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9. 10:00
저무는 계절, 가을 초입에 강원 횡성에서 저물어가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맞닥뜨렸습니다. 횡성호에서는 수몰마을의 자취와 새벽 물안개를, 옛 42번국도 고갯길인 문재에서는 울울한 단풍으로 붉게 타오르는 길을 볼 수 있었어요. 사라진 옛 마을이나 지워져 가는 옛길 위에 서서 뒤를 돌아봅니다. 지나온 시간과 걸어온 길을 자주 돌아보게 되는 건 아무래도 가을이기 때문이겠죠?
사라져 아름다운 풍경, 횡성호
강원 횡성이란 지명은 ‘횡천(橫川)’에서 왔습니다. 횡성 땅의 하천이 남북이 아닌 동서로 빗겨 흐른다 해서 ‘가로 횡(橫)’자를 쓴 게 고구려 때부터예요. 가로로 흐르는 물. 태기산에서 발원한 계천의 물길도 그렇게 흐릅니다. 계천의 맑은 물은 어답산 아래 횡성호에 담깁니다. 횡성호는 어답산의 산 그림자와 하늘의 구름을 그대로 받아내는 수면도, 갓 피어난 억새꽃이 흔들리는 수변 풍경도 가을과 썩 잘 어울려요.
호수 주위를 도는 도보코스 ‘둘레길’은 이런 경관을 보며 걷는 길이에요. 횡성호 둘레길은 모두 6개 코스가 있어요. 그중 추천할만한 것이 타박타박 흙길을 밟으며 걷는 5코스입니다. 뒤로는 어답산을 두르고 물가를 따라 코스모스와 억새가 어우러진 수변을 걷는 맛이 훌륭한 길이에요.
지금은 호수의 풍경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횡성호에서는 먼저 사람들이 떠났어요. 횡성댐이 세워진 건 지난 2000년. 담수가 시작되면서 253가구의 938명의 주민들은 수몰을 앞둔 고향마을을 떠났습니다. 중금리•부동리•화전리•구방리•포동리, 이렇게 다섯 개 마을의 대부분이 횡성호의 물 아래로 잠겼어요. 계천을 건너던 섶다리도, 전설이 깃든 장독 바위도, 바쁘게 돌아갔을 정미소도, 술 익는 냄새로 가득했던 양조장도 모두 수몰됐어요. 거짓말처럼 다섯 개 마을이 통째로 사라지고 만 것이죠.
수몰 지역의 마을 구방리에서 나고 자랐다는 이건충(79세) 씨. 그는 구방리 양조장에서 빚어내던 술 ‘의인인주’가 사라진 것을 특히 아쉬워했습니다. 의인인주는 중금리 일대의 너른 들에서 난 쌀로 빚은, 입에 착착 감기던 약주였다고 해요. “술맛이 부드러운 게, 기가 막혔지. 그만한 술은 또 없어.” 그런데 양조장 주인이 고향을 떠나자마자 타계하는 바람에 그만 술빚기의 맥이 끊기고 말았다고 해요.
이 씨는 또 계천의 물가에서 천렵을 하던 때의 이야기며 장날에 털털거리며 드나들던 완행버스를 타고 읍으로 나가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사라져 버려서, 물에 잠겨 버려서 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이야기였죠.
횡성호 상류의 습지 쪽에는 버드나무와 억새들이 자라서 하루하루 가을볕으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일교차가 큰 가을날, 습지에는 아침마다 안개가 피어올라 유화 같은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횡성읍에서 갑천면사무소로 이어지는 19번 국도의 다리 구방교. 그 다리가 건너는 횡성호 상류의 물길 위쪽에는 가을이면 아침마다 안개가 갇혀 출렁거립니다. 아직 채 수확하지 않은 수수밭과 깨밭의 구릉 너머로 펼쳐지는 습지의 경관은 인상파 화가가 그려낸 유화를 연상케 해요. 날마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마침 그곳을 찾은 날에 만난 이른 아침 안개 낀 습지의 풍경은 가히 황홀할 정도였습니다.
가을 향기 그윽한 숲길, '문재' 고갯길
횡성에는 기억의 자물쇠로 닫힌 곳이 또 한 곳 있어요. 옛 42번 국도가 넘어가던 ‘문재’ 고갯길입니다. 횡성호의 수몰 마을이 물에 잠겨 잊힌 곳이라면, 백덕산의 낮은 목을 넘어 평창으로 가는 문재 고갯길은 버려져 잊힌 곳이죠. 문재는 제법 너른 흙길로 길게 이어지는 기막힌 숲길이에요. 비포장 흙길을 따라 일제강점기 무렵에 심었다는 80년생의 낙엽송과 붉은 둥치의 소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도열해 있고, 그 아래로 가을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있어요. 길 너머의 숲은 원시림이라 할 만큼 깊고 짙습니다.
문재를 찾아가는 길은 까다로워요. 길의 초입을 알리는 표지판조차 하나 없다. 불편함보다 횡성 사람들이 ‘이 좋은 길’을 몰라본다는 서운함이 앞섭니다. 지도로 찾기도 쉽지 않고 내비게이션도 소용없으니 집중해서 읽고 순서대로 찾아가보세요. 먼저 횡성의 방림에서 안흥 쪽으로 42번 국도를 따라 달립니다. 운교1리 마을회관에서 운교치안센터 쪽으로 넘어가는 자그마한 다리인 운교를 건너 국도로 1.9㎞쯤 갑니다. 그쯤에 갑자기 나타나는 n자 갈림길에서 우회전하면 거기가 문재로 이어지는 들머리에요. 들머리에서 문재까지는 걸어도 좋고, 차로 가도 좋아요. 비포장 흙길이긴 하지만 길이 순해서 승용차로도 쉽게 오르내릴 수 있어요. 길 초입에서 시작되는 건 흰 수피가 돋보이는 자작나무들의 사열. 곧이어 길섶의 가을 야생화가 마중 나옵니다. 쑥부쟁이•참취•산감채•미역취…. 그 뒤로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기다려요. 유연하게 굽은 흙길은 왼쪽으로는 내내 벼랑을 끼고 이어집니다.
나무들 사이로 가을 색으로 바뀌어가는 건너편 산의 능선이 환해요. 이렇게 들머리에서 문재 고개까지는 5㎞ 남짓이에요. 오르막이긴 하지만 경사는 부드러워 왕복 서너 시간쯤이면 여유 있게 걸을 수 있습니다. 문재로 오르는 길가에는 간간이 길 안쪽 숲으로 들어가는 나무데크가 놓여있는데요. 산림청에서 ‘명품숲’이란 이름으로 숲 깊숙이 걷기 코스를 놓으면서 조성해둔 것이에요. 그나마 이 숲을 알아본 것이 산림청이었던 셈이죠. 촉촉한 습기를 머금고 있는 참나무 숲에는 바스락거리는 이른 낙엽 아래에서 수런거리며 버섯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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