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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대 인물을 만나다, 김종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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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12. 16:00

우리나라는 반 만년 역사 중 1000여 번의 외세 침략을 받아왔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서도 역시 외침에 대해 두려워했어요. 바로 왜구 때문이었는데요. 그래서 대마도를 정벌하는 기록도 남아있지요. 북방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야인들의 끝없는 침략은 조선으로서 늘 골칫거리였어요. 그래서 세종은 6진 개척을 통해 야인들을 정벌하고, 현재의 국경선을 만듭니다. 여진족으로부터 한결 안정적인 나라를 만들었지요. 이번 시간에는 그 주인공을 만나보겠습니다. 세종시대의 인물을 만나다 두 번째 시간, 김종서 장군입니다.



하룻강아지, 범의 굴로 들어가다

김종서 장군은 1383년(우왕 9년)에 출생해 1405년(태종 5년)에 동진사로 급제해 정계에 진출해요. 실록에 등장하는 것은 상서원 직장으로 지낼 때의 기록이에요.


겸 상서 소윤(尙瑞小尹) 변처후(邊處厚)와 주부(注簿) 이수(李隨)·직장(直長) 김종서(金宗瑞) 등을 의금부에 내려 태형 40대를 수속(收贖)하고, 그 직(職)을 파면 하였으니, 순패(巡牌)를 주는 데 친히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 4월 21일 무자 2번째기사)

여기서, 순패란 조선의 야간 순찰꾼들이 가지고 다니는 일종의 통행증이에요. 이 당시의 김종서는 우리가 사극에서 보는 능수능란하고 철저한 인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약간의 미숙함마저 보이죠. 하지만 이러한 실책을 경험 삼아 괄목상대할 만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강원도 관찰사 이종선(李種善)이 아뢰기를, "본도(本道) 금년의 실지 검사[檢踏]가 손과 실이 맞지 않아서 백성의 원망이 많습니다." 고 하여, 임금이 감찰(監察)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어 다시 검사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2권, 세종 즉위년 11월 29일 을해 3번째기사)

세종은 즉위 이후, 토지 조사를 해요. 그 중 강원도에서 답험손실(踏驗損實: 실지 답사를 통해 수확량을 조사함)로 원성이 크자, 김종서를 감사로 파견해요. 그리고 김종서는 세종이 준 일을 완벽하게 해내죠.


 강원도 행대 감찰(行臺監察) 김종서(金宗瑞)는 장계를 올려,

"원주(原州)·영월(寧越)·홍천(洪川)·인제(麟蹄)·양구(楊口)·금성(金城)·평강(平康)·춘천(春川)·낭천(狼川)·이천(伊川)·회양(淮陽)·횡성(橫城) 등지의 기민(飢民) 7백 29명에게 조세(租稅)를 면제해 주시옵소서."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1월 6일 신해 6번째기사)

강원도 행대(行臺) 김종서가 복명(復命)하기를,

"경차관(敬差官) 김습(金襲)이 흉작을 풍작으로 꾸며 과중하게 간평(看坪)했습니다."

고 아뢰니, 임금은 말하기를,

"이야말로 토색질하는 놈이니, 사헌부로 하여금 엄중히 처벌하게 해야 한다."

고 하였다.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1월 17일 임술 5번째기사)

실록에서 일부만 발췌했지만, 날카로운 모습의 김종서가 두드러집니다. 이후 김종서는 여러 지역의 판관 그리고 경차관(조선 시대 중앙정부의 필요에 따라 특수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된 관리)으로 파견되어 세종을 대신해 민생을 돌보는 역할을 했습니다. 세종에게 늘 충직한 신하였지만, 매섭기도 한 신하였어요.


