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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대 인물을 만나다, 황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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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3. 14. 10:00

‘헬조선’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헬조선은 ‘지옥 같은 조선땅’이라는 의미로 현재 한국 사회의 어려움을 지옥에 비유한 신조어 입니다. 같은 조선땅에서 과거 태평성대를 이뤘던 세종시대의 인물의 업적을 살펴보며 현재 헬조선을 극복할 수 있는 혜안을 찾아보려 해요. ‘세종시대의 인물을 만나다’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조선의 청백리, 정승만 24년, 황희 정승을 만나보았습니다.

 

 

 

황희 정승 (이하 황정승): 어흠~ 어찌 나는 죽어서도 이리 바쁜 겐가.

임병준 기자(이하 임기자): 어르신,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교보생명 프론티어 기자, 임병준이라 합니다.

황정승: 응? 기자? 그것이 무엇 하는 것인가?

임기자: 음,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백성에게 알리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황정승: 그렇구먼. 그럼 나에게는 왜 왔는고?

임기자: 어르신께서는 찬란한 세종시대의 영의정(오늘날의 국무총리)이셨기 때문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황정승: 허허 임금께서 나를 많이 아껴주시어 내 복을 누린 게지.

 

 

새 왕조, 새 임금과 함께하다

임기자: 제가 조금 알아보니 훈장부터 태종의 지신사(오늘날의 청와대 비서실장), 육조의 판서, 삼정승까지 두루 거치셨던 분이시더라고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황정승: 그 또한 임금께서 내 부족한 재능을 보듬어 쓰신 탓이네. 내가 잘나서가 아니야.

임기자 : 양녕대군 대신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세우는 것에 대해 반대하셨잖아요. 그래서 태종임금께서 그렇게 아끼시던 정승을 내치셨는데 태종임금께 서운한 마음이 남으셨겠어요.

황정승 : 아니야. 그게 아닐세. 우리 태종임금께서는 나를 정말 많이 아껴주셨네. 태종임금께서 “경(卿) 같은 자는 다년간 나를 섬겨서 나의 마음을 알 것이다. 나는 항상 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리라고 생각하였더니, 그 물음에 대답한 것이 정직하지 못하고 이와 같은 것은 무엇인가? 내가 그때 마음이 아파서 듣고서 눈물을 흘렸는데, 경(卿)은 그것을 잊었는가?”라 하셨다네. 또 그리 하시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못난 신하를 불러주셨으니, 참으로 좋으신 임금이셨네.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5월 11일>중 일부 발췌

임기자: 정말 충성심이 대단하십니다. 세종임금은 어떤 분이 셨나요?

황정승: 우리 세종임금님은 정말 일을 많이 하셨지. 몸이 편찮으셔도 말일세. 한글 창제며, 제도정비며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하신 분이시니까. 어찌 보면 나로 인해 왕위에 오르시는데 크게 방해가 되었을 것이야. 그럼에도 유배지에 있던 나를 불러주셨으니 대단하지 않다 할 수 있겠나.

임기자: 오늘날 세종임금의 업적이 높이 평가 받고 있는데, 제 소견으로는 세종임금 혼자서 그 모든 일을 다 하시지는 못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임금이 백성으로부터 믿음을 얻으면 나라를 다스리기가 쉽고, 믿음을 잃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조선의 법적이었던 <경제속육전>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셨고요.

황정승: 그렇지. 백성이 중심이 되어야만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는 법이니까. 또 제대로 된 법이 기틀이 되어야 백성들이 따를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우리 세종 임금님께서도 마찬가지셨다네.

임기자: 기록을 보니 강원도 지방에서 강원도 관찰사로서 구휼활동을 하셨네요. 부역도 중지시키시고, 세금도 가볍게 하고요. 그래서 지금도 강원도 소공대에서는 정승의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황정승: 허허 이 또한 우리 세종 임금님께서 잘 돌보아주신 은혜가 아니겠는가.

 

 

아니 땐 굴뚝에 난 연기

임기자: 어르신이 뜨끔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여쭤보고자 합니다. 관직을 사고 파는 매관매직과 간통죄 같은 비리에 얽혀 있으신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황정승: 나도 그 이야기를 들어보았네. 참으로 재미난 이야기더구나. 박포의 아내를 간통했다는 이야기는 어이가 없는 이야길세. 박포는 2차 왕자의 난에 참수당했고, 그 아내 또한 30년간 노비로 살던 자일세. 게다가 살인죄까지 지은 죄인이란 말일세. 내 나이 66세에,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은 이를 토굴에서 간통하다니. 어찌 이런 황망한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게.

