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20. 09:15
"아버지가 택배를 못 보내신다." 엄마는 외삼촌의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 었다. 전화 너머로 밀려오는 불안함을 애써 무시하고 있는 듯 했다. 아버지가 요새 멍하니 있다고 하더라. 예전에는 분명히 기억하시던 것을 기억 못하시는 일이 많더라. 라는 말에도 세월 탓이겠거니, 우리 아버지에게 그럴 리가 없다고 넘겨오던 차였다. 그러나 이번은 아니 었다. 엄마는 의자에 걸린 옷가지들처럼 의자 위로 내려앉았다.
우리는 18년을 한 집에서, 한 주소로만 살아왔다. 할아버지는 매 철마다 고구마며 대게며 밤을 바리바리 보내주셨기 때문에 주소를 잊어버린다는 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 다. 할아버지는 배달전표 앞에서 멍하니 서있다가 쓸쓸히 집으로 돌아왔다. 타지에서 살고 있는 자식은 엄마뿐이었다. 할아버지가 알고 있던 울산 주소도 우리 집 주소 밖에 없었다. 할아버지가 주소를 기억하지 못하고 돌아오셨다는 말은 급한 전화가 되어 가족들 귀를 돌고 돌았다.
추석이 되어서야 가족들이 한 곳에 모였다. 어른들은 거실 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이제껏 못 잤던 잠이 몰아오듯이 할아버지는 해가 지자마자 잠에 드셨다. 어른들은 열린 문 틈으로 걱정이 새어들어 갈까봐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들은 문을 닫아 주었다. 끊임없이 이 어지는 이야기와 더불어 한참을 휴지곽이 울었다. 한숨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문을 열 고 들어온 엄마의 뒤로 한숨이 따라 들어왔다. 엄마는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매년 여름휴가 때마다 가던 삼척이었지만, 재작년은 부모님만 올라갔었다. 한 달 후가 추 석이니까 꼭 지금 올라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추석에 올라가자 할아버지는 나를 낯선 사람 보듯 했다. 방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불쑥 들어와서 내가 할아 버지를 불렀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장난을 잘 치셨기 때문에 우리는 장난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밥을 먹을 때, 할아버지가 불쑥 말하셨다. “쟤는 누군데 여기서 밥을 먹느냐.” 어른들은 황급하게 “첫째가 낳은 딸이잖아요. 아버지, 아버지 손녀도 기억 안 나세요?” 라고 말을 시켰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질렀다. 어른들은 이제는 내가 여름휴가 때 오지 않은 탓에 할아버지가 나를 기억 못하는 거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마른 밥풀데기처럼 밥상에 붙 었다가 떨어져 나갔다.
할아버지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던 시간부터, 나는 할아버지만 보면 눈물이 고였다. 안마의자에 앉아 밖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를 맞은편 쇼파에 앉아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밖을 한참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일어나서 길로 나갔다. 길은 위험했다. 차도 지나 고, 항구로 이어져있었기 때문에 나도 얼른 뛰어나갔다. 할아버지는 길 옆에 앉아 바다를 바 라보고 있었다. 나도 할아버지의 옆에 앉았다. 할아버지가 바라보는 풍경은 언제나와 같았다. 나 역시 이십여 년을 지나던 풍경이었다. 갈 때마다 문이 열린 텅 빈 집들이 늘어갈 뿐 마 을은 항상 그대로였다. 바다는 언제나 푸르렀고 수평선 너머에는 오징어 배와 커다란 배가 박힌 듯 떠있었다. 변하고 있는 건 사람뿐이었다. 햇볕이 따가워선지 할아버지랑 둘이 앉아 있어선지 눈물이 줄줄 흘렀다. 마침 날벌레도 눈에 들어가서 나는 옷소매로 눈을 훔치면서 울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있었다. 할아버지와 둘이 앉아있는 건 처음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그저 앉아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나는 “할아버지, 이제 들어가요. 차가 올 것 같아 요,” 라고 말했다. 할아버지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는 할아버지가 혹시 넘어지지는 않 을까 걱정하며 뒤를 따라 걸었다.
떠나는 날에 나는 할아버지한테 귓속말로 설날에 다시 올 테니까 나를 잊지 말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나는 그제야 이것이 할아버지의 장난이라는 것을 눈치 챘 다. 눈에 얼핏 어리던 장난기를. 아무도 장난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나만 눈치 챘을 그 장난 을. 나는 드디어 웃으면서 할아버지에게 인사할 수 있었다. 길 바로 앞까지 마중 나온 할아 버지를 햇빛이 따라왔다. 할아버지와 내가 쬈던 햇빛이었다.
사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사랑받는 손녀는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첫 손녀였던 우리 언니를 가장 좋아했다. 나는 언니처럼 예쁘지도 않았고, 어중간한 순서로 태어난 아기였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언니에게 애정을 가득 쏟았다. 나는 소심했고 나에게 오지 않는 애정을 갈구하 지는 않았다. 할아버지와 나의 거리는 할아버지께서 앉아있던 의자와 내가 앉던 맞은편 쇼 파의 거리였다. 할아버지가 쓰러지신 후에야 나는 할아버지에게 애정을 갈구하게 되었다. 할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말을 듣고 침대에 누워있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봤을 때부터, 할아버지가 더 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게 된 이후부터, 할아버지가 수시로 눈꺼풀이 내려앉 으며 잠에 빠져들게 된 이후부터 나는 할아버지가 갈수록 쇠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데면데면했던 나는 그제야 두려워져서 나를 기억해달라고 조르게 되었다. 나는 날벌 레처럼 할아버지의 주위를 한참 맴돌았다.