 지평(持平) 김종서(金宗瑞)가 계하기를,

"이제 서장문(西墻門) 안에 사청(射廳)을 지어 놓은 것은 그 불가함이 세 가지가 있으니, 궐내에 사청을 짓는다는 것이 첫째로 불가한 일이요, 군사들이 떠들어서 궁금(宮禁)이 엄숙하지 못함이 둘째 불가한 일이요, 군사들이 파수보는 일을 버리고 서로 오락가락하여, 시위하는 직무가 허소하게 될 것이 셋째로 불가한 일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 2월 12일 무오 2번째기사)

여기서 사청은 ‘활쏘기 연습장’이에요. 물론 세종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허락하지 않았어요. 김종서는 옳고 그른 일에 대해서는 늘 참언하는 신하였기 때문에 세종에게 신뢰받는 신하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온 하룻강아지였지만 알고 보니 호랑이었던 것이지요.



항상 차고 있다가 짐승을 쏘라

흔히 김종서를 장군이라고 부르죠. 하지만 사실 김종서는 문과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인물이에요. 김종서는 여러 외직과 언관직을 거치며 훌륭한 행정 수완과 강직함으로 이름이 높았고 예학과 경학, 역사에도 밝았어요. 그래서 세종은 늘 김종서를 곁에 두고 업무를 봅니다.


좌대언 김종서에게 전교하기를,

"내가 병중인데다가 마침 사신의 일로 마음이 번거로운데, 환시(宦寺)들이 말을 복잡한 사연을 다 전하지 못하는가 싶으므로 마음과 기운이 함께 피곤하니, 경은 지금부터 재계하고 밤낮으로 공소(公所)에 있으면서 나의 말하는 바를 듣고 밖에 선전하라."

(세종실록 53권, 세종 13년 8월 18일 경술 2번째기사)

이 당시의 김종서에 대한 세종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잘 나타내는 대목입니다. 이 뿐만이 아니에요.


좌대언 김종서에게 명하여 이부(吏部)의 선임(選任)을 맡게 하니, 신하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세종실록 60권, 세종 15년 5월 16일 무진 3번째기사)

조선시대의 명장 최윤덕의 업적을 논하는 자리에서 세종은 김종서에게 이부지선(吏部之選)을 관장하도록 특명을 내려요. 이부지선은 이조의 인사권으로 김종서가 인사를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종은 그만큼 김종서를 믿고 맡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세종에게도 늘 고민거리는 있었어요. 바로 북방의 야인들이었는데요. 이들은 여진족뿐만 아니라 많은 유목민족들의 침략으로 함경도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어요. 그래서 세종은 결단을 내립니다. 바로 김종서를 함길도(함경도의 옛 이름)의 관찰사로 파견한 것이에요. 이후 김종서는 함길도에서 8년간 머물면서 4군 6진을 개척합니다. 두만강까지 개척해 낸 이 땅이 현재 한반도와 중국의 국경선이 됐어요. 이 때 얻은 별명이 커다란 호랑이란 뜻의 ‘대호(大虎)’ 입니다.


승정원에 명하기를,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에게 백일(百日) 후에는 고기를 먹도록 권하고 돌아와 임소(任所)로 가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70권, 세종 17년 11월 22일 기축 3번째기사)

세종은 김종서를 파견하기 얼마 전 활과 화살을 내려주며 “항상 차고 있다가 짐승을 쏘라” 라는 말을 합니다. 이미 세종은 북방을 맡길 인물로 김종서를 점 찍어 두었던 것이죠. 한편 김종서가 북방에 있는 동안 어머니가 돌아가셔 3년상을 치르고자 했는데 세종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원래 조선에서는 부모 상을 당하면 3년상을 치렀는데 세종은 백일 후에 함경도로 돌아가라고 명을 내립니다. 이에 김종서는 상을 마치고 효를 다하게 해달라고 상소를 올렸는데, 세종은 이러한 긴 답서를 보냈어요.



