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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교육을 위해 헌신한 기업가 대산 신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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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9. 12. 14:37

2017 대학생 동북아 대장정은 윤동주 시인과 대산 신용호 선생, 두 청년의 청년정신을 찾아 떠난 여정이었습니다. 민족과 교육을 위해 헌신한 신용호 선생의 정신은 온 대원들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데요. 대학생 동북아 대장정을 통해 느낀 그의 발자취를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신용호 선생의 어린시절

신용호 선생은 음력 1917년 8월 11일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에서 신예범 선생의 여섯 아들 중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신용호 선생의 어린 시절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어요. 아버지 신예범 선생은 학생들을 위해 야학을 열고 소작쟁의에 앞장섰고, 부친의 영향을 받은 맏아들 신용국 선생은 소작쟁의 농민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가족이 앞장서서 일본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였기 때문에 집으로 일본 형사들이 매일 같이 드나들어 집안이 편안할 날이 없었죠. 

어린 신용호 선생는 여덟 살 무렵 폐병을 앓아 지금의 초등학교인 ‘보통학교’에 입학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정성으로 병은 호전되기 시작했고, 그는 나름의 공부 법으로 큰 뜻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 그가 학교에 가지 않고 3년 동안 실천한 ‘천일 독서’는 훗날 그가 큰 뜻을 품고 세상에 발을 디딜 수 있도록 한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신갑범과의 만남과 중국으로 떠난 신용호 

천일 독서를 끝낸 후 신용호 선생은 집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떠나게 됩니다. 서울에서 그는 문학평론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신갑범 선생을 찾아 가요. 신갑범 선생은 아버지 신예범 선생과 종종 서신을 주고받는 먼 친척이었고 도쿄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학교도 나오지 않고 자본도 없는 청년이 찾아와 기업가가 되겠다고 도움을 요청하자 신갑범 선생은 반신반의했지만, 신용호 선생이 일본어로 쓰인 문학 평론집을 쉽게 읽어 내려가는 것과 경성(서울)을 돌아본 소감을 듣고 그를 믿게 돼요. 또한 신용호 선생은 서울에서 신갑범 선생의 도움으로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이육사 시인을 만나게 되며 애국에 의한 의지를 다지는 계기를 가지게 됩니다.


신갑범 선생은 중국으로 가겠다는 신용호를 돕기 위해 중국 다롄에 있는 그의 일본인 친구가 운영하는 후지다 상사에 소개장을 써줍니다. 그렇게 신용호 선생은 1936년 중국 다롄에 있는 후지다 상사에서 일을 하게 돼요. 후지다 상사는 일본 제품을 중국에 팔고 중국 농산물을 수입해가는 종합상사로 그의 사업적 능력을 배양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신용호 선생은 연수를 받는 동안 판매 능력에 따라 직원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비례급 판매사원 제도’를 창안했고 회사에 엄청난 고수익을 안겨줍니다. 사장은 신용호 선생에게 도매점 운영을 맡겼고, 이에 따라 일본인 직원들의 시기가 빗발쳤으나 그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을 밀고 나갔습니다.


(청년시절의 신용호, 사진출처 | 신용호 평전 『맨 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신용호 선생은 후지다 상사를 그만두고 만주로 향했습니다. 하얼빈, 무단장, 지무스 그리고 칭다오, 난징, 쑤저우 등 중국 각지를 돌며 시야를 넓혔어요. 그러다 마지막으로 신용호는 북경에 정착을 하게 됩니다. 

신용호 선생은 북경에서 후지다 상사에서 배웠던 경영법을 바탕으로 북일공사(北一公社)’라는 곡물회사를 설립하여 회사를 성장 시키는 데 성공해요. 신용호 선생이 북경에 있을 당시 일본은 제2차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여 항복을 선언했고, 신용호는 때를 놓치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당시 한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동포의 수는 3만 명이 넘었고 그 비용이 1인당 4만 원의 금액이 들었지만, 신용호는 자처하여 제2귀국부 단장을 맡으며 북경에서 번 모든 돈을 국민들이 무사 귀환하는 데에 쓰게 됩니다.



해방 후 기업을 세우기 위한 신용호의 노력

해방 직후 가난했던 우리나라였지만 신용호 선생은 굴하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첫 사업으로 출판 사업을 행하기로 결심합니다. 1946년 '민주문화사'란 이름을 내걸고 신용호 선생은 <여운형 선생 투쟁사>란 책을 출간해 민족 교육과 우리 기업을 동시에 양성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책은 18쇄까지 인쇄가 되었지만 서점들이 외상으로 구매해 간 책값을 받지 못해 출판사는 오래 버틸 수가 없었어요.

