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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장려상 - 창 밖 풍경이 기록하는 시작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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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5. 20. 16:30

문득 바라본 도서관 창밖 풍경은 봄이 가득하다. 편의점에서 카레 볶음밥을 사 먹은 누군가의 “진짜 인도산 카레 알갱이 같아.”라는 썰렁한 농담과 함께 노란 산수유가 순식간에 번지더니 백목련이 멍울멍울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전까지 저 허공은 척추측만증 환자처럼 삐딱하게, 벌거벗은 나무 몇 그루가 혹한에 떨고 있지 않았던가. 우리의 사정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도서관 내부는 무기력과 피로가 섞인 공기가 떠다녔고 출처를 알 수 없는 ‘희망 없음’의 공포가 출몰했다.

취업을 위한 몇 차례의 휴학과 복학이 통과의례가 돼 버린 지 오래. 바깥세상과 상관없이 이곳은 늘 추웠다. 불안감에 학생들은 경쟁적으로 기침해 댔고 환절기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은 보따리를 쌌다. 식재(植栽)된 것처럼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쁨과 즐거움을 잘라내고 도서관 의자에 몇 년을 버틴 장수 ‘취준생’의 고시합격 소리는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환청으로 들렸다. 자신이 쓰던 책 가지나 목 베개를 후배에게 넘기면서 “아마 난 고자가 됐을 거야.”라는 너스레에 도서관이 휘청거릴 정도로 한바탕 웃었지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때쯤 명치 끝이 아려오는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밤 12시. 열람실이 닫힐 무렵 그제야 마법이 풀렸는지 여기저기서 말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하루 18시간 이상 억류돼 있다 생환된 사람들치고 우리가 뱉는 말소리에 물기가 없다. 서걱거리는 입안을 생수로 헹구어 내고 가방을 챙기려는데 옆자리 김 군이 운다. 덩치가 산만 한 사람이 어깨를 들썩이며 운다. 사랑은 사치일 뿐이라며 애인에게 이별을 통고했거나 켜져 있는 모니터 안 합격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또 빠졌으리라! 그가 우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다들 그 울음의 이유 중 대부분을 우리가 한 번쯤 겪어 본 것이기 때문에 굳이 묻지 않고 어깨만 두드리거나 덩달아 눈시울을 붉히는 이도 있다. 

오랜만에 하늘을 본다. 미세먼지나 도심의 묵은 매연 때문인지 도무지 달이나 별이 보이지 않는다. 메고 있는 가방이 천근만근 느껴지고 디스크가 도졌는지 허리가 너무 아프다. 갑자기 전주에 계시는 엄마가 보고 싶어 전화를 걸까 했다가 걱정하실까 봐 이내 접는다.    

학교 앞 내가 사는 원룸 계단을 오른다. 계단이 이어지는 동안 4층짜리 건물은 소리의 블랙홀 속에 갇힌 듯 최대치의 고요를 우려내고 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음식점 스티커를 떼고 현관문을 연다. 현관 안 노란 실내등이 켜진다. 주인 없는 방에 웅크리고 있던 어둠이 후다닥 물러난다. 서너 평의 공간이 휑 한 가운데 ‘필승, 2017.’이라는 문구가 나를 맞는다. 오늘 하루 학습량이 빼곡히 적힌 포스트잇을 한참 바라보다 쥐고 있는 손목에 힘을 준다. 으스러지듯 포스트잇이 구겨진다. 힘들고 고독했던 하루가 내 손아귀에서 무기력하게 마감된다.

오전 10시, 학생들은 평소와 다르게 열람실에서 빠져나와 도서관 휴게실에 속속 모여든다. 누군가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처럼 어떤 이는 뺨이 상기돼 있고 또 어떤 이는 들떠 있다. 드디어 오전 11시. 유려하고 긴 문장을 읽어가는 재판장의 낭독은 휴게실 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는 매화의 긴 눈썹만큼이나 청아하다. 

‘탄핵 인용’ 문구와 함께 와 하는 함성이 TV 화면과 도서관 휴게실에서 동시에 터진다. 왁자한 이런 분위기가 몇 년 만인가! 갑자기 온몸에 물기가 돌고 생명력이 왕성해지는 느낌이다. 

‘몇 달 동안 지속된 정치적 소요에 우리는 애써 무관심하지 않았던가, 촛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광장으로 나가야 하는데…. 여기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렇게 옹졸한(빈약한) 사회적 자아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등의 자괴감이 짓눌렀고 누더기를 걸친 듯 우리는 하염없이 부끄러웠다.

합격 명당자리 잡아놨다며 빨리 오라는 친구 녀석의 성화를 무시하고 마음먹고 늦잠을 잔다. 스멀스멀 기어드는 봄기운이 집요하게 창문을 두드리는가 싶더니 이내 비가 내린다. 저 봄비에 노랗고 붉은 형형색색의 꽃이 물큰 익어가겠지. 갑자기 봄나들이하고 싶다. 몇 년 동안 나에게 계절은 단지 시간의 순환을 알리는 표식이거나 합격이니 성공이니 하는 것들과 동류항으로 묶일 수 없는 이항 대립적 관념어가 아니었던가. 

아무렇게나 질끈 동여맨 머리를 푼다. 안경을 벗고 아주 오랜만에 눈썹을 그리고 분홍 립스틱을 바른다. 연분홍 진달래가 입술을 물들이자 켜켜이 쌓인 내 몸 속 불안과 회의, 분노 따위의 감정 등을 몰아냈는지 거울 속의 내가 웃는다. 생활에 저당 잡힌 내 청춘이 하이힐을 신으면서 해맑게 웃는다.

‘필승, 2017.’ 궁서체로 쓰인 문구의 배웅을 받고 집을 나선다. 시작이다. 그러나 나는 좀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상반기 채용 인원에 내 이름이 빠질지도 모르고 수십만 명 청년실업자 명단에 포함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 어딘가는 어둡고 칙칙한 겨울이 물러서지 않으려고 몽니를 부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겨울이 오면, 봄도 머지않으리.”라는 쉘리의 말처럼 봄이 왔다. 4월, 5월이 되면 온 세상 봄꽃들이 앞다퉈 폭죽을 터트릴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길고 긴 겨울을 앓았고 그 완고하고 척박한 시간을 아프게 통과했으므로 이제 봄을 맞이할 일만 남은 것이다.

아, 분홍 립스틱을 바른 내 청춘이 봄꽃보다 예쁘다. 올봄엔 알콩달콩 연애도 할 수 있겠지?

*본 게시물은 2016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수상작으로 상업적 용도의 사용, 무단전제, 불법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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