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26. 10:00
최근 영화 동주의 개봉으로 윤동주 시인이 재조명되고 있는데요. 윤동주 시인 타계 71주년 기념으로 만들어진 영화 동주. 윤동주의 이름 석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만큼 친근하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서시’ 말고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윤동주 시인의 생애를 짚어보려고 해요. 그의 시처럼 영롱한 삶을 살고 간 윤동주 시인의 삶과 시를 음미해보세요~
영화 동주로 재조명되고 있는 시인 윤동주
영화 <동주>는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1945년 평생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시인 윤동주와 독립운동가 송몽규의 빛나던 청춘을 담은 영화에요. 라이징 스타 강하늘과 박정민이 출연했고, 영화 <왕의 남자>와 <사도>의 이준익 감독이 만들었습니다.
북간도 명동촌의 재주꾼
(고향 중국 북간도 명동촌의 막새기와. 명동촌의 마을 사람들은 모든 집의 막새기와에 무궁화, 십자가, 태극문양 등을 새겨 넣을 정도로 애국심과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시인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어요. 1917년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으로 연합군에 속해있던 일본이 노골적으로 제국주의의 야욕을 뻗쳐나갔던 시기입니다. 이런 힘든 상황 속에서 윤동주는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요. 어린 윤동주가 다녔던 교회 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어린 동주는 너무 순수해서 누가 뭐라고 하면 눈물이 금세 그렁그렁해지는 아이였다고 해요. 순수하면서도 당찬 성격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윤동주는 웅변대회에 나가려고 귤 궤짝에 올라가 연습을 하기도 하고, 축구도 잘했다고 해요.
어린 윤동주에게는 또 하나의 재능이 있었어요. 바로 재봉틀을 잘 다루었다고 해요. 축구팀 친구들 옷에 직접 백넘버를 달아줄 만큼 재봉틀에 소질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민한 감수성만큼 손재주도 좋았나 봐요. 윤동주 시인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니 더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소년, 청년이 되다
시인 윤동주는 어렸을 때, 만주 북간도의 명동 소학교 졸업 후 중국 용정에 있는 은진 중학교에 입학했어요. 윤동주는 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요.
초 한대
윤동주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려 버린다.
그리고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17세의 나이에 지은 작품들 중 하나인 ‘초 한대’입니다. 윤동주의 초기 작품인데요. 시를 읽으니 정말 눈 앞에 초 한대가 아른거리며 진한 향내를 풍기는 듯 하죠? 윤동주는 이때부터 본인 작품에 시를 지은 날짜를 적었어요. 이런 디테일이 심상치 시인임이 드러나는 대목인 것 같아요.
이후, 은진 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입학합니다. 당시 숭실중학교장 윤산온이란 분은 민족정신이 투철했던 사람으로 윤동주가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고 보여져요. 하지만 입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퇴를 하는데, 그 이유는 신사 참배 때문이었어요.
여기서 잠깐! 신사참배란? 신사는 일본의 민간종교 ‘신도’의 사원이에요.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조선땅에 신사를 곳곳에 세우고 조선인들을 강제로 참배하게 했어요. 조선과 일본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합리화 하려는 행동이었습니다. 따라서 신사참배는 ‘조선’이라는 민족정신을 없애려는 일본의 무서운 음모가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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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참배를 거부한 윤산온 교장은 해임되고, 교장이 떠난 숭실중학교도 결국 신사참배 명령에 굴복하고 말아요. 이를 참지 못한 윤동주는 자퇴를 결정하게 됩니다. 이후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학원을 졸업하고, 졸업생 윤동주는 1938년 연희전문대학(현재 연세대학교)으로 입학해요. 이 당시에 조선어는 거의 금기 시 되었지만, 연희전문대학에서는 가능했거든요. 글을 좋아하던 윤동주는 문과 진로를 희망했고, 아버지는 법대나 의대를 가길 바라면서 아버지와 대립 했다고 해요. 결국 윤동주 시인의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설득시켜 윤동주는 연희전문대학 문과에 입학할 수 있었답니다. 위인처럼 느껴졌던 윤동주 시인도 진로를 두고 부모와 대립했다니! 괜히 신기하기도 하고, 내 주변 이야기 같아 친근감이 느껴져요.
(연세대학교 핀슨홀, 윤동주가 살던 기숙사로 현재 윤동주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때부터 윤동주는 연희전문대학 기숙사에서 살게 돼요. 2년 후 그의 친한 벗인 정병욱을 만나 함께 하숙도 하며 친하게 지냅니다.
(윤동주와 친구 송몽규의 학적부와 성적표. 윤동주와 송몽규의 이름에 빨간 펜으로 두 줄이 그어져 창씨된 성이 기재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당시에는 일본어가 국어였기 때문에, 한국어가 조선어와 조선문학으로 기재되어있다.)
