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 김연수 소설가 인터뷰
봄을 맞아 화사한 옷으로 갈아입은 2025 광화문글판 봄편. 라일락 향기가 가득한 문안과 디자인이 봄을 맞이한 시민들의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져주고 있는데요.
아름다운 광화문글판 뒤에는 이를 선정하는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가 있습니다. 시인과 소설가, 평론가 등 다양한 인사들로 구성된 문안선정위원회는 2025년을 맞아 새로운 얼굴들을 맞이했죠. 지난번 교보생명이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안희연 시인 역시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에 새롭게 합류한 주인공입니다.
안희연 시인에 이어 교보생명이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으로 활동하게 된 또 다른 주인공을 만나고 왔습니다. 바로 김연수 소설가입니다. 책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만큼 꽤 두터운 팬층을 형성하고 있는 소설가인데요. 그에게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 합류 소감 등 광화문글판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Q.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작가님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김연수입니다. 저는 저 자신을 ‘고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특히 저는 연필을 좋아하기 때문에 ‘연필로 고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글이 참 좋은 건, 고쳐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작가가 된 이후로 ‘쓰는’ 것보다 ‘고치는’ 것에 큰 매력을 느꼈어요. 저도 처음엔 글을 쓰는 것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자유롭게 제가 표현하고 싶은 걸 쓸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계속 글을 고치면서 점점 나아지는 글을 보는 기쁨이 더 크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글을 쓰는 사람’보다는 ‘글을 계속 고쳐 쓰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Q.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 활동을 하게 된 소감이 어떠신가요?
광화문글판 앞을 지날 때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잔상이 남는 문장이 있기도 하더라고요. ‘왜 잔상이 남을까’ 생각해 보니 어떤 식으로든 제 과거, 현재와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하는 작업은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사람들이 사서 읽고, 그 감상을 받는 일입니다. 글을 쓰고 나서 독자들의 삶에 들어가기까지 좀 긴 편이죠. 광화문글판은 문장이 짧기도 하고 보는 사람들에게 시각적으로 입력이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 즉각적으로 개입이 되죠. 처음 문안선정위원 제의를 받았을 때 ‘어떠한 시기를 사람들과 같이 보낼 수 있는 작업이겠구나’ 생각이 들어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Q. 작가님의 마음에 잔상이 남았던 광화문글판의 문안은 무엇이었나요?
좋은 것들이 너무 많지만, 지난 2009년 가을편 문안인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가 유독 마음에 남더라고요. 보통 많은 사람들이 가을, 연말이 되면 맥이 빠져버리잖아요. ‘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올 한 해가 다 지나가는구나’ 이런 생각을 많이 하니까요. 그런데 이 시는 ‘아니야, 한 일이 매우 많아’ 이야기해 주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대추 같은 존재로서, 지나온 시간과 경험이 제 안에 다 들어가 있다고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아서 저를 다독여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광화문글판의 의미
Q. 광화문글판 문안을 선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요?
저는 글의 표현을 중요시합니다. 내용도, 우리가 사는 삶도, 하고 싶은 말도 비슷하지만 그걸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말로 표현을 하는 것이다 보니 특히 더 아름다우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치 좋은 차를 마신 것처럼 입안에서 단 느낌이 날 정도로 좋은 문장이요.
여기에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문장이면 더 좋겠습니다. 처음 봤을 땐 이런 이야기였는데, 조금 지나고보니 다른 의미가 있었구나, 생각되는 문장이요.
Q. 광화문글판이 올해로 35년을 맞았는데요. 앞으로 광화문글판이 어떤 역할을 하길 바라실까요?
광화문에서는 정말 많은 행사가 열리잖아요. 그럴 때마다 광화문글판이 사진으로 함께 찍혀 있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그걸 보는데 ‘광화문글판이 역사를 보여주기도 하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역사는 계속 흘러갈 텐데 이와 함께 광화문글판이 바뀌는 역사도 같이 연동되어 흘러간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지금처럼 그 자리에서 역사와 함께 있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나라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도 합니다.
글쓰기란? 외부의 기준을 내부로 가져오는 작업
김연수 소설가는 두터운 팬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특유의 감성으로 발표하는 작품마다 큰 사랑을 받고 있죠. 글을 잘 쓰는 비결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이들이라면 궁금해할 법한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Q.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심사도 담당하고 계신데요.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해주고픈 말씀이 있다면요?
