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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성주 한옥 마루에서 보내는 느긋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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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14. 16:07

서늘한 대숲 그늘 속에 들어선 정자의 툇마루. 거기서 누군가와 마주 앉아 조용히 바둑돌을 놓으며 보내는 느긋한 휴가를 생각해보세요. 처마 끝에 빗물이 후드득 쏟아지는 날, 서늘한 한옥 마루에 책을 베고 누워 혼곤한 낮잠에 빠지는 휴가는 어떨까요. 


경북 성주. 그곳에 한눈에 반할 만한 한옥 두 채가 있습니다. 하나는 집의 깊이를 높이로 구현해낸 ‘사우당종택’. 반질반질 윤이 나는 차가운 마루와 대숲 소리 서걱거리는 높은 자리의 정자, 불 붙듯 타오르는 배롱나무꽃을 품고 있는 집이에요. 다른 하나는 지은 지 고작 삼십 년 정도지만, 저절로 ‘아무것도 하지 않게 만드는’ 매력을 품은 소박한 한옥 ‘아소재’에요. 



깊이를 높이로 구현해낸 집, 사우당종택 

집은 깊었고, 그 깊이가 특이하게도 높이로 구현됐습니다. 문간채에서 사랑채로, 거기서 다시 안채, 그리고 서당, 그 뒤의 대나무 숲 안에 재실이 있어요. 건물은 순서대로 각기 단(檀)을 이루며 높아졌습니다. 깊이 들어설수록 건물이 들어선 자리가 높아져요. 전통적인 한옥에 현대적인 미감이 살짝 얹어진 듯한 느낌이랄까요. 숨기고 가리는 대신 높이고 드러냈음에도 집은 위압적이지 않습니다. 유순하고 우아하게 바깥을 향해 열려 있어요. 

경북 성주 윤동마을에서 만난 이 집이 사우당종택이다. ‘사우(四友)’는 종이•붓•벼루•먹을 뜻하기도 하고, 눈 속에 피는 동백•납매•수선화•옥매를 이르기도 해요. 500년 전 이 집의 어른이 ‘사우당’을 호로 삼았습니다. 사우당종택은 그 어른의 후손이 15대를 이어온 종가에요. 문무를 겸비했던 사우당 김관식은 후손들에게 바람직한 삶의 태도를 ‘초승달’로 은유한 글을 남겼습니다. 여린 초승달에서 겸손의 자세를 배우라는 말이에요.

그 뜻을 새기고 집을 보면, 이리 높여 지은 뜻은 풍경에 대한 욕망 때문만은 아닌 듯합니다. 실제로 집 뒤쪽의 가장 높은 곳의 ‘영모재’에 올라서 본들 이렇다 할 풍경은 없어요. 평범한 들의 풍경이 펼쳐질 뿐이에요. 그렇다면 각기 단을 세워 건물을 높이 지은 뜻은 건물의 높은 담과 짙은 숲 뒤에 꼭꼭 숨지 않고, 거리낄 게 없이 다 드러내려는 뜻이 아니었을까요. 

사우당종택은 이제 막 꽃망울을 환하게 터뜨린 아름드리 배롱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더 환하게 빛납니다. 집은 오래 묵었지만, 종부의 손길로 반질반질하다. 꽃과 나무 그리고 수석과 소박한 장식물들로 너른 집이 꽉 차 있어요. 