이후 연희전문대학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시작해요. 이 시절 윤동주는 하얀 도포를 입고 친구 정병욱과 인왕산 자락을 산책하곤 했다고 해요. 현재 그 언덕은 ‘시인의 언덕’이라 불리고 있어요. 이 하숙 기간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별 헤는 밤’, ‘참회록’ 과 같은 명시를 써 내려갔습니다.
(윤동주가 친구 정병욱과 함께 산책했던 시인의 언덕)
정병욱 씨는 ‘윤동주는 시를 함부로 써서 원고지 위에서 고치는 법이 별로 없었다’고 말합니다. 즉, 한편의 시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주일, 몇 달 동안을 마음속에서 고민하다가 한 번 종이 위에 옮기면 그것으로 완성되는 것이라고 하네요.
천재적인 시인 윤동주 말고, 인간 윤동주는 어떠했을까요? 윤동주는 학번으로는 2년, 나이로는 5살 어린 정병욱에게 늘 ‘형’을 붙여 ‘정형’이라고 칭하며 반말을 쓰지 않았다고 해요. 그 만큼 남은 존중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뜻이겠죠? 또 어떤 자리에서도 남의 험담을 하지 않았다고 해요. 윤동주 시인은 인간적으로도 완벽한 모습을 갖춘 아름다운 청년이었던 것 같아요.
후쿠오카에서 진 별
1941년 연희 전문대학교를 졸업하고, 윤동주는 그간의 시를 모아 시집을 발간하려 했어요. 세 부를 필사하여 한 권은 자신이, 한 권은 정병욱에게, 한 권은 자신의 스승 이양하 선생께 건넸죠. 원래는 77부 한정판으로 발간하려고 했지만 이양하 선생은 시집의 출간을 만류해요. 왜냐하면 그 당시 2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이었던 일본의 감시와 통제가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시집을 발간 하더라도, 시가 뭉텅뭉텅 잘려나갔을 거에요. 이 당시 윤동주는 국권을 되찾아오려면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유학을 결심해요. 하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윤동주를 일본에서 받아주지 않아 결국 윤동주는 ‘히라누마 도슈 (平沼東柱)’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말아요. 이 일로 윤동주는 엄청난 고뇌에 휩싸이게 돼요. 창씨 개명 닷새 전 쓴 시를 통해 그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회록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줄에 줄이자
―만이십사년일개월(滿二十四年一個月)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지식인으로서의 나, 식민지의 백성으로서의 나, 망국 조선의 한 사람으로서의 나. 이러한 시인의 정체성을 모두 부정해버려야 했던 창씨개명. 시인 윤동주의 절명시(絶命時)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 이 작품은 고국에서 작성한 마지막 작품이에요. 이후 윤동주는 일본 교토의 도시샤 대학에 입학하고, ‘쉽게 씌어진 시’와 4편의 작품을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로 보내요.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시인 윤동주는 굴복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저앉아있지 않았어요.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모습이 엿보이는 시에요. 그러나 이 시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43년 7월 친구 송몽규가 일본에서 독립운동 혐의로 붙잡히고, 고향에 가려고 준비하던 윤동주 또한 같은 죄목으로 붙잡히게 돼요. 그렇게 2년형을 구형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며 이름 모를 주사를 계속 맞았다고 해요. 이러한 일본의 잔인한 만행 속에 1945년 2월 16일 결국 윤동주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눈을 감습니다. 불과 광복 6개월 전이었습니다. 후쿠오카 형무소는 일본 내에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형무소에요. 그러나 윤동주는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기에 더욱 안타까움이 남습니다.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의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이다)
힘겨웠던 일제 강점기, 우리 말로 한 글자씩 눌러쓴 시들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는 이름의 시집으로 시집으로 발간되었어요. 이 시집은 윤동주가 정병욱에게 주었던 필사본이 있었기에 발간될 수 있었어요.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어로 된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위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병욱은 고향집으로 필사본을 들고 갔죠. 정병욱은 어머니에게 필사본을 맡겼고, 아들의 부탁을 받은 정병욱 어머니는 명주보자기에 싸서 고향집 양조장 바닥을 뜯어 보관했다고 해요.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시는 선과 정의를 담고 있고, 깊은 철학을 담아내고 있어요. 3월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인 봄, 윤동주의 시 한편을 읽어 보는 건 어떨까요? 별이 바람에 스치우듯, 윤동주의 영롱한 얼이 우리들 마음에 스칠 거에요. 지금까지 윤동주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고 싶은 가꿈사 프론티어 신혜리, 임병준이었습니다.
*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포스트 / 교보문고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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