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23. 14:00
“이렇게 요란한 옷을 입겠다고? 엄마가?”
놀라는 나의 반응에 엄마의 두 볼이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알록달록한 작은 꽃들이 잔뜩 수 놓인 원피스를 가슴 앞에 대보고 있던 엄마는 슬쩍 옷을 제자리에 걸어놓았다. 옷 가게를 나온 뒤 내 팔짱을 끼고 말없이 걸으면서도 엄마의 얼굴은 한참이나 부끄러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니, 저 원피스 예쁘긴 한데, 엄마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잖아?”
치마보다는 바지, 꽃무늬보다는 줄무늬, 화려한 것보다는 심플한 것을 좋아하던 엄마였다. 어릴 적 나에게 옷을 사주거나 입혀줄 때도 늘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그 시절 내 소원 중 하나가 팔랑거리는 스커트를 한 번 입어보는 것이었을까.
“너도 늙어봐라. 저런 게 눈에 들어온다.”
별 대꾸 없이 거리를 구경하던 엄마는 소심한 반격을 하듯 새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엄마의 취향이 조금씩 변한 것 같기도 했다. 혼자 떨어져 살며 학교에 다니다가 가끔 집에 내려오는 나는 뭐 슬쩍 가져갈 게 없을까 하는 심보로 엄마의 옷장이며 서랍장을 헤집어보는데, 요즘 들어 엄마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의외의 옷들이 발견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목욕탕 언니’나 ‘미용실 동생’이 선물해줬다며 괜히 혼자 민망해했다. 엄마의 이런 변화는 집안 곳곳에도 소소하게 숨어있었다. 화장에는 별 관심이 없고 서툴던 엄마의 작은 화장대에 색조화장품이나 화장 도구가 한두 개씩 늘어있다거나, 예전 같았으면 거추장스럽다고 싫어했을 귀엽고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부엌 한편에 자리 잡고 있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 취향이 변해도 너무 변했는데?”
장난스럽게 말하며 별생각 없이 여느 때처럼 서랍장을 한 칸씩 열어보던 나는 맨 아래 칸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텅 빈 갱년기 약 상자 한 통과 하나도 줄지 않은 생리대 한 팩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돌이켜보니 2년 전쯤인가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화끈거리고 갑자기 열이 훅훅 올라온다.’는 엄마에게 나는 갱년기 약 한 통을 사서 보냈다. 스스로가 꽤 효녀가 된 것 같다는 흐뭇한 기분으로 약 꼬박꼬박 잘 챙겨 드시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나는 정작 그 뒤로 엄마에게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변화들을 전혀 생각지도 눈치채지도 못하고 있었다.
“엄마, 혹시… 끝났어?”
아차 싶은 얼굴로 서랍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보며 엄마는 태연하게 말했다.
“벌써 일 년도 넘었지. 생리 끝난 지.”
엄마는 뒤돌아 다시 저녁 준비를 했다. 유일하게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 같은 맨 아래 칸 서랍을 닫고서, 나는 멀뚱멀뚱 엄마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능숙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채소를 씻고
생선을 굽는 그 모습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덜컥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도 엄습해왔다.
내 키가 엄마를 훌쩍 넘어버린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엄마가 정말로 작은 존재라고 느껴진 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엄마는 그동안 계속 신호를 보내왔었다. 하지만 공부하기 바쁘다는 이유로, 아르바이트에 지쳤다는 핑계로 나는 외면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통화할 때면 수화기 너머로 내 걱정만 쏟아내던 엄마가 잠을 잘 자지 못한다, 머리가 아프다며 힘없는 목소리로 털어놓아도 나는 ‘아프다고 말만 하지 말고 병원 좀 가시라’고 짜증을 내거나 ‘우리 엄마가 늙긴 늙었다 보다’라며 어물쩍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러는 사이 자꾸만 약해지는 몸과 그만큼 여려지는 마음을 혼자 부둥켜안고 엄마는 얼마나 쓸쓸한 싸움을 해왔을까. 지난 몇 년간 엄마에게 필요했던 것은 알약 몇 개가 아니라 감싸 안아줄 동그란 두 팔이었을 것이다. 차마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몇 알의 약과 함께 수많은 걱정과 고민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을 엄마 생각에 먹먹해졌다. 괜히 나는 저녁 준비를 하는 엄마 곁으로 쪼르르 달려가 주변을 맴돌며 귀찮게 굴었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엄마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러면서 나를 올려다보는 엄마의 두 볼은 부엌의 열기 때문인지 또다시 붉게 물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폐경’이라는 말 대신 ‘완료했다.’ 또는 ‘완성되었다.’는 의미를 부여해 ‘완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어쩌면 엄마 또한 수많은 임무를 열심히 해내며 살아온 인생의 한 부분을 이제 막 졸업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졸업은 끝이자 완성인 동시에 또 다른 출발이다.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하고,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새삼 행복해하고, 나와 팔짱을 끼고 복잡한 거리를 돌아다니며 해맑게 웃게 된 엄마는 자신의 인생에 찾아온 새로운 소녀를 만난 것이다. 발밑에 굴러가는 낙엽을 밟으며 즐거워하는 철없는 소녀라기보다는, 떨어지는 낙엽 밑으로 두 손을 받쳐 주며 ‘아이고, 그동안 열심히 매달려 있느라 얼마나 무거웠을까.’라고 안쓰러워할 줄 아는 속 깊은 소녀가 바로 우리 엄마다. 연약하지만 단단하고, 작지만 강한 두 번째 소녀.
“간호사한테 손 좀 잡아달라고 부탁했더니 인형 하나 주더라. 그거 끌어안고 있었다.”
충치라곤 없던 엄마가 약해진 치아로 고생하더니 결국 금이 간 어금니 하나를 뽑고 왔다며 전화 너머로 말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서면서도 무용담을 늘어놓듯 재잘거리는 엄마가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무섭다며 불평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머릿속으로 상상해본다. 인생의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는 두 번째 소녀. 붉게 상기된 볼과 손바닥에 고인 땀. 그동안 달려온 여정에 약간은 지쳐 보이고, 조금 낯설어진 자신의 모습에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하다. 다가가 볼을 맞대고 손을 잡아본다. 탯줄로 이어져 있던 시절처럼 엄마의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이 전해져 오는 것만 같다. 늘 응원을 받기만 하던 내가 이제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다독여본다. 졸업을 맞은 친구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듯.
“축하해. 다시 시작이야.”
*본 게시물은 2016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수상작으로 상업적 용도의 사용, 무단전제, 불법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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