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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우수상 - 청춘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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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25. 11:00


“저기…… 여기 혹시 필름 파나요?”

“예? 무슨 필름이요?

“사진 찍을 때 쓰는 필름이요.”

“아, 그 필름! 없어요. 요즘 누가 필름 사진을 찍어요.”

벌써 다섯 번째 가게였다. 이쯤 되니 내가 괜한 짓을 하고 다니는 걸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휴학을 결정했지만 나는 영어공부나 자격증 공부 같은 취업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냥, 취미를 하나 가져야겠다고 마음먹고 그것을 실천하려 하고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는 나를 한심한 대학생이라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몇몇 어른들,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주변 친구들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내게로 내리꽂히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어디에 있을지, 아니 어딘가에 있기는 한 건지조차 의심스러운 물건을 찾기 위해 추운 거리를 돌아다니는 일은 꽤 힘들었다. 게다가 내가 애타게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 남들에겐 하찮은, 조금의 관심조차 끌어내지 못하는 것에 불과하단 사실 때문에 더욱 진이 빠졌다.

더는 사람들이 찾지 않게 된 물건을 나 혼자만 이렇게 좇고 있는 일이 자신을, 어쩌면 주변까지도 지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모두가 취직을 위해 아등바등하는 때에 글을 쓰겠다고 휴학을 한 상태였기에 더욱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군데만 더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다 어느 허름한 상가건물을 발견했다. 저기라면 옹기종기 모여있는 가게 중에 한군데쯤은 필름을 팔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쪽으로 향했다. 입구의 유리문에는 붙였다 떼어낸 테이프 자국들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그 위로 정성스럽게 글귀를 적어 넣은 꽃분홍 색지가 붙어있었다. ‘꽃다발 주문받아요.’라고 적힌 문장 옆에 그려진 꽃다발 그림을 보며 문득 졸업시즌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했다. 4년 동안 휴학 한 번 하지 않고 학교에 다닌 동기들은 졸업을 앞두고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작은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 바퀴를 다 돌 때쯤에 꽃집이 보였다. 이토록 찬바람이 부는 날씨에도 꽃은 자기 자신을 피워내는구나. 어쩐지 대단해 보였다. 오랜만에 꽃을 보니 마음속까지 환하게 불이 켜지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꽃집에서 눈을 돌리니 근처 모퉁이 쪽에 작은 사진관 하나가 보였다. 주인은 중년을 갓 넘긴 남자였다. 그는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서 컴퓨터로 지뢰 찾기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얼른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필름 있나요?”

남자가 마우스를 딸깍거리던 손을 멈추고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생소한 단어를 들은 듯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민망해하는 것은 오히려 남자 쪽이었다.

“요즘 아무도 필름을 안 쓰니까……. 사진관도 다 디지털이에요, 요즘은. 옆에 문방구에 가봐요. 거기 몇 개 갖다 놓고 팔아요. 현상은 학생이 원한다면 내가 해줄 수는 있어요.”

나는 남자에게 간단한 인사를 한 뒤 옆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방구 주인은 간판도 달아 놓지 않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가게는 아주 작은 공간에 자리해 있었는데, 저런 곳에 놓여 있는 물건을 어떻게 꺼낼까 싶은 데까지 물건들이 빼곡하게 쌓여있었다. 필름을 찾기 위해 여러 곳을 전전했던 이야기를 하니 주인이 웃으며 이런 말을 했다.

“나도 소량만 가져다 놓아요. 필름 때문에 부러 찾아오는 소수 단골을 위해서요.”

순간 나 말고 또 있었구나, 하는 안도감에 일면식도 없는 문방구 단골들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나도 그 단골들 중의 한 명이 될 것 같다고 말하곤 가게를 나서려는데 여자가 말을 이었다.

“나는 젊었을 때 탐험가가 되고 싶었어요. 배낭 하나만 메고 전 세계를 누리며 무엇이든 담아내는 것이 내 꿈이었지요. 지금은 여기 이렇게 붙박이가 되어버렸지만.”

너무 작아서 흘려 들을 수밖에 없는 목소리였다. 읊조리는 여자의 말은 갈 곳을 잃고 허공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공중에선 사그라져버린 여자의 혼잣말은 깊은 밤을 떠도는 반딧불처럼 내 안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다.

