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29. 11:00
나의 어린 동생 S는 숨을 헐떡이며 태어났다. 그것은 내가 본 최초의 탄생이었는데, 그 애의 첫 숨은 다른 아이들과 비교했을 때 그다지 순탄한 축에는 들지 못했다. 엄마의 양수를 타고 흘러내려 오다 그만 제 똥을 먹어버린 것이었다. 육지에 태어난 이상 이제는 폐로 호흡해야 했으나 똥에 기도가 막힌 S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사실 그건 그럭저럭 봐줄 법한, 심지어는 애교스러운 실수였으나 호흡이라는 문제는 육지 생활에서 굉장히 심각한 사안이었다. 곧바로 수술에 들어갔고, 현대 의학이 그 불순한 배설물을 제거하고 나서야 동생은 겨우 크게 한숨 쉬어 볼 수 있었다.
S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는 언제나 호흡이 문제였다. 나는 뭍에서도 때때로 숨이 막혀 벽을 짚고 살려주세요, 외치곤 했다. 그뿐이겠는가. 우리 할아버지는 물기라곤 하나 없는 침상 위에서 산소가 돌지 않아 돌아가셨다. 죽음 무렵 할아버지의 폐는 한 모금의 숨도 수월히 들이마실 수 없었다. 마치 호흡이라는 일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버겁고,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육지의 포유류답지 않았다.
이에 언니는 손가락 사이 이음매 - 몇 밀리 되지 않는 그 얇은 피부가 예전에는 지느러미였을거라고 이야기했다. 인간은 뭍과 바다 사이, 어중간한 지역을 맴돌다 채 진화를 끝내지 못한 물고기일 거라고. 언니의 말이 맞는다면, 이 생물이 지닌 숙명이란 다소 비극적이다. 부레 대신 허파를 유전 받은 우리는 영영 바다로 돌아갈 수 없지만, 육지에선 늘 숨이 차 헐떡인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다만 안간힘1을 쓰며 살아가는 가엾은 인간들.
바다나 육지- 어느 한 곳에서도 평화롭게 호흡할 수 없는 물고기 인간들. 사실 우리가 물고기였다는 등의 이야기는 별로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는 모든 생명은 물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을 익히 들어왔다. 문제는 그 기원과의 골 깊은 불화 - 바다로의 회귀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흐르지 못하는 딱딱한 덩어리로 하는 수 없이 육지 위를 살아가야만 한다. 내내 헐떡거리며 살아가야만 한다. 그만큼 비극적이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은 없다. 실제로 인간 지성사를 살펴보면,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그 시간이 너무나 부대껴 내내 물어오지 않았던가. 우리를 왜 여기에 태어나게 하셨나요? 죽고 사는 삶은 어떤 의미인가요? 그 질문에 대해 철학자 누구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던져진 존재입니다” 라고. 이 무심한 말을 하며 아마 그는 꽤 상처받은 표정이었을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헐떡이기 시작한 가여운 내 동생 S를 떠올려 본다. 나는 그 애가 다른 어떤 학문도 아닌 과학을 공부했으면 한다. 그들은 왜 ‘존재’인가 함부로 묻지 않는다. 하물며 존재임을 자학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생명을 만들고 살게 하는 일에 몸을 떨며 감동할 뿐이다. 존재의 의의나 위상에는 관심 두기를 멈추고, 단지 살아있다는 것 하나에 큰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그러한 겸허는, 어쩌면 우리가 삶을 이해하기 위해 쌓아야 할 유일한 지식인지도 모른다.
나는 S를 통해 그것을 배웠다. 대개의 가정에서 그러하듯 콩알만 한 동생과 처음 만난 것은 어두컴컴한 사진을 통해서였다. 사진을 받아본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옆에 있는 이들을 당황시킬 정도로 엉엉 울어버렸다.
육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미세하던 시절부터 그 애는 하나의 태어남이 되기 위해 약동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분열하며 생을 향해 게걸스럽게 자라났다. 거기에는 삶을 추동하는 어떤 힘, 에너지만 완연할 뿐 그 어떤 인간적인 의도도 들어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순수였다. 그런 S 앞에서는 내가 만들어낸 모든 것이 부끄러워졌다. 전부 찢어버리고 싶었다. 수억 개의 기적을 동반하는 태어남. 그보다 더 중요하고 대단한 생명의 성취가 무엇이 있을까? 탄생 앞에서는 문명을 꾸리고 글을 쓰는 일 따위 별로 중요치 않았다. 걱정하던 존재의 인플레이션이나 유전된 비극, 잔인한 세계와의 부대낌 또한 지극히 일부인 양 생각되었다. 아니, 되려 소모적인 항의에 다름없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날 S가 보여준 것은 생명 본연이 가진 생을 향한 몰아적 의지였다. 오직 생육을 위한 세포 하나하나의 ‘생명력’이었다. 거기에는 절망이나 숙명 같은 단어가 드리울 틈이 없었다. 전부 눈부실 뿐이었다. 예전에 나는 육지에서도 자주 숨이 막혀 정신이 어지러워지곤 했다. 전문가들은 그걸 ‘낮은 물에서의 익사’라고 불렀다. 우리는 수심과 상관없이도 익사할 수 있었다. 문제는 물의 높낮이가 아니었다. 필요한 것은 삶을 사랑할 단 하나의 부표였다.
언젠가 S는 말했다.
언니, 사람은 죽으면 지옥에 간대. 그곳에 가면 심판관이 있고 잘한 일과 못한 일을 재서 벌을 준대. 누굴 구하거나 도운 적이 있으면 용서를 받는 거고, 아니라면 물레방아 같은 것에 매달려 평생 아픈 거야.
S야, 언니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구하거나 도와본 일이 없는 것 같아. 항상 나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였어.
그러자 S가 말했다. 언니, 언니는 나를 구했잖아. 언니가 없었다면 너무너무 외로웠을 거야.
나는 하려던 말을 참았다. 아직 그것을 서로 충분히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타는 목으로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 허파 가득 공기를 채웠다.
과학적 관점에서, 생명은 아주 아름답고 복잡한 유기체이다. 그것은 우주적 단위의 연산 작용을 하고, 그 결과로 헤아릴 수 없는 경우의 수들을 가져오며, 일 분 일 초가 내면의 펌프질과 투쟁의 결과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소우주이다. 이 소우주가 해낼 수 있는 일은 그러나,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하다. 차라리 그것은 어떤 신비나 기적에 가깝다. 이는 인류의 무수한 성과들 - 우주로 비행선을 올린다든지 하는 - 을 위한 수사가 아니다. 단지 한 생명. 악의나 선의 없는 작은 태어남이 만들어내는 파장에 대한 것이다. 생의 진정한 위대함은 바로 거기에 있다.
S야, 정말 나를 구한 게 뭔지 아니.
1 ‘안간힘’의 원형인 명사 ‘간힘’은 “숨 쉬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고통을 견디려는 힘”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고통 스러울 때마다 숨을 참았다. 물 속에 있는 것처럼 숨을 참으며, 아주 오랜 근원 속에서 평화를 찾았다. 고향을 그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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