 "지금 올린 글을 보고 경의 뜻을 이미 잘 알았는데, 경이 친상(親喪)에 마음을 다하고자 한 것은 그 뜻이 진실로 좋다. 그러나, 예로부터 임금이 관계하는 신하에게 마지못하여 기복출사(起復出仕)시킨 사람이 자못 많으며, 또 조종의 성헌(成憲)에도 장상(將相)의 신하는 관계가 지극히 중대하므로 부모의 상에 특지로서 기복시킨 것이 예전에 기재되어 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함길도는 지경이 저 오랑캐 땅에 연해 있으므로, 수비와 방어의 긴요한 것은 본디 다른 도의 비교가 아니다. 하물며 지금 새로 설치한 군·읍(郡邑)의 무유(撫綏)하는 방법은 또한 평상시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경은 옛일을 상고하는 힘과 일을 처리하는 재주가 있으며, 일찍이 측근의 관직에 있어 내 뜻을 자세히 알아서 중대한 임무를 맡을 만한 까닭으로, 일찍이 명하여 도관찰사로 삼았다가 또 도절제사로 옮겼는데, 북방에 오래 있어 지방 풍속을 자세히 보고, 적군의 약하고 강함과 백성의 진실과 허위를 자세히 다 알아서 처리함이 방법이 있었던 까닭으로, 내 뜻이 단연히 경으로써 북방의 책임을 맡기었던 것이다. 지난번에 마침 어머니 상사(喪事)를 당하여 군문(軍門)이 오래 비었으므로, 내가 심히 염려했는데, 이미 장사를 지낸 후에는 옛날의 기복시키는 예에 따라서 그전 임무에 돌아가게 하는 것이 내 뜻으로 이미 결정되었으므로, 서소(書疏)가 비록 올라오더라도 마침내 따를 리가 없을 것이니, 결코 다시 올리지 말고 억지로 최질(衰絰)을 벗고 빨리 그 직책에 나아가라."


요약하자면 ‘예전에도 상복을 벗고 업무를 시킨 신하가 있었고, 북방의 안전을 책임질 사람으로 김종서만한 인물이 없다’는 얘기 후 ‘다시 글을 올려도 보지 않을 것이니 빨리 북방으로 돌아가라’는 내용이에요. 이런 세종의 냉혹한 답서는 그만큼 야인들을 정벌하고 북쪽에 대한 염려가 깊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만큼 김종서에 대한 의지도 컸다고 헤아려 볼 수 있어요.

그러나 김종서가 북방에 가 있는 동안 많은 정적들이 세종과 김종서의 사이를 이간질하여 사헌부에서 탄핵 상소가 올라오기도 했어요.


 “홀라온이 종서의 애기(愛妓)에게 뇌물을 바친 것을 그대로 서울에 보낸 것이 하나이옵고, 전지(田地)를 주고 빼앗는 것을 자기 한 사람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대로 한 것이 둘째이옵고, 기복(起復)해서 진(鎭)으로 돌아갈 때에 안변(安邊)에서 기생을 데리고 경성(鏡城)으로 간 것이 세째이온데, 그 나머지는 신이 자세히 알지 못하옵니다. “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종서의 공은 크다. 그를 움직일 수는 없다."

하고, 드디어 종서에게 전지하기를,

"경은 부동(浮動)하는 마음을 갖지 말아라. 만일 그러한 병이 있다면 근신(謹愼)해서 조섭(調攝)하고 다시 더 심력을 다하여 그 직무에 충실하고 삼가도록 하라." 하였다.

세종은 이와 같이 김종서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종서는 계속 하직 상소를 올리곤 했다고 해요. 이건 아마 세종을 안심시키려는 방법이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당시 김종서는 북방에서 야인들을 상대하는 강한 군대를 길러내는 위치에 있었고 그래서 건국 초기의 세종으로서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김종서는 이에 자신의 충심을 표현하고, 세종을 안심시키기 위해 계속 하직 상소를 올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명대신, 철퇴 아래 무너지다

세종의 충직한 신하인 김종서는 문종의 치세에서도 활약해요. 먼저 고려사를 개찬하는 일을 진두지휘 하는데요. 원래 고려사는 태조 때부터 작성한 고려의 역사서 입니다. 이를 세종시대에 계속 개찬하다가, 문종시대에 이르러 김종서를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이 마무리 짓습니다. 이는 김종서가 집현전 학자들에 비해서도 학식이 밀리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김종서는 세종실록 또한 편찬하는 일에 함께했어요. 이와 같이 김종서는 문종에게 있어서도 유능하고 충직한 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종은 어린 아들 단종을 남겨두고 재위 2년만에 사망하고 맙니다. 그래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등을 불러, 어린 세자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깁니다. 왕의 유언을 받드는 신하를 고명대신이라 합니다.

