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13. 16:57
세계 3,000여 언어 가운데 ‘사전’을 가진 언어는 20여 개뿐이라고 해요. 이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직후에 이르기까지 민족사의 격동기에 오로지 우리말사전 편찬 하나에 온 인생을 걸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랍니다. 오늘은 우리말사전이 만들어지기까지 50년 동안의 길고 험난했던 전과정을 통해 우리말글의 발전과 희망을 이야기해볼게요.
“이 사전의 원고는 조선어학회 사건의 증거물로 홍원에 가져갔던 것을 이른바 피고들이 고등법원에 상고하게 되므로 증거물만이 먼저 서울로 발송되었던 것인데 작년 9월 초순에 경성역 창고에서 이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원고를 쉽사리 찾게 될 때 20여 년의 적공(積功)이 헛되이 돌아가지 않음은 신명(神明)의 도움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매 이 원고 상자의 뚜껑을 여는 이의 손은 떨리었다. 원고를 손에 드는 이의 눈에는 눈물이 어리었다.”
- 김병제의 ‘조선어사전 편찬 경과’(<자유신문> 1946년 10월 9일자)
우리말사전 편찬 과정에 대한 이야기에 ‘피고, 고등법원, 증거물’이란 말은 무엇이고, ‘손이 떨리고 눈물이 어리었다’는 표현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요? 이처럼 비장감이 느껴지는 표현들에서 우린 우리말사전 편찬이 그저 사전 하나 만드는 일이 아니었음을 직감할 수 있어요. 국어사전의 편찬은 근대 국가의 공용어를 정립하는 사업이었지만, 근대 개혁이 외세의 침략과 더불어 진행되었던 우리 역사에서 우리말사전의 편찬은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던 것이죠.
1929년 10월 31일 민족적 성원 아래 조선어사전편찬회가 결성되었어요. 1929년은 일제의 식민지배가 시작된 지 20년째 되던 해, 조선어가 식민지의 일개 방언으로 취급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말 사전 편찬이 시작될 수 있었고, 민족적 성원은 어떻게 모아질 수 있었을까요?
1929년 우리는 우리말사전이 없어 민족문화를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만은 막자는 데 민족적 자존심을 걸었어요. 그러나 그러한 공감대가 어느 날 문득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을 터. 자존심의 원류는 1911년 시작했던 ≪말모이≫ 편찬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주시경 선생과 그의 저서 '국어문법' 육필 원고 (출처 : 한글학회, 오마이뉴스)>
대한제국 시절부터 우리말 정리에 앞장섰던 주시경은 ‘비록 나라는 빼앗겼지만 우리말을 지킴으로써 민족혼을 지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조선광문회’ 인사들과 더불어 사전 편찬을 시작했어요. 그러나 주시경의 죽음과 조선광문회의 위기 상황이 겹치면서 ≪말모이≫는 완성되지 못했고, 우리말사전을 만들자는 열망은 주시경이 못다 한 일을 계승해야 한다는 소명 의식으로 남았어요. 결국 3·1운동의 민족적 저항으로 얻어낸 식민통치 방식의 변화로, 주시경의 뜻을 잇고자 하는 이들은 조선어학회를 결성하고, 사전 편찬 계획을 구체화할 수 있었답니다.
그러나 식민지배 기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말의 위상은 낮아지고 이에 비례하여 사전 편찬의 동력이 약화되는 것은 불문가지. 상황은 나빠졌지만 조선어학회는 강습회를 열어 한글을 보급했고, 대중들에게 우리말글의 중요성과 어문정리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환기했어요. 이러한 활동을 통해 얻은 대중의 지지와 성원은 사전 편찬 사업의 결정적 동력이 되었답니다.
<우리말 큰사전 (출처 : http://m.sijung.co.kr/)>
최초의 사전이었기에 중요했던 표기법 제정은 문학인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기에 가능했고, 어휘조사와 표준어 사정 또한 그들의 자발적 참여와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방언을 수집해 사전편찬회에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고, 교육 자료로 만든 어휘집을 사전 편찬 자료로 써달라며 보내는 조선어교사들이 있어요.
이를 바탕으로 사전편찬회는 사전의 표제어를 확정하면서 뜻풀이의 근거를 마련하였고, 1940년 드디어 사전의 원고를 완성했어요. 그러나 식민 통치가 파쇼화된 상황에서 우리말사전 원고는 독립운동의 증거물이 되는 운명에 처했어요. 폭력적 탄압으로 사전 편찬이 좌절된 것이죠. 해방 후 극적으로 사전 원고를 되찾으면서 재개된 국어사전 편찬 사업은 이념적 대립과 외세의 간섭으로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는 현실에서 민족 통합의 당위성을 천명하는 사업이 되었어요. 1947년 ≪큰 사전≫ 첫째 권 출간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이 사전을 남북협상에 참석하는 대표단을 통해 북에 있는 동포들에게 보내 사전 출간의 기쁨을 함께하기로 결의한 것’은 곧 이 사전을 함께 만들었던 우리가 어떻게 분단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의지의 표명이었어요.
결국 남북 분단은 고착되어, ≪큰 사전≫(1957) 완간 이후 북은 ≪조선말대사전≫(1962)을 발간하였고, 이를 토대로 남북의 사전이 발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답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남북의 사전이 ‘우리말사전이 없어 민족문화를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만은 막자는 민족적 자존심’을 공유하며, 남북의 우리말 문화를 꽃피우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이에요. 식민지배를 받았던 민족 중 우리처럼 빠른 시일 내에 공공언어를 확립한 경우는 없었어요. 이제 그 자존심을 통일 국어를 정립하는 데로 모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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