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14. 10:00
‘브랜드에 얽힌 사람과 돈, 기업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 MBC 조현용 기자의 웹시사/교양 유튜브 채널 ‘소비더머니’에 교보생명 이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소비더머니’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브랜드를 주제로 선정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성장해왔는지를 다루는 채널인데요. 조현용 기자의 쉽고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으로 누적 1억 회 이상의 누적 조회수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조 기자는 광복절이 있는 8월을 맞아,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며 교보생명 이야기를 주제로 선택했다고 해요.
조현용 기자가 전하는 교보생명과 대산 신용호 창립자 이야기, 지금 만나봅니다.
※본 콘텐츠에 사용된 이미지 자료는 ‘소비더머니’ 유튜브 영상을 출처로 합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 인생을 바친 기업가, 교보 창업자 대산 신용호 이야기 / 소비더머니>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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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더머니’에 소개된 교보생명 이야기
✅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 일생을 바친 기업가,
대산 신용호 선생
✅ 그 뜻을 이어받은 신창재 의장,
정도경영으로 일군 교보생명 65주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청년 사업가 신용호
일제강점기에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신용호 창립자. 그는 초등학교 진학을 앞둔 7살에 심각한 폐병에 걸려 무려 3년 동안이나 앓느라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풍족하지 않는 가정 환경으로 결국 학교에 가지 못한 소년 신용호는 낮에는 어머니 일을 돕고 밤에는 동생의 교과서를 읽으며 성장했다고 하는데요. 얼마나 노력했는지 독학으로 일본어에 한자까지 익히며 초등학교 과정을 넘어 중학교 교과서까지 독파했다고 해요.
그러다 성년을 천일쯤 앞둔 16살에 사회 진출에 대비해서 ‘천일독서’의 목표를 세우고, 기어이 목표를 달성합니다. 천일 동안 카운트다운을 하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 나갔다고 하는데요. 조 기자는 “’그야말로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강철왕 카네기처럼 큰 사업가가 되려면 큰 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대산 신용호는 중국의 중심지까지 가서 사업을 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세상으로 나섰다고 합니다.
만주에서 무역회사 일을 하며 돈을 벌어들인 대산 신용호는 24살에 베이징으로 가 ‘북일공사’라는 곡물 유통업 회사를 세워 자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륙의 곡물 유통업이라고 하면 자본가들의 매점매석 위주여서 돈이 있는 사람이 돈을 버는 구조였는데, 신용호 창립자는 트럭을 전세 내서 시골의 산지를 바쁘게 오가면서 스스로 유통망을 개척했습니다.
조 기자는 “직원일 때나 자기 사업을 할 때나,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며, 적은 자본으로 시작했지만 쉬지 않고 자본을 굴리며 틈새를 노렸다고 평했어요. 대륙에 있는 한국인이라면 북일공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사세를 크게 키웠다고 해요.
스물네 살 어린 나이에 멀리 타향에서 큰돈을 벌었다면 제 한 몸 편안하게 누릴 법도 한데, 청년 사장 신용호는 좀 달랐다고 합니다. 이육사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과 꾸준히 교분을 유지하면서 자기 몫으로 번 돈을 떼어 독립운동을 수시로 지원했다고 해요. 당시로서는 드물게도 인센티브제를 도입해 남은 이익을 직원들과 나눴다고 합니다.
독립과 함께 찾아온 시련, 그 끝에 탄생한 세계 최초의 교육보험
그러던 중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나라가 드디어 독립을 하게 됩니다. 대산 신용호는 창고에 남아있던 곡식들을 광복군과 한국으로 돌아가는 동포들에게 나눠주고 미군을 도와 귀국하는 동포들을 지원하다가, 고향을 떠난 지 10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고 해요.
국내로 들어온 대산 신용호 선생은 10년간의 사업 경험을 살려 국내에서 ‘출판업’을 시작합니다. 학교도 가지 못한 그를 책이 성장시켰듯, 좋은 책을 만들어서 국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고 사회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마음이었다고 합니다.
‘민주문화사’에서 처음 발간한 책, 『여운형 선생의 민족 투쟁사』는 불티나게 잘 팔렸지만, 막상 회사 입장에서는 팔릴수록 손해만 커졌다고 해요. 당대 지식인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책을 외상으로 사 가고 이를 갚지 않아 판매 대금 회수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용호 창립자는 고민 끝에 출판업이 아직 시기 상조라는 판단을 내립니다.
조 기자는 “당시 한국 시장이 신용호의 좋은 뜻을 따라주지 못했던 것”이라 안타까워하면서도, 아마 당시의 경험이 훗날 사업을 일으키는 데 영향을 끼쳤을 거라면서 “사업가로서 밭을 탓하지 말고 토양 자체를 키워보자”는 대산 신용호의 기업가 정신을 돌아봤습니다.
이후로도 여러 번의 사업 실패를 거듭한 끝에 신용호 창립자는 결국 해답을 ‘교육’에서 찾습니다. ‘배우지 못해서 한이 많은,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며, 보험상품을 통해 학자금 마련을 돕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독립 직후 국민 소득이 연간 100달러도 안 됐고, 일제 강점기에 강제로 든 보험이 휴지 조각이 되는 경험을 한 탓에 당시 보험에 대한 인식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 사업가 신용호는 ‘한국에서 다른 보험은 몰라도 학자금 마련을 위한 보험은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 기자는 “농경 민족 중에서 농사에 가장 큰 재산이라는 소까지 팔아서 자녀 교육비를 대는 나라는 전 세계에 한국과 베트남 정도 뿐”이라면서 대산 신용호 선생의 확신에 힘을 실었습니다.
