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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보험의 탄생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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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25. 16:37

교육보험ㅣ


안녕하세요, 교보생명 블로그 <가족•꿈•사랑>을 담당하고 있는 홍보팀 강문영입니다. 처음으로 인사드리는 것 같네요. ^^

여러분들은 ‘교보생명’과 어떤 인연을 갖고 계신가요? 저는 꼬꼬마 때부터 교보생명과 인연을 맺어왔어요. 저희 어머니가 제일 먼저 들어주신 보험이 바로 교보생명의 교육보험이었거든요. 그 인연이 지금의 교보인 강문영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네요 ^^ 30대 초반인 제 또래들은 교육보험의 혜택을 받으면서 학교를 다녔을 것 같은데요. 여기서 잠깐! 혹시 여러분은 교육보험을 가장 먼저 개발한 회사가 어디인지 아시나요?  

정답은 바로! ‘교보생명’이랍니다. 

그래서 오늘은 세계 최초로 개발된 교보생명의 교육 보험 탄생 배경을 이야기 해드릴게요.  





 세계 최초로 교육보험을 개발한 교보생명


1958년 교보생명이 회사 문을 열고 판매한 최초의 상품이 바로 교육보험인 ‘진학보험’이라는 상품인데요. 

 

<청년시절의 大山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


이 상품에는 대산 신용호 창립자(1917 ~ 2003)의 ‘국민교육 진흥’과 ‘민족자본 형성’이라는 교보생명 창립이념이 담겨 있답니다. 다른 회사와 달리, 회사의 창립이념에  ‘교육’ 과 ‘민족’의 안녕이 포함되어 있으니 교보인들에게는 자부심이랍니다.

그렇다면 왜 ‘교육’과 ‘민족’을 중시하게 됐을까요? 이 이야기는 창립자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대산 신용호 창립자는 어린 시절 몸이 약해 병치레가 잦아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고 해요. 학교 문턱을 밟지 못한 아쉬움을 천일독서(千日讀書)로 달래며 끝까지 배움을 포기하지 않았고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사회와 현실을 제대로 알게 돼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게 된 것은 물론 가족들의 영향도 컸답니다. 전남 영암의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난 대산 신용호 창립자는 일제에 번갈아 투옥되고 쫓기는 아버지와 큰 형을 보면서 힘없는 민족의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거든요. 

청년 시절 건강을 회복한 신용호 창립자는 큰 꿈을 품고 조국을 떠나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애국지사와 교류하면서 독립과 부강한 나라를 위해서는 교육과 자본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렇게 “교육이 민족의 미래”라는 신념을 굳히게 되었답니다 


 담뱃값만 아껴도 자녀 대학 보낸다!


 <교보생명 최초의 상품 ‘진학보험’>                <교보생명 창립 사료실에 전시 된 당시의 담배 아리랑>


교보생명이 창립될 1950년대 당시에는 한국전쟁의 상흔으로 국가 경제는 피폐했고 보험시장은 불모지나 다름없었어요. 하지만 대산 신용호 창립자는 국민들의 근면성과 뜨거운 교육열에 주목했답니다. 매일 담배 한 갑 살 돈만 절약하면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을 안겨준 것이 당시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자녀를 교육시키려는 학부모의 열망과 맞아 떨어진 것이죠! 그래서 1960~80년대 교육보험은 당시 학부모들의 필수품으로 여겨지기도 했어요. 1973년 초등학교 5학년 사회 교과서에는 생명보험, 양로보험과 더불어 ‘상급학교에 가게 될 때를 대비하는 교육보험’이라고 소개될 만큼 당시 교육보험은 국민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것이 바로 그 증거가 되겠네요. 이처럼 교육보험의 등장은 새로운 보험분야를 개척한 것은 물론, 한국 생명보험산업을 발전시키는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22층으로 올라간 건물을 17층으로 자르라고?


교보생명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사명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교보생명은 ‘대한교육보험’이라는 명칭으로 설립이 되었는데요. 과거에 생명보험사는 무조건 회사 이름에 ‘생명보험’이 들어가야 했대요. 그래서 창립부터 난관에 봉착했죠. 하지만 대산 신용호 창립자는 ‘교육이 민족의 미래’라는 신념으로 ‘대한교육보험’ 설립을 위해 당시 경제정책의 실세였던 김현철 재무부장관을 만나기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 집 앞에서 기다렸다고 해요. 그렇게 끈질긴 노력으로 드디어 반년 만에 독대할 수 있었고, 장관도 그의 소신이 옳다는 걸 인정하고 예외적으로 대한교육보험 상호 사용을 승인했다고 하네요. 지금의 교보생명 사명은 1995년에 바뀌었는데요, 교보생명의 ‘교’는 교육을 의미하는 ‘敎’이고, ‘보’는 보험을 의미하는 ‘保’로 이루어져 사명을 변경하면서도 교육과 민족에 대한 염원을 고스란히 담았다고 해요. 

참, 신용호 창립자의 ‘맨 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는 도전정신’이 담긴 에피소드도 하나 알려드릴게요. 광화문 랜드마크인 교보생명 빌딩에 대한 이야기에요.

대산 신용호 창립자는 1958년 개업식에서 임직원들에게 “선진국에서도 생명보험사가 자리를 잡으려면 50년이 걸립니다. 그러나 저는 25년 이내에 우리 회사를 세계적인 회사로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25년 이내에 서울의 제일 좋은 자리에 제일 좋은 사옥을 짓겠습니다”라고 공표했어요.

 

<개업식에서 약속하는 대산 신용호 창립자>                          < 초창기 회현동 사옥>

그리고 실제로 약속한 기간보다 3년 앞당긴 1980년, 대한민국 정치•경제의 심장부인 종로 1가 1번지 광화문 최고의 자리에 사옥을 건립했어요. 

하지만 광화문 사옥의 건립에도 위기가 있었어요. 청와대에 가까운 지리적 특성 때문인지 당시 22층으로 설계된 본사건물이 골조공사를 마무리할 즈음, 청와대로부터 22층으로 올라간 현재의 건축물을 17층으로 낮추라는 한 통의 전화를 받은 거죠! 하지만 이를 부당하게 여긴 신용호 창립자는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고, “차라리 내 몸을 자르라면 자르지 이미 올라간 건물을 자를 수는 없다”고 완강히 버텼어요. 맨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는 그의 도전정신은 1년의 투쟁 끝에 원래 설계대로 건물을 지켜냈고 한국 생명보험업계의 산 역사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신용호 창립자의 불굴의 의지와 발명가적 개척정신은 오늘날 교보생명의 핵심가치인 도전과 창의로 계승되고 있어요.


오늘 알려드린 교보생명의 교육보험 탄생비화를 통해 교보생명의 설립에 대한 내용들도 알 수 있었을 텐데요. 다음 시간에는 교보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몇 가지 명언들을 소개하고 가꿈사 가족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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