이렇게 12살의 단종을 보필하게 된 고명대신 김종서는 신하를 발탁하는 일부터 모든 일을 맡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하들이 활개치는 것에 대해 왕실의 종친들은 분노하게 되는데요. 특히 세종의 아들들이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는 수양대군파와 안평대군파로 나누어지게 돼요. 이러한 상황에서 김종서는 안평대군과 함께 하며 왕을 보필하죠. 이에 수양대군은 안평대군파, 특히 안평대군과 더불어 조정의 대신 김종서를 제1의 제거대상으로 삼습니다.

음력 10월 10일, 달이 뜬 밤, 수양대군은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김종서를 찾아가요. 수양대군은 김종서에게 사모뿔을 빌려달라고 하고, 아무것도 모르던 김종서는 수양대군에게 담소를 청하죠. 수양대군은 우물쭈물하다가 한 서찰을 김종서에게 내밀었어요. 김종서는 휘갈겨 쓴 편지를 달빛에 읽으려 애썼고 이때 수양대군이 옆에 있던 몸종 임운에게 눈빛을 보내 임운이 철퇴로 김종서를 내려쳐 결국 김종서는 쓰러지고 말아요. 이때 옆에 있던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가 아버지의 몸을 덮었고, 수양대군 일파는 김종서를 난도질을 하려 했으나, 어두운 밤이라 잘 알아보지 못하고 아들인 김승규만 목숨을 잃어요. 이 사건이 세조의 왕위찬탈, 계유정난의 시작입니다.

김종서는 다행히 살아남아 여장을 하고 궁에 들어가 수양대군과 일전을 벌이고자 하였으나 실패해요. 둘째 며느리 집에 숨어 기회를 엿보다, 결국 들통나 살해 당하고, 대역죄로 효수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김종서, 그를 만나러 가다

현재 김종서의 묘는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대교리에 있어요. 이 마을 이름에 얽힌 일화가 있는데요. 김종서가 역적으로 사지가 찢겨 죽자, 그가 아끼던 말이 죽은 김종서의 다리만 물고 본가가 있던 공주의 땅으로 달려와 죽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화를 바탕으로 ‘한 다리 마을’로 불렸다고 해요. 훗날 같은 의미이자 다른 한자를 써 대교리로 바꾸었습니다.


현재 대교리에 있는 김종서 장군묘의 신도비에요. 이 신도비의 특이한 부분은 저 두꺼비입니다.


원래 이러 비석의 기단 부분은 귀부(龜趺)라 하여 거북이를 쓰는데 특이하게도 두꺼비가 있죠. 그 이유는 풍수지리학적 특성 때문이라고 해요. 이 대교리 자리가 지네의 형상이라 지네와 상극인 거북이 대신 지네와 궁합이 잘 맞는 두꺼비를 받침돌로 두었다고 해요.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의 묘도 있는데 아마도 가묘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 김승규 또한 김종서와 같이 역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시신 수습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이 김종서 장군 묘입니다. 일화에 의하면 한 다리만 묻혀있는 묘이죠. 석물들은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보여요.


가장 작은 비문부터 살펴보면 써있는 글귀는 ‘조선 좌의정 절재 김 선생 종서지묘’ 입니다. 이 비는 1748년 (영조 24년)에 공주 찬관 이익진과 유생들이 세운 비라고 합니다. 김종서가 신원 된 이후 세워진 비인데요. 신원이란, 원한을 푼다는 의미라고 해요. 과거에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인물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중종 때 죽은 조광조도 죄를 뒤집어 쓰고 죽었으나 후에 신원이 된 인물입니다.