임기자: 정인지, 황보인, 김종서 등도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사초(역사책)를 고친 전례가 없으므로 남긴다고 했습니다.

황정승: 부정청탁 또한 그렇네. 하나는 사헌부에서 모함한 기사였음이 드러났으니, 내 말하지 않겠네. 운오에게 받았다는 백금 또한 마찬가지일세. 나와 김익정이란 자가 돈을 받아 ‘황금대사헌’이라고 불렀다지? 내 그 금을 받았다면 승진은 물론 불가하고, 처벌 또한 받았겠지. 삼사가 여간내기가 아니지 않은가? 또 이후에 뇌물을 준 사람과 품목이 다르기도 하고 말일세. 재미난 이야기였어.

임기자: 듣고 보니 맞는 말씀이네요.

황정승: 물론 내 아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책임은 무시할 수 없겠지. 내 아들이 집을 크게 지어놓고 잔치를 벌여 나를 부른 적이 있다네. 내 어이가 없어, 당장 집을 부수라 하였다네. 관직을 지내는 자가 이따위로 크게 집을 짓고 산다면 백성들 살기는 얼마나 더 고달프겠나.

 

 

백두산의 호랑이, 황희 앞에 쩔쩔매다

임기자: 야사 하면 또 어르신을 빼놓을 수 없죠. 비 새는 집 이야기, 솜 바지 이야기 등 재미난 이야기가 많은데요. 그 중 한가지만 소개해주세요.

황정승: 이것 참, 누가 보면 내가 참 궁상 떠는 것 같이 보이겠네 그려. 예전에 김종서가 6진개척 이후에 돌아온 이야기가 생각나는구나. 김종서는 그 공으로 병조판서에 이르게 되었어. 어느 날 회의를 갔다네. 그런데 김종서 그 자가 술에 취해 삐딱하게 앉아있지 않겠나. 하급관원에 일러 “병판의 의자 다리가 잘못되어있는 모양이다. 어서 고치도록 하라!”며 불호령을 내렸지. 그제서야 김종서가 똑바로 예를 갖추었다네.

임기자: 별명이 백두산의 호랑이라던 김종서 장군이 “내가 6진을 개척할 때 밤중에 화살이 책상머리에 꽂혀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식은땀이 등을 적셨다”고 하던데요. 김종서 장군에게 왜 그렇게 모질게 구셨나요? 당대의 재상이고, 또 어르신께서 추천하신 인물인데 말이죠.

황정승: 그렇기 때문에 더 모질게 굴 수 밖에 없었던 게야. 김종서는 내 자리를 이어받을 자였기 때문이지. 김종서는 성품이 거만하고 대사를 도모하는데 너무 과격해 자중하지 않으면 낭패를 볼 것 같았어. 그래서 자만심을 꺾고 경솔하지 말라는 뜻이었지 그가 미워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네.

임기자: 그러셨군요. 김종서 장군도 그 마음을 알아챘으려나 모르겠네요.

황정승: 허허 그 친구는 영리하고 재능이 있는 자니 내 뜻을 알았겠지.

 

 

황희가 젊은이에게 말하다

임기자: 네, 알겠습니다. 마지막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어르신께서 2016년을 살고 있는 이 시대 젊은이에게 해주고 싶은 한마디 부탁 드리겠습니다.

황정승: 내가 살던 시기는 건국 초기였다네. 그런 모두의 말을 잘 어우르는 방법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이었지. 그래서 나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을 전해주고 싶네. 사람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적을 만들기 마련일세. 예를 들어 두 명이 싸우는데 한 쪽 편만 들어주면 다른 쪽은 서운할 것이 아닌가. 정치를 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어. 백성의 눈으로 보려고 했기 때문에 우리 임금님들의 덕에 누를 끼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다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 그것을 꼭 말해주고 싶었다네.

임기자: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희 선생 유적지를 찾다

황희선생과의 가상 인터뷰를 마치고 황희선생유적지를 찾았어요. 현재 파주시 문산읍에 있는 황희선생유적지는 2만 평이나 되는데요. 이 부지를 장수황씨종친회에서 파주시에 증여했다고 해요. 역시 황희선생 후손들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000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면 방촌 황희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어요. 이 곳에는 황희 선생에 대한 간략한 일화들,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유물들을 살펴 볼까요?

