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2. 12. 17:01
무언가 꼭 할 말이 생기면, 그러니까 그것이 자기 자신이든 아니면 다른 이에게든 진심으로 토로해야만 할 때라면 된바람에 절로 몸 움츠리게 만드는 겨울 바다인들 대수일까요? 그래도 왜 하필 강릉이냐고 묻는다면 답을 할 수밖에요. 현인들의 맑고 향기로운 삶과 글 그리고 맛있는 커피가 있다고 말이죠.
가족여행갈만한곳 새로운 꿈을 꾸게 하는 정동진
누군가는 슬픔을 게워내기 위해, 누군가는 희망을 길어 올리기 위해 또 누군가는 사랑을 맹세하기 위해 찾는 정동진. 아득한 대양으로부터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와 단 하루의 쉼도 없이 떠올랐던 태양은 어제의 그것 그대로였으나, 이곳에 선 그 누군가의 가슴에는 저마다 특별한 의미로 배양된답니다.
세상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기차역을 끼고 있다는 점과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에서 정확히 동쪽에 자리한다는 상징성으로 말미암아 해오름 명소가 된 정동진은 계절과 상관없이 새벽마다 북적이는 가족여행갈만한곳이에요. 어슴푸레 하늘이 열리기 시작하면 밤새 기차를 타고 온 이들이며, 근처에 숙소를 잡았던 이들이 하나 둘씩 해변으로 몰려들기 마련이죠. 동이 트기 전, 태양은 붉고 긴 띠를 수평선에 나란히 얹어 놓으며 곧 하늘로 오를 것임을 예고해요. 여기저기서 들리던 재잘거림이 조금씩 사그라지다가 잠시 고요를 이루는 순간, 태양이 얼굴을 빠끔 내밀어요. 다짐과 감사, 회한과 소원이 섞인 탄성이 참았던 숨과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죠.
그 부담스럽게 전가된 짐을 머리에 인 태양은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정동진의 상징인 범선 위로 솟구쳐요. 돛을 떼어버린 범선은 더 이상 항해를 나설 수 없지만, 매서운 추위와 함께 방문한 물안개로 인해 마치 바람을 타고 유유히 나아가는 듯 환상을 불러일으킨답니다. 혹한에도 바다에서는 생을 위한 활동이 이어져요. 멀리 나갔던 대게 잡이 배와 오징어 잡이 배들이 간밤의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노라면, 갈매기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배를 채우려 떼를 쓰죠. 어부들이나 갈매기들이나 치열한 삶의 한 장에 있지만, 멀리서 관조하는 우리로서야 염치없게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광경이에요.
가족여행갈만한곳 강릉! 가장 맛있는 한 잔의 커피를 찾아서
정동진의 아침만으로 여행을 마쳐도 매우 좋을 거예요. 그러나 그러하기에는 ‘대한민국 커피 수도’라 불리는 강릉까지 와서 그냥 발걸음을 돌린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리죠? 강릉은 인구 21만 명의 소도시지만, 200개가 훌쩍 넘는 커피전문점이 분포해있답니다. 게다가 이름만 대면 알만한 프랜차이즈보다 자기만의 이름을 내건 카페가 더 많으며, 직접 로스팅과 핸드드립을 하는 곳도 30여 개에 달해요.
강릉의 커피 신화는 30년 전쯤, 안목해변 싸구려 자판기 커피에서부터 시작되었어요. 해변을 따라 늘어선 음식점마다 커피자판기를 설치했는데, 그 수가 무려 80개 이상 되었죠. 우연히 여행 차 들렀던 이들에 의해 안목해변은 분위기 넘치는 ‘길다방’으로 입소문을 탔고 2000년대 초반 제대로 된 커피전문점이 그 분위기를 이으면서 강릉은 자타공인 ‘커피 수도’로 거듭났답니다. 그들 중 특히 ‘테라로사’, ‘커피커퍼’, ‘보헤미안’은 각각의 이유에서 강릉뿐 아니라 우리나라 커피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카페들이에요.
세계 최고 수준의 커피감별사를 양성해내며 좋은 원두를 그 어느 카페보다 다양하게 수입해 소개하는 ‘테라로사’는 커피 문화의 대중화를 선도했으며, ‘커피커퍼’는 국내 최초로 직접 재배한 커피나무에서 원두를 수확해 판매한 것으로 유명해요. 이곳에 가면 원두재배농장을 둘러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로스팅, 핸드드립 추출, 초콜릿 만들기 등 알찬 체험을 해볼 수 있답니다.
‘보헤미안’은 우리나라 커피 1세대 ‘1서 3박’ 중 한 명인 박이추(64) 씨가 운영하는 카페에요. 서정달, 박상홍, 박원준, 박이추를 일컬어 ‘1서 3박’이라 하는데, 그 중 둘은 세상을 떴으며, 한 명은 미국에 있답니다. 아직까지 커피와 연을 맺고 있는 이는 박이추 씨가 유일해요. 일을 시작한 후 자신이 추출하지 않은 거피는 단 한 잔도 손님에게 판매하지 않은 박이추 씨야말로 ‘커피의 마이스터’라 부를 만해요.