이 비문에는’대광보국숭록대부 시 충익 호 절재 순천 김공 종서 지묘’라고 써있어요. 대광보국숭록대부는 조선시대 최고의 품계입니다. 시호는 충익공, 호는 절재, 순천 김씨 가문의 종서 의 묘 라는 뜻이에요.


이 비문이 가장 최근에 세워진 비문이에요. 비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조선국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시 충익 호 절재 순천김공 종서지묘

간좌


‘의정부에서는 좌의정 이자, 경연을 하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의 장이다. 시호는 충익 이고 호는 절재이며 순천 김씨 가문의 종서의 묘 이다’라는 뜻입니다.

 Q. 의정부,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이 무엇일까요?

의정부(議政府): 조선 시대에 둔, 행정부의 최고 기관이다.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있어 이들의 합의에 따라 국가 정책을 결정 하였으며, 아래에 육조(六曹)를 두어 국가 행정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 홍문관(弘文館): 조선 시대에, 삼사(三司) 가운데 궁중의 경서, 문서 따위를 관리하고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 예문관(藝文館): 조선 시대에, 사명을 짓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태조 원년(1392)에 둔 예문춘추관을 태종 원년(1401)에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분리하였는데 고종 31년에 경연청에 합하였다.

* 춘추관(春秋館): 조선 시대에 둔, 시정의 기록을 맡아보던 관아. 태조 때에 예문춘추관을 두었다가 태종 때에 예문, 춘추의 두 관으로 독립하였는데, 고종 때 없앴다.

* 관상감사(觀象監): 조선 시대 예조에 속하여 천문(天文), 지리(地理), 역수(曆 數), 기후 관측, 각루(刻漏) 따위를 맡아보던 관아.

* 영관상감사(領觀象監事): 조선 시대에, 관상감의 으뜸 벼슬. 정일품의 문관 벼슬로 영의정이 겸직하였다.


국난의 시기, 그를 그리워하며 

김종서가 죽고 시간이 흘러 영조 대에 이르러 김종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데요. 계유정난으로 인해 죽었던 황보인과 김종서의 후손들이 영조에게 탄원서를 제출했기 때문이에요.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한창 이야기를 나누게 돼요. 왜냐하면 김종서의 신원은 곧 영조 자신의 조상 세조의 왕위찬탈을 인정하는 꼴이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결론을 먼저 이야기 하자면 김종서의 신원을 허락하게 됩니다. 마치 고려 말에 죽은 정몽주와 비교하면서 말이죠. 더하여 세조도 아들인 예종에게 ‘나는 고난을 주었지만 너는 태평을 주라.’라고 하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주저하는 영조를 압박하였습니다. 마침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제범’에 세조의 훈사(訓辭)가 첨부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영조는 즉시 책을 가지고 오도록 한 뒤 앞의 구절을 말하면서 이들의 신원을 명령하게 됩니다. 덕분에 지금까지 김종서는 충의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어요.

김종서는 한 시대를 주름잡은 큰 호랑이였습니다. 북방의 야인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부정부패 관리들에게도 마찬가지였어요. 다만 그 기세가 거칠었기 때문에 늘 견제의 대상이 되었죠. 하지만 그가 세운 공으로 인해 우리나라가 지금의 영토를 갖추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어요. 세종은 "북방의 일은 종서가 있어도 과인이 없었으면 이루지 못했을 것이고, 과인이 있어도 종서가 없었으면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라며 공적을 평가했습니다. 역시 그를 귀하게 사용한 세종의 안목 또한 대단하다고 볼 수 있겠죠. 마지막으로 김종서가 남긴 시구와 함께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이상 가꿈사 프론티어 8기 기자 임병준 이었습니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 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참조
'네이버 인물한국사(이근호 명지대 연구교수) - 문무를 겸비한 큰 호랑이 ' 김종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왕조실록(sillok.history.go.kr) 중 세종실록-문종실록-단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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