처음 필름카메라를 사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내게 괜한 짓을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었다. 카메라를 잘 아는 선배에게 얘기했을 때도, 그게 얼마나 불편한지 아느냐는 핀잔을 들었었다. 요즘은 필름을 파는 곳도 거의 없을뿐더러 현상을 하고 스캔, 인화까지의 과정이 꽤 번거롭다는 것이 이유였다. 비용과 시간문제를 고려해서 아무리 봐도 디지털이 주는 이점이 필름을 능가하는데 너는 왜 굳이 그 귀찮은 걸 하려고 하냐는 것이었다. 타당하고 합리적인 조언이었지만 나는 결국 고집을 꺾지 않았다.

처음에는 필름 사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날로그적인 사진의 질감 때문에 필름카메라를 사고 싶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우연히 보게 된 사진 속 인물은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이 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타인의 모습을 통해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어린 시절 의 내가 찍혀있던 오래된 앨범 속 사진들이 기억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누군가가 남겨놓았기에 내게 새겨진 기억들. 그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결이 하나하나 모여 지금의 내가 된 게 아닐까. 그런데 왜 하필 필름이냐고 묻는다면,

현상해보지 않으면 모르니까요.

사실 다들 입을 모아 단점이라고 말하는 것이 필름의 진짜 매력이다. 그것은 바로 ‘기다림’이다. 불편함이 왜 매력이 되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기다림의 시간이 얼마나 멋지고 설레는 순간인지를 알까.

나의 첫 필름카메라는 ‘미놀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무슨 뜻일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미놀타는 ‘열매를 맺다, 여물다, 결실을 보다’라는 의미의 ‘미노루 (みのる )’를 변용한 말이었다.

너무나 절묘하지 않은가. 사진을 찍는 과정은 여물기를 기다리는, 기대하는 과정인 것이다. 현상과 인화의 과정을 거치기 전까지는 누구도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 없다. 예측은 아마도 언제나 절반만 성공할 것이다. 무엇을 상상하든 여물기 전까지 그것은 늘 미완의 상태일 테니까.

나는 아직도 필름이 감기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절로 기대를 품곤 한다. 곧바로 확인할 수 없으니 더욱 기다려지는, 충분히 의미 있는 그 ‘순간’을 말이다. 

내가 기록하고 싶었던 것은 ‘지금, 여기’다. 나는 내 청춘의 증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도 열심히 남겨두고 있다. 나 자신을, 나를 둘러싼 주변을, 지나다니는 길목의 사소한 풍경을, 취업을 위해 늦은 밤까지 붉을 밝혀두고 있는 나의 친구들을, 혹은 커다란 배낭가방을 메고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낯선 땅의 흙을 밟으며 나아갈 누군가 까지도 가능한 만큼 담아두는 중이다.

어느 날 필름을 사기 위해 문방구에 갔을 때, 가게엔 빳빳하고 커다란 천이 물건들을 덮어두고 있었고 그 앞엔 ‘잠시 휴업 중’이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팻말의 여백엔 누군가 붙여놓은 사진 한 장이 있었는데, 한 손에 카메라를 들고 낯선 타지에서 브이자를 그리며 웃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사방이 가로막혀있던 비좁은 공간에서 넓은 평원으로 옮겨가 있는 그녀의 몸짓은 가볍고 자유로워 보였다. 가게를 방문하던 내내 한 번도 본 적 없는 천진난만한 표정은 그녀를 어느 때보다도 친근해 보이게 했다. 여자의 ‘지금, 여기’는 세월을 돌고 돌아 ‘저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당분간 필름을 구하는 것이 번거로워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진행 중인 여자의 청춘을 응원하고 싶어졌다.

우리는 지금 자신의 청춘을 현상(現像)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방황하는 건 청춘을 보내고 있는 자들이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現狀)일 것이다. 현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까 미리부터 자신을 재단하고 속박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미래를 알 수 없기에 불안하지만 그것은 때때로 ‘가능성’의 다른 말이 되곤 할 테니까. 

며칠 전 나는 어느 초등학교 옆으로 나 있던 기다란 돌담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걷다 보니 옆에서 자꾸만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기다랗게 늘어진 자태며, 생기 넘치는 연둣빛 조그마한 봉오리를 수십 개 달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개나리가 틀림없었다. 우리는 서로 재촉하지 않고 한 발짝씩 디딜 때마다 함께 흔들거리고 있었다. 개나리 무리 사이로 새어 나오던 태양 빛 몇 줄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그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 스치는 봉오리의 감촉은 부드러우면서도 꽃을 피워낼 준비를 하는 듯, 단단했다.

그토록 환한 풍경을 보고 있자니 절로 카메라에 손이 갔다. 나는 셔터 버튼을 꾹 눌렀다.

찰칵, 하고 조리개가 열렸다 닫히는 사이 필름에 봄의 무늬가 새겨진다. 

지금, 여기에서 청춘이 현상되어가고 있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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