아픈 아버지는 목소리를 내기를 주저했고 내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나는 간혹 아버지의 방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 아버지는 씩 웃으면서 안으로 들 어오라고 손짓했다. 가족의 병환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나 자신만큼, 조용한 아버지가 낯설었다. 평소에는 않던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아버지는 오랜 시간 침상에 누워서 과 거를 회상했는지 십 년도 넘은 일들에 대해 말하곤 했다. 대부분은 내 기억에 없는 세 세한 장면들이었다. 너 벚꽃길에서 신나게 놀고 그랬잖아. 떨어지는 꽃잎을 낚아채려고 허공에 손을 휘두르고, 제자리에서 빙빙 돌다가 균형을 잃고 주저앉기도 했었잖아. 나 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를 가까이 보고 싶다고 과자를 담은 양손을 들어올리기도 했었 지. 새가 거기로 날아와 과자를 물어가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그게 될까 싶었지만, 결국 아기 새 한 마리가 너의 손바닥에 내려앉아 과자를 쪼아먹었지. 주변에 모여 있던 사 람들이 와아 하며 감탄했지…… 이런 이야기들은 내 머릿속에 없었으나 아버지에게는 당장 눈앞에 상영되는 화면인 양 생생했다. 당신의 이야기에 스스로 취한 듯, 입가에 그 시절의 미소가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아버지는 추억을 되씹으면서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였다고 믿었을 것이다. 내가 아버 지에게서 사랑받았다고 믿는 것처럼. 타인의 사랑을 점치는 건 미신을 믿는 행위와 같 다. 돌이켜보면 아버지와의 생활은 언제나 모든 게 불확실했다. 같은 벚꽃길을 걸었는 데도 서로 다른 기억을 간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했고 또 얼마나 혐오했는지, 아버지의 수명은 얼마나 남았으며 나는 언제 죽게 될지, 무엇도 확실하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아버지와의 추억거리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대부분은 다른 일들에 묻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고, 그나마 남은 장면들을 이어붙여도 하루 24 시간의 분량도 되지 않을 터였다. 그간 함께 지낸 햇수가 스무 해가 넘는데도. 비디오 테이프가 유실되어 다시는 유년기의 모습을 육안으로 볼 수 없게 된 이후로 나는 의심 많은 사람이 되었다.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아버지의 목구멍에 들러붙어 있는 암세포 뿐이었다. 아버지는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고 환상으로 현실을 이겨보 려고 며칠 동안 애를 쓰고 있었다. 나는 기억에도 없는 시절이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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