내가 할아버지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면 할아버지는 똑같이 나를 찌르던지 아니면 손가락 을 꺾었다. 할아버지 나름의 장난이자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자랑하듯이 보여주는 행동이었 다. 내가 아파서 소리를 지르면 어른들은 와서 “아버지 하지 말아요.” 하면서 나에게도 “너 는 할아버지한테 혼나는 걸 왜 자꾸 하니?” 하고 혼을 냈다. 나는 혼나면서도 아직 할아버 지의 힘이 건재하다는 것에 안도를 느끼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눈에 비친 내가 누구였을지 는 지금도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괴롭히니까 방어를 했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 이후로 나를 볼 때마다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거의 계절마다 보는 표정이었지만 볼 때마다 심장이 명치 아래로 쿵 떨어지는 느낌 이 들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이모가 할아버지에게 아버지 얘는 누구야? 하면 할아버지는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거나 할아버지께서 사랑하시던 손녀들의 이름을 불렀다. 내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저는 지영이에요 다음 번에는 꼭 기억해주세요” 하 고 집으로 돌아갔다. 결국 할아버지는 끝내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셨다.
우리는 헤어짐에 무뎌져 있었다. 시골집은 구불구불한 산길을 몇 번이나 지나야 했다. 어 릴 적부터 멀미 때문에 언니와 내가 시골집에 가는 것을 싫어하면 엄마는 항상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평생 계실 것 같냐며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도 몇 년 남지 않았다고 혼을 냈다. 엄마 나름의 충격요법이었겠지만 우리는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겪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초등학교 이후로 주변을 떠나신 분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함과 엄마의 경고에도 건강하게 이어져온 할아버지의 십여년에 근거 없는 확신마저 가지고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리가 없지. 시골집에 들어서면 할아버지는 여전히 거실에 누워서 큰 눈을 끔벅거리시며 우리의 인사를 받으실 것이고, 마루에 있는 안마의자에 앉아 집 너머를 바라보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언니는 훗날 결혼을 하면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가 야 하나 아빠의 손을 잡고 들어가야 하나라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댁에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마음 한 켠에 위안을 가지고 있었다.
문고리가 철컥거렸다. 나는 누워서 노래를 듣다가 튀어올라 문을 열었다. 열린 문에서 엄 마는 울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엄마는 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연락을 받았다. 나 는 엄마를 끌어안고 울었다.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만이 머 릿속을 계속해서 떠다니며 머리를 때렸다. 병원으로 가면서 아빠는 발인하는 시간까지는 가 야 한다며 속도를 올렸다. 아빠는 엄마를 배려하고 있었다. 엄마는 자식들 중에 유일하게 임 종을 지키지 못했다. 엄마는 가슴에 멍이 들어서 차 안에서 제대로 울지도 못했다. 아빠는 지난 주에 찾아 뵈어서 다행이라고 엄마를 달랬다. 도착하니 한시가 넘었다. 하늘에 떠오른 달은 붉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빈소에 도착하자 국화꽃 사이로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이 놓여있었다. 나는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아서 한참동안 사진을 바라봤다. 장례절차는 눈 깜박할 사이에 끝났다. 화장터로 가 면서 큰외삼촌은 나에게 영정사진과 위패를 들라고 했다. 나는 실수로라도 떨어뜨리지 않도 록 손가락에 힘을 가득 주고 걸었다. 화장이 끝나고 집으로 내려가는 길을 어른들이 울면서 뒤를 따랐다. 울음소리가 마을을 가득 채웠다. 집이 눈물에 잠길 듯이 어른거렸다. 울음소리 에 질식할 것 같았다. 나는 집을 천천히 돌았다. 집을 한 바퀴 돌면서 나는 할아버지께서 이 집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삶이 가득 담긴 이 집을 마지막으로 조금이라도 오래 눈에 담고 싶으실 것 같아서 구석구석을 다 보여드리고 싶었다. 이제 시골 집에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생각의 파도가 밀려 간 후, 남고 떠나는 모든 것들이 무서워서 으악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집을 떠나 빈소로 돌 아가면서, 나는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했던 장소에 앉아서 할아버지께서 항상 지켜보셨을 풍 경을 내려 보았다. 할아버지와 함께 앉아서 보았던 그 날처럼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햇볕은 그대로였으며 바다도, 내가 울고 있는 것조차도 그때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내 옆에는 할 아버지께서 더 이상 계시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장난처럼 웃어주시지 않을 것 이고 함께 다시 앉아서 바다를 볼 일도 없을 것이다. 슬프게도 지난번과 다르게 웃으면서 할아버지에게 인사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와 내가 쬈던 햇빛은 할아버지를 마중하듯이 슬프 게도 그 자리에 남았다.
본 게시물은 2016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수상작으로 상업적 용도의 사용, 무단전제, 불법배포를 금합니다. |
2016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우수상 - 고장 난 TV, 컴퓨터 삽니다. (6) | 2016.05.24 |
---|---|
2016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장려상 - 봄, 네가 불어오는 계절 (2) | 2016.05.23 |
2016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장려상 - 축시 (2) | 2016.05.19 |
2016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장려상 - 우주를 걸어서 (2) | 2016.05.18 |
2016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장려상 - 화맹(花盲) (2) | 2016.05.17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