 

이것은 세종이 황희선생에게 하사했다는 옥벼루에요. 이 벼루는 손을 댄 자국에 결로현상(이슬이 맺히는 현상)이 생겨 무수연(無水硯)이라고도 해요. 그 당시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라고 하니 세종이 얼마나 황희를 아꼈는지 알 수 있겠죠?

 

파주에는 황희정승의 묘역도 있어요. 신도비도 세워져 있지만 세월의 흔적으로 글자가 많이 흐려졌다고 해요. 그래서 남겨놓은 탁본을 전시해놓았습니다. 묘역의 내용은 신숙주가 짓고, 안침이 글을 썼다고 합니다.

*신도비(神道碑) 사자(死者)의 묘로(墓路), 즉 신령의 길(신도:神道)인 무덤 남동쪽에 남쪽을 향하여 묘 앞에 사람의 삶을 기록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기념관을 나와 청정문을 향해 걸어가면 오른쪽으로는 반구정, 왼쪽으로는 사당인 월헌사와 방촌영당, 그리고 동상이 세워져 있어요. 청정 정치를 해도 깨끗한 정치를 하라는 선생의 유지가 담겨있습니다.

 

먼저 왼쪽에 있는 방촌 영당에는 황희 선생의 영정이 있어요. 이곳에서는 음력 2월 10일 후손들과 지역 유림들이 모여 제향을 올리고 있다고 해요. 한국전쟁 때 영당이 불탔으나, 후손들에 의해 다시 지어졌습니다.

 

영당을 지나 가면 방촌 황희 선생 동상이 보여요. 동상의 오른쪽, 왼쪽에는 각각 황희선생의 글씨가 음각되어 있으니 잘 살펴보세요.

 

동상에는 황희 정승이 세종 5년 감사 재직 중에 남긴 ‘관풍루’라는 시가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觀風樓 ‘관풍루’

軒高能却 집이 높으니 능히 더위를 물리치고
豁易爲風 처마가 넓으니 바람이 통하기 쉽네

老樹陰垂地 큰 나무는 땅에 그늘을 만들고
遙岑翠掃空 먼 산 봉우리는 푸르게 하늘을 쓰는 것 같네.

누가 보면 피서에 관해 쓴 글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서 집과 나무는 국가를 의미해요. 좋은 국가를 만들어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영정에서 돌아 나오면 반구정이 보여요. 반구정은 황희선생이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낸 곳에요. 6.25전쟁으로 인해 불탔다 이후 후손들이 조금씩 보수해 1988년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불에 타버린 반구정을 복원하기 전 본 모습을 잃은 것이 아닌가 했지만, 남아 있던 사진과 마을에서 사시던 분들의 기억을 통해 옛 모습과 똑같이 지었다고 해요.

 

누군가 황희선생께 왜 하필 먼 파주 땅에 반구정을 지었는지 여쭤보았다고 해요. 그러자 황희선생은 북쪽을 가리키며 ‘저쪽에는 송악산이 있네. 내가 태어난 가조리가 있는 곳이지.’라고 하시곤 다시 남쪽을 가리키며 ‘그리고, 저쪽에는 백악산(현재의 북악산)이 있네. 우리 임금님 계신 곳일세.’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요. 이는 곧 반구정이 효와 충, 모두를 잊지 않겠다는 황희선생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곳을 뜻합니다.

 

반구정에서 정면으로 바로 임진강과 민간인 통제선이 보여요. 저 먼 북한 땅도 원래 조선이라는 한 국가였는데, 백성을 생각하시던 황희선생께서 지금의 상황을 보시면 얼마나 안타까워하실지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황희선생의 마음을 그리고 생각을 가슴속에 새기며 취재를 마쳤어요.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며 황희선생이 한 국가의 국무총리를 오랜 시간 할 수 있었던 배경을 생각해 보았는데요. 아마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장 컸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황희선생에 관한 인간적인 수 많은 야사들이 많은데요. 이런 아마도 부와 권력보다는 백성의 삶을 먼저 생각하는 황희선생의 소박하고 일관된 신념이 만들어낸 결과인 것 같습니다. 이번 취재를 통해 저도 삶의 목표와 방향을 생각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됐어요. 지금까지 황희선생을 본받고 싶은 가꿈사 프론티어 8기 임병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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