그는 두 번째 사업으로 방직 사업을 고안했고, 군산에 방직공작을 차립니다. 1948년 더 큰 투자로 인해 '한양 직물'이란 방직회사를 차릴 수 있었어요.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했고, 신용호 선생의 삶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6.25 전쟁 직후 한국의 상황은 참담했습니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50달러가 채 되지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신용호 선생은 '교육을 위한 보험'이란 타이틀을 내걸고 보험 사업에 뛰어들어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용호 선생이 사업을 시도했던 이유는 그의 삶의 철학인 '맨 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옛 이육사와의 만남에서 얻은 '민족 자본의 육성'의 뜻은 애국을 위한 길이자 그의 신념이기도 하였습니다. 



교보생명의 설립

신용호 선생 뜻에 감명받은 정부는 그에게 회사 설립을 지원해주고 '태양생명보험주식회사' 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본래 그의 취지는 교육보험을 만들고자 했고, 회사는 1958년 '대학교육보험'이란 회사로 변모를 꾀할 수 있었습니다. 

대한교육보험주식회사의 최초 상품은 '진학보험' 이었고, 아동을 위한 전문 보험인 '아동 보험', 보험을 기간을 나누어 일정기간 동안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 '육영 보험', 그리고 군인을 위한 '화랑 보험'이 순차적으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사진출처 | 신용호 평전 『맨 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고)

대한교육보험은 계속된 성장 속에 국내에서 손꼽히는 보험사가 되었고, 1970년에는 광화문 사옥을 지을 부지도 구매했어요. 사옥을 짓는 데 쓰일 땅을 정부가 외국인 관광객 투숙을 위한 호텔을 건설하자고 권고했지만, 신용호는 거절하고 계획대로 사옥을 짓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 시저 펠리에게 사옥 디자인을 요청했고, 1980년 9월 지상 22층의 교보빌딩이 종로1가 광화문 한복판에 탄생했어요. 그리고 1995년 4월 3일 재무부 장관의 인가를 얻어 '교보생명보험주식화' 로 새로운 명칭을 쓰게 되었습니다.  


(사진출처 | 신용호 평전 『맨 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고』)



신용호의 후학양성 사업

교보빌딩이 완공될 때 즈음 지하 공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것으로 의견이 분분했었는데, 신용호 선생은 지하를 서점으로 만들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광화문 지하는 상업적 가치가 큰 공간이었고, 인근의 작은 서점들이 타격을 입을까 봐 반대 의견이 많았지만 신용호 선생은 청년들의 지식 함양을 위해 서점을 열기를 고집했고, 그렇게 1981년 6월 교보문고가 탄생하게 됩니다. 


교보문고는 세계 주요 대학의 정보를 취합하여 학자들에게 제공하는 역할도 했고,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는 관광명소로, 국민들에게는 만남의 장소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교보생명 연수원 계성원 전경) 

신용호 선생은 1987년 천안 태조산에 만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우친다는 뜻의 이름인 '계성원'을 지어 인재 육성에 힘쓰기도 합니다. 계성원은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고, 잘 놀고, 잘 배우고' 신용호 선생의 철학을 담아 플라스틱 용기 대신 방짜유기그릇에 식사를 제공해요.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이봉주 선생님께서 만드신 방짜 유기)

신용호 선생은 1983년 6월 세계보험협회에서 보험계의 노벨상이라 일컫는 세계보험대상을 수상합니다. 세계 최초의 교육보험 창안, 24년이란 짧은 기간에 이런 사업의 성장, 교보문고를 만들고 청소년 교육과 국민교육진흥에 봉사한 그의 업적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이죠. 이것은 한국인 최초였으며 교보생명이 세계로 뻗어 나가게 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THE JOHN S BICKIEY FOUNDERS AWARD 수상, 사진출처 | 신용호 평전 『맨 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고』)

그 외에도 신용호 선생은 세계 10대 건축가로 유명한 마리오 보타와 결탁하여 강남 교보 타워를 건설하고, 전국적으로 교보문고 지점을 열어 국민 교육에 힘을 씁니다. 


(설계도면을 보고 있는 마리오 보타와 신용호, 사진출처 | 신용호 평전 『맨 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고』)


교보생명의 창립이념은 '민족자본형성'과 '국민교육진흥' 이에요. 기업의 이익보다 나라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신용호 선생의 뜻은 자연스럽게 공익사업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농촌을 살리기 위해 먼저 '대산농촌재단'을 설립하고 1992년 '대산문화재단'을 설립하여 한국의 문화예술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또 1997년 ‘교보교육재단’을 설립해 국민교육진흥을 실현하는 초석을 마련했습니다.


(사진출처 '신용호 평전 맨 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고')

그리고 대산 신용호 선생은 2003년 9월 19일, 향년 86세로 영면에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교보생명과 교보문고의 창립자인 민족 자본가 대산 신용호 선생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나라를 위해, 민족을 위해 힘쓰신 업적이 여느 위인 못지않죠? 우리가 지금도 누리고 있는 교보문고나 교육보험 등이 기업이 이익을 위해 시작한 비즈니스가 아니라 신용호 선생이 가진 국가와 민족을 위한 마음에서 출발했다는 게 진정성 있게 다가옵니다. 신용호 선생의 품은 그 진실된 마음이 우리 곁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가꿈사 프론티어 11기 박유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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