종택 안쪽에 후학들을 가르치던 강당 ‘사우당’이 있습니다. 마루 안쪽에 ‘사우당 10경(景)’의 글귀를 새긴 편액이 걸려 있고요. 바람이 지나가는 마루에 앉아 글귀를 읽습니다. 옥동에 저무는 구름, 후암의 붉은 단풍, 오봉의 피리소리, 영천의 푸른 대숲…. 글에 담긴 풍경이 모두 다 고요하고 정적이어서 그 풍경을 떠올리자 금세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게 만드는 집, 아소재

사우당종택에서 멀지 않은, 가야산 아래 막다른 길 안쪽에 ‘아소재(我蘇齋)’란 현판을 건 한옥이 있다. 이름을 풀어보면 ‘나를 살리는 집’쯤이 될 것 같아요. 아소재는 담박해요. 화려한 치장 없이 수수한 집이에요. 집의 내력도 이제 막 30년을 넘겼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아소재가 매력적인 건 집이 한없이 느슨하고 편안하다는 것이에요. 누구나 그 집에 들어서면 아무것도 하지 않게끔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어요. 담도 경계도 없는 집. 그 집은 처음 온 사람이라도 곧 익숙한 제집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아소재 주인 엄윤진(55) 씨가 이곳에 뿌리내리게 된 내력이 이렇습니다. 8년 전쯤 엄씨는 경남 김해에 출장차 내려왔다가 길을 잃는데요. 한참을 헤매다가 ‘해인사’ 안내판을 발견하곤 내친김에 절집에 들르자고 핸들을 틀었어요. 그러다 이내 다시 길을 잃고 발견한 게 바로 이 집이에요. 본래 어딘가에서 뜯어다 다시 세웠다는 한옥은 무성한 잡풀 속에 폐가처럼 묻혀 있었습니다. 집 앞에는 ‘전세•매매’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고요. 그리고 한 달 뒤에 그는 한옥을 샀고, 서울살이를 다 정리하고 이곳으로 내려왔습니다. 

집에는 주인의 성품이 묻어나게 마련. 수더분한 성품 그대로 집을 가꿨습니다. 마당에는 잔디를 심고, 처마 아래에는 비비추꽃을 심었어요. 그리고 커피를 내리고 민박 손님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더치 커피 한 잔에 7,000원. 숙박 요금은 10만 원. 시골 동네의 커피값이나 숙박비로는 비싸지만, 그건 커피값이라기보다 집을 누리는 입장료에 더 가까워요. 차 한잔을 주문하곤 마루에 누워 책을 보거나 혼곤히 낮잠을 자도 돼요. 그저 제 편한 대로 마음껏 시간을 즐기면 됩니다. 엄씨는 아소재를 가장 사치스럽게 즐기는 방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최고로 칩니다.



또 다른 성주의 명소들 

성주에는 사우당종택이나 아소재를 숙소로 잡고 호젓하게 다녀올 만한 곳들이 곳곳에 있어요. 성주읍의 성밖숲은 성주읍 서쪽의 하천변에 있는 마을 숲이에요. 늙은 왕버들 55그루가 500살이 넘는 노거수가 돼서 천변에 가지를 뒤틀고 있어요. 나무의 위용도 위용이지만 그 아래 심어둔 맥문동이 이제 막 보라색 꽃을 피우고 있어 지금 한 해 중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빚어내고 있습니다. 

성주에서는 또 가야산 칠불봉 아래 옥계천변의 만귀정의 경관도 빼놓을 수 없어요. 베보자기 같은 폭포가 쏟아지는 옥계천의 물가에 ‘늦을 만(晩)’에 ‘돌아올 귀(歸)’를 쓰는 정자 만귀정이 있습니다. 조선후기 공조판서를 지낸 이가 40여 년의 벼슬살이를 마치고 고향 땅에 돌아와 지은 정자에요. 정자 아래 물가에 ‘만산일폭루(萬山一瀑樓)’란 한 칸짜리 정자 안에서 폭포를 그윽하게 내다보는 맛이 훌륭한 곳입니다. 여기에다 대학자 한강 정구가 말년에 후학들을 길러내던 초당 자리에 들어선 회연서원을 보탭니다. 인적 드문 서원의 적막한 정원에서 불붙는 듯 타오르는 배롱나무꽃과 서원의 지붕 기와가 첩첩이 그려내는 선을 감상하는 것도 나무랄 데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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