강릉에는 정말 수많은 카페가 있지만 그중 콕 집어 어디를 추천해야 할지는 도무지 모르겠네요. 앞서 거론한 곳들 외에 분위기로 따지자면 안목의 ‘산토리니’도 괜찮을 것이고, 연곡의 ‘커피브라질’도 정성 들여 만든 커피를 내놓고 있어요.
하지만 커피는 전적으로 취향과 직결되는 음료랍니다. 내놓는 사람의 취향과 마시는 사람의 취향이 맞아 떨어질 때 비로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가 탄생해요. 여러분은 여러분만의 취향에 맞는 ‘그 한 잔의 커피’를 강릉에서 꼭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마음이 훈훈해지는 옛 사람의 삶과 글
<우리나라 주거 건축 중 가장 오래된 ‘오죽헌’ 내부 전경>
맛있는 커피가 따뜻하게 몸을 데워주는 것이라면, 오죽헌과 허난설헌 생가는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곳이랍니다. 이들 장소 또한 두고 간다면 섭섭할 거예요. 시간이 허락한다면 강릉 바우길 중 11구간을 걸어보시기 바라요. 총연장 340km의 바우길은 강릉이 고향인 소설가 이순원과 산악인 이기호가 낸 산책로랍니다.
바우길 11구간은 신사임당길이라고 이름 붙은 코스로서 16.3km 거리로 이루어져 있답니다. 도배(설 다음날 여러 사람이 모여 마을의 웃어른에게 절을 하는 풍속)의 미풍이 남아 있는 성산면 위촌리 송양초등학교에서 시작해 오죽헌과 선교장을 지나 경포대와 허난설헌 생가로 이어진답니다. 제법 거리가 길지만, 풍경이 단조롭지 않고, 솔숲이 많아서 걷기에 좋은 곳이에요.
오죽헌은 신사임당과 율곡이 태어난 고택으로서 검은 대나무(烏竹)가 있는 집이라 하여 그리 불린답니다. 신사임당의 외증조부인 최치운이 지은 이 집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소박한 건물이에요. 신사임당은 이곳에서 율곡을 비롯해 4남 3녀를 낳아 길렀어요. 그 자신이 시서화에 능한 천재였지만, 율곡을 기른 훌륭한 어머니로 칭송 받고 있죠. 만약 지금처럼 여성의 사회 참여가 진취적으로 이루어지는 시기였다면, 특히 안견에 비견되기까지 했던 신사임당의 그림을 더 많이 만나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어쨌든 생전 신사임당은 지아비와 자식들에게 지극정성 다했는데, 48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했답니다.
그가 죽자 효심이 깊었던 율곡은 어머니를 잊지 못해 금강산으로 들어가 한동안 두문불출했다고 해요. 그가 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격몽요결」의 ‘사친장’ 편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답니다.「율곡전서」 27권에 들어있는 「격몽요결」은 평소 지녀야 할 삶의 자세를 담은 책으로 수고스럽더라도 한 번 찾아서 읽어볼 만해요.
신사임당처럼 재능이 있었으나 그것을 널리 펼치지 못 한 또 한 명의 여류문인이 있었으니 그가 허난설헌이랍니다. 오죽헌에서 약 4.5km 떨어진 곳에 그의 생가가 있다. 「홍길동전」 저자인 교산 허균의 누이로서 당호(堂號)처럼 은근한 난초 향과 깨끗한 성품을 지녔으나 시댁의 핍박을 당하며 기구한 생을 살다가 요절한 이가 바로 허난설헌이에요. 생가를 찾아 그의 삶을 돌아보고, 유작들을 찬찬히 읽노라면 가슴이 참으로 먹먹해져요. 그 중 떠나온 고향 강릉을 그리며 쓴 ‘죽지사’라는 시는 어찌나 애틋한지요.
나의 집은 강릉 땅 돌 쌓인 갯가로
문 앞의 강물에 비단옷을 빨았어요
아침이면 한가롭게 돛단배 매어놓고
짝지어 나는 원앙새만 부럽게 보았어요.
여행은 때로 마치기도 전에 끝나버릴 때가 있는 반면, 마친 후에도 오랫동안 끝나지 않은 채 계속되기도 해요. 느낌이 없는 여행은 피로하기만 해서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렇지 않은 여행은 일상으로 복귀해서도 문득문득 생각이 나죠. 일을 하다가, 잠자리에 들려고 누웠을 때, 책을 읽다가. 저도 모르게 행복한 미소를 짓게 돼요. 강릉에서의 하루가 여러분에게는 그런 여행이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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