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광화문글판

본문 제목

2016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우수상 - 고장 난 TV, 컴퓨터 삽니다.

본문

2016. 5. 24. 11:00


고등학교 삼학년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어느 나른하고 선선한 오후의 국어시간이었다. 그 해 우리 학교에 새로 부임해 오셨던 젊고 아름다웠던 국어 선생님은, 춘곤증에 식곤증으로 괴로워하던 우릴 향해 교실 공기가 탁하니 창문을 모두 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창문을 열자 비로소 맑고 신선한 공기가 부드럽게 들어왔다. 교실로 들어온 것은 단지 시원한 공기뿐만이 아니었다.

“고장 난 TV, 컴퓨터 삽니다. 고장 난 에어컨, 냉장고 삽니다......”

익숙한 소리도 함께 교실로 들어왔다. 오래된 고물들을 처리해가는 트럭이 학교 옆 도로를 천천히 지나가면서 내는 오디오 소리였다. 그리고는 모두가 자습을 하고 있던 적막한 교실 속에서 선생님이 입을 떼셨다.

“날이 따뜻해지고 엄마들이 창문을 열면 항상 저런 소리들이 들려오잖아. 나는 저게 바로 봄이 오는 소리라고 생각한단다.”

고등학교의 마지막 일 년을 내 인생의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보냈던 나는, 결국 그토록 꿈에 그리던 대학에 입학했다. 처음 대학생이 되어 맞았던 작년 봄은 재작년의 봄과는 사뭇 달랐다. 어쩐 일인지 고장 난 컴퓨터와 냉장고를 사가겠다던 고물상들의 확성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캠퍼스를 거니는 동안 나의 귓가에는 내 또래 새내기들의 명랑한 웃음소리와 재잘거림만이 항상 맴돌았다. 대학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은 작년 3 월의 봄을 더욱 들뜨고 설레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렇다. 나에게 대학이라는 곳은 고등학교 3 년간의 고된 수행을 보상해주기에 충분한 선물이었다. 처음으로 느껴본 자유와 낭만. 당시에는 ‘20 년 긴 세월 사느라 고생했다. 오랜 시간 수고했으니 여기, 자유와 낭만을 누리시게.’라고 세상이 나에게 말하는 듯 했다. 고작 일 년 전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말 그대로 대학 새내기다운 발상이었다. 그렇게 내 인생에서 20 살의 봄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고 뒤이어 여름과 가을, 겨울도 세차게 지나갔다.

또 다시 마주한 나의 봄, 그리고 너의 봄. 온 땅 위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던 겨울이 지나가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싹이 돋고 꽃이 핀다.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이 땀을 흘리고 애를 쓰는지 우리는 모르고 산다. 문득 미당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가 떠오른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


그러하다. 어린 아이의 두 뼘 남짓한 꽃 한 송이를 피우기가 이렇게 힘든 일이다. 소쩍새가 울고 하늘이 요동쳐야 비로소 순수하고 아름다운 결정체가 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청춘(靑春). 인생의 봄인 셈이다. 인생의 모든 시간들을 통틀어 가장 푸르게 빛나는, 가장 싱그러운 봄이다. 하지만 2016 년의 봄을 마주하는 지금, 내 주변의 대학 동기들을 보면 그들이 그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봄’을 누리고 있다고 보이진 않는다. 물론 나도 포함된다. 이제 막 대학에 입학했던 20 살의 나는 의심의 여지없이 내 인생의 봄을 만끽하고 있었고 결코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지난 1 년 사이 나와 나의 동기들은 스펙과 취업준비라는 난관에 부딪혔고 10 년 후, 20 년 후에 남들보다 윤택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자격조건에 괴로워하고 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했던가. 학문적 본질을 탐구하기 보다는 당장의 학회활동과 온갖 대외활동 입상이 급한 우리에게 진리가 제시하는 ‘진리담보자유대출조건’은 그리 와닿지 않는다. 내가 무얼 하고 싶은지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 걸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훗날 우리에게 월급을 주며 일을 맡길 그들이 우리로 하여금 무얼 필요로 하는지가 중요할지 모른다. 지난 일 년 간 너무도 많이 변해버린 나 자신을 생각하며 자조하고 탄식하지만 이러는 순간에도 나는 다음 달에 있을 토익 시험을 위해 다시 책을 펼친다.

청춘이 이렇게도 힘들 줄이야. 꽃을 피우기가 이렇게도 힘들 줄이야. 몇 년 후 나의 이력서에 단 몇 줄이라도 더 넣기 위한 처절한 고군분투. 어쩌면 우리는 현실을 받아들여야할지 모른다. 20 세기의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생은 Birth에서 Death까지 끊임없는 Choice의 연속’이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인생이란 선택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Competition뿐이다. Birth에서 Death로 가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Competition으로 가득 찬 이 세계에서 적어도 지금 바로 옆에 앉은 이 사람보다는 풍족하게 살기 위해, 우리는 스펙을 갈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당장의 취업을 가능케 해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일종의 자기위안이자, 미래의 취업을 위한 또 하나의 보험을 들어놨다는 안도감을 얻기 위함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최근 2015 년 대졸 무직자가 334 만 명을 기록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334 만 명의 청춘들은 334 만 가지의 꿈과 목표의식을 상실한 채 경쟁사회의 부추김에 떠밀려 지금의 여기까지 와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된 생존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청춘이란 꽃은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를 생각해보면 종종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당시 6 월 모의고사 국어 과목에서 여섯 문제를 틀리고 잔뜩 기분이 상한 채 독서실에서 엎드려 운 적이 있다. 지금에 와서는 그때 왜 그런 궁상 맞는 짓을 했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바로 그때 당시에는 그것이 큰 문제였다. 아주 큰 문제였다. 하지만 불과 2 년 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은 그때 틀린 국어 여섯 문제가 도대체 어떤 내용이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고 사실 생각해보면 그것들이 수능에도 딱히 큰 영향을 준 것 같진 않다. 어쩌면 10 년 후 어느 회사에 취직하여 대학 시절 나의 모습을 회상할 미래의 나는 바로 이렇지 않을까? 학점과 스펙, 자격증에 대한 부담감으로 나, 너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죽을 것 같이 힘들다. 나는 너의 시련과 고뇌를 부정하지 않는다. 너 혼자만 힘든 게 아니라고, 너보다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질책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너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아주 조금만 더 견디고 기다리자’라는 것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한 천둥번개라고 생각하자. 언젠가는 사라질 비바람과, 상상치도 못한 아름다움과 고결함으로 피어날 너의 꽃을 기대하며.

이렇게 우리의 봄은 천둥번개와 소낙비를 수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이 소중한 이유는 그것들이 지나간 후 곱게 피어날 한 송이의 꽃 때문일 것이다. 젊은 날의 방황과 번민을 거쳐 비로소 원숙한 삶의 경지에 도달했을 화자의 누이처럼 말이다. 이토록 소중한 봄이 부서질까 걱정하는 우리는 아무도 모르는 작은 소리로 봄에게 속삭이곤 한다. 하지만 그렇게 걱정을 하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다. 세상의 벽에 부딪혀 넘어진 청춘들이 좌절하고 상심할 때 비로소 들리는 위로의 소리. 그렇게 봄은 우리가 부서질세라 아무도 모르는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마치 어느 봄날에 찾아온 고물상 트럭처럼.

“아름다운 청춘이여,

그대의 고장 난 마음과 시련은 내가 사가겠소.”


본 게시물은 2016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수상작으로 상업적 용도의 사용, 무단전제, 불법배포를 금합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