시중에 비슷한 상품도 없던 시절, 신용호는 ‘계’나 ‘보’와 같은 전통적인 목돈 마련 방식, 또 선진국의 보험산업 등을 철저하게 연구하며 교육보험을 위한 회사 설립 작업을 시작합니다. 보험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 탓에 투자자 유치는 물론이고 설립 인가조차 나지 않았지만, 포기를 몰랐던 청년 신용호는 재무부 장관 자택 앞에서 무려 반년 동안 기다린 끝에 결국 장관을 만나 설득에 성공했다고 해요.
마침내 1958년,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형성'을 목표로 '대한교육보험주식회사'가 출범했는데요. 이때 출시한 '진학보험'이 세계 최초의 교육보험 상품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1995년, '교육보험'을 줄여서 '교보생명보험'으로 사명을 바꿔 지금에 이르렀죠.
조 기자는 “참고로 사장이 직접 발로 뛰어서 따온 계약이 제일 많았다”면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보면 무작정 말을 걸어 ‘그거 끊고 보험을 들면 나중에 자식 한 명은 대학을 보낼 수 있습니다’라고 설득했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고객들에게 보험금은 제때제때 지급했다”고 전합니다.
교육보험의 선풍적인 인기에 힘입어 대한교육보험은 1967년 3월, 보유계약 400억을 돌파하며 창립 9년 만에 업계 정상에 오릅니다.
30년간 300만 명의 학생들의 학자금 마련을 도운 교육보험. 만약 신용호 창립자가 고국에 돌아와 첫 출판 사업을 접는 과정에서 ‘밭이 안 좋다’고 탓하고 좌절하며 더 도전하지 않았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겠죠.
돈, 그 이상의 가치를 쫓는 부자(父子)
신용호 창립자는 1958년 대한교육보험 설립 당시 개업사를 통해 이런 약속을 합니다.
‘오늘 개업식이 초라하다고 서글퍼 하지 맙시다.
선진국에서도 보험회사가 자리를 잡기까지 50년이 걸립니다.
그러나 저는, 그 절반인 25년 이내에 우리 회사를 세계적인 회사로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25년 이내에 서울 제일 좋은 자리에 제일 좋은 사옥을 짓겠습니다.’
- 대산 신용호, 1958년 개업식에서
약속을 3년이나 앞당긴 1980년, 대산 신용호 창립자는 약속은 마침내 현실로 만들어 냅니다. 서울 한복판 종로1가 1번지에 대한교육보험의 사옥이 지어진 것입니다.
당시 최첨단이었던 이 사옥, 서울 중심가의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입지에 만들어진 건물 지하 공간에 사람들의 관심이 끝없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지하상가에 입점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로비도 많았고 직원들도 사내에서 여러 지하공간 활용 방법을 제안했지만, 대산 신용호 선생은 단호하게 ‘서점’을 짓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이 값진 땅에 책방을 크게 열어서 청소년과 시민이 자유롭게 이용토록 한다면,
그렇게 축적되는 효과가 얼마나 될지 상상해 보세요.
우리의 창업 이념을 구현하는 데 이것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습니다’
- 대산 신용호 창립자
조 기자는 신용호 창립자가 남긴 말에 감탄하며 “그렇게 탄생한 교보문고가 우리 사회에 준 영향을 과연 돈으로 헤아릴 수 있을까 싶다”며 교보문고 설립이 가진 의미를 다시 한번 조명했습니다.
여전히 이어지는 창립이념, 돈을 넘어선 가치를 쫓는 부자(父子)
대산 신용호 선생은 돈을 넘어선 가치를 끊임없이 추구해 왔습니다. 대산농촌문화재단을 설립해 농업발전을 지원하고 대산문화재단을 설립해 한국 문학을 세계에 소개하고 있죠. 교보교육재단과 함께 교보생명컵 꿈나무체육대회를 매년 개최하며 유소년 체육 선수들의 성장을 돕기도 합니다.
조현용 기자는 이어 창립자의 아들인 신창재 의장이 올해 세계보험대상 월계관상을 수상하며 세계 최초로 부자가 세계 보험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진기록을 남겼다고 소식을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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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기자는 신창재 의장에 대해 교육과 민족을 생각했던 아버지처럼 고객, 임직원, 투자자, 지역사회를 비롯한 모든 이해관계자와 함께 성장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고 평했습니다.
“국내 금융사 중 대주주가 직접 CEO를 맡는 경우는 드문데, 교보생명은 2001년부터 지금까지 쭉 CEO가 신창재 회장”이라며, 많은 금융사들이 수성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와중에 대산 신용호 창립자의 뜻을 신창재 의장이 이어받아, 꿋꿋하게 창립이념을 지켜내며 65주년을 맞았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말년에 몸이 불편했던 신용호 창립자. 그는 말없이 교보문고 앞에 지팡이를 짚고 서서 서점을 찾는 청소년들을 지켜보면서 한참 동안 흐뭇해했다고 하는데요. 서점을 찾는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아파서 학교에도 가지 못했지만 천일독서를 통해 성장했던, 끝없이 넓은 세상을 갈구했던 자신의 젊은 날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싶다며 조 기자는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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