제가 소설을 써보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운이 좋은 사람을 이길 수가 없더라고요(웃음). 그런데 재밌는 건, 운이 좋은 사람은 무언가에 ‘빠진’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겁니다. 무언가에 빠진 사람은 남이 보기에 좋은 행동을 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 자신이 좋아서 하는 거죠. 결국, 기준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글 쓰는 일 자체는 평생에 걸쳐 기준을 외부에서 내부로 가져오는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처음엔 외부의 기준으로 글을 쓰기 시작해서 괴로움이 많았어요. 기준이 외부에 있으면 글을 쓰는 게 싫고 힘이 듭니다. 여러분이 글을 못 써서 괴로운 게 아니고요, 기준 자체가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기준을 내부로 가져와 괴로움에서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Q. 작가님께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일단 저는 글을 생각나는 대로 막 씁니다. 이후 한 달 정도가 지나 글을 다시 보면, 그때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조금 더 정확히 알게 됩니다. 그럼 주석을 달거나 메모하면서 글을 고치게 되죠. 그렇게 내가 정확하게 하고 싶었던 말을 연습해 나가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우리의 정체성이 언어로 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상대방은 보통 나의 행동으로 나를 파악해요. 그런데 나 자신이 나에 대해 파악할 땐 언어로 파악합니다. 그간의 기록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죠. 심지어 언어는 계속 고칠 수 있습니다. 언어를 고치면서 나의 정체성도 점점 바뀌게 되죠. 그래서 글은 궁극적으로 나를 설명하는 일과도 같습니다.
Q. 마지막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며 평범한 미래를 꿈꾸는 이들에게 한 마디 해주신다면요?
우리는 오늘의 일을 판단할 때 오늘까지의 경험으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미래의 경험을 기준으로 오늘 일을 판단해 보면 어떨까요? 그럼 훨씬 쉬워지죠. 예를 들어 지금의 기억을 가지고 일주일 전으로 돌아가 판단해 보는 걸 상상해 보세요. 그때 불안했던 것이 별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현재가 중요합니다. 보통 우리가 과거로부터 생각하니까 헤어 나오지 못하는 거예요. 하지만 미래를 상상하며 현재를 바라보면, 현재에 대한 관점이 조금 달라지실 겁니다. 그래서 불안하실 때마다 글을 쓰는 걸 추천해 드려요. ‘좋아질 거야’라고 쓸 수도, ‘나빠질 거야’라고 쓸 수도 있죠. 그러나 글은 얼마든지 고쳐 쓸 수 있습니다. 그런 고쳐쓰기의 과정을 통해 현재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상황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김연수 소설가가 추천한 ‘봄을 맞이하는’ 책
『향모를 땋으며』 로빈 월 키머러
“이 작품은 우리와 외부 환경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제가 굉장히 흥미로웠던 지점은 언어, 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연을 ‘길들여야 하는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정지된 언어로 표현한다고 해요. 하지만 실제로 만난 자연은 정지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만’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볼까요? 우리가 실제로 만에 가보면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만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게 되죠. 그래서 인디언들은 ‘요동치고 있는 물’처럼 자연을 동사로 표현한다고 하더라고요. 그 이유는 우리 앞에 펼쳐진 자연이 계속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한다는 건 우리가 자연을 길들일 수 없다는 뜻이고요. 이처럼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정립시켜 주는 작품이라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정본 백석 시집』 백석
“『정본 백석 시집』은 저에게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을 알려준 시집입니다. 이 시집을 통해 얻은 것들을 쓴 소설이 『이토록 평범한 미래』예요.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나오는 저의 미래관, 시간관은 이 시집을 읽고 얻은 인사이트로 쓴 소설이죠. 단순히 백석의 시를 서정적인 시로만 알고 계시는데, 그 안에 깊은 의미가 더해져 있다는 점에서 추천해 드리고 싶네요.”
『나무』 고다 아야
“일단 책이 너무 예쁘고요(웃음).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 나왔던 책이라 제가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일본 전역에 있는 나무를 찾아다니며 그 이야기를 듣는 에세이인데요. ‘나무를 찾아다닌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와 읽게 되었습니다. 책 속에서 ‘휘어져 자란 나무’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그 나무를 구박하는 목재 업자가 “나도 올바른 인생을 살아오지는 못했다”라는 말을 남기는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한번쯤 읽어보시길 추천해 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