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라이프

본문 제목

한센병은 낫는다, 슬프고 아름다운 섬 소록도

본문

2017. 5. 11. 09:46

오는 5월 17일은 ‘제14회 한센인의 날’이자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1주년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한센병 환자를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은 전남 고흥군에 있는 소록도에 위치해 있는데요. 어린 사슴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소록도라 불리나고 합니다. 여린 이름과는 달리 이 섬은 한센인의 피와 눈물이 배어 있는데요, 소록도에는 아직도 700여 명의 한센병 환자와 의료진, 자원봉사자들이 살고 있습니다. 한센인의 날을 맞아 소록도를 찾아 한센인의 아픔을 살펴보고 왔습니다.

 

 

한센인들의 한이 서린 소록도

서울 센트럴고속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5시간 10분 정도 달리면 소록도와 가장 가까운 녹동버스터미널에 도착해요. 녹동버스터미널에서 시내버스를 한 번 갈아타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소록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섬이 그토록 아픈 역사를 갖고 있으리라 쉽게 짐작하기 어려웠어요.

 

(한센병박물관)

 

섬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외부인에게 개방되었으며 중앙공원과 한센병 박물관 두 곳만 방문이 허용되었습니다. 마을 곳곳에는 출입 및 촬영을 제한하는 안내문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여느 관광지가 아닌 아픈 역사의 장소라는 점에 몸과 마음이 저절로 숙연해졌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이 받은 핍박

(벽돌공장터 예수상)

 

1916년 일제는 신의 후손이 통치하는 나라에 한센병 환자 같은 사람이 존재하면 안 된다며 소록도에 소록도자혜의원을 개원합니다. 이곳은 한센병의 치료 목적보다는 한센병 환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 수용하기 위한 시설이었어요. 이곳에서는 우월한 유전자만 남기고 열등한 유전자는 없앤다는 우생학을 근거로 한센병 환자들의 자녀 생산을 금지하기 위해 폭력적인 단종(남성 피임)과 낙태를 실시했습니다.

 

(감금실)

 

이뿐만 아니라 중일전쟁으로 인한 군수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한센병 환자들에게 강제 노동을 실시했고 이를 저항하는 환자들은 감금실에 가두고 강제로 단종수술을 했어요.

 

(감금실 내부)

 

1935년 만들어진 이 감금실은 일제강점기 인권탄압의 상징물입니다. H자 형태로 방에 철창이 설치되어 있고 방 한 쪽에 변기가 있는데요. 이곳에서 환자을 감금, 감식, 금식, 체벌 등의 징벌을 행했고 출소 시 강제로 단종수술이 시행되었습니다.

 

감금실 말고도 검시실이라는 곳도 있었는데요. 이곳은 사망한 한센병 환자들의 시신을 해부하던 곳이에요. 모든 사망환자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해부절차를 마친 뒤 화장됐다고 해요. 해부를 진행했던 검시대와 세척 시설들이 현재에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건물 밖의 맑은 날과 대비되어 더욱 어두웠던 곳으로 기억됩니다.

 

 

몰라 3년, 알아 3년, 썩어 3년

한센병 박물관에는 <소록도의 말말말>이라는 전시물이 있는데요. 그중 ‘몰라 3년, 알아 3년, 썩어 3년’이라는 말이 한센병 환자들의 삶을 잘 표현하고 있어요. ‘병인 줄 몰랐던 3년, 병을 알고 우물우물 그저 망설이다 3년, 이제는 병이 커져서 상처 부위가 감염되어 부패하고 눈멀고 팔, 다리가 잘리는 체 살다 죽는 생활’이라는 뜻으로 한센병 환자들의 자학자조적인 표현입니다. 이처럼 한센병에 대한 치료약이 개발되기 전까지 한센병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한센병 환자들은 사회적인 보호는커녕 세상에 대한 편견과 이해부족으로 돌팔매질을 당했습니다.
<소록도의 말말말> 중 ‘사회, S도’라는 말도 있는데요. 소록도 섬 밖의 일반 사람들이 사는 곳을 ‘사회’, 소록도를 ‘S도’라고 불렀다고 해요. 이 단어만 보더라도 소록도가 사회로부터 얼마나 소외된 곳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죽음, 그 이후

 (‘나환자를 구한다’라는 뜻의 구라탑)

 

한센병 환자들은 한센병이 발병했을 때 한 번 죽고, 원치 않은 해부에 두 번 죽고, 화장할 때 세 번 죽는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한 네 번째 죽음이 있으니 바로 ‘사회적 죽음’이에요. 한센병은 유전되지도 않고, 이미 완치 가능한 병일만큼 병원체가 지극히 약해요. 하지만 발병 시 외형적인 변형으로 ‘하늘 내린 벌’이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환자 본인뿐 아니라 가족들도 차별과 소외를 받으며 심각한 상처를 받았습니다.

해방 이후 최근까지도 한센병 환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차별과 오해가 계속되고 있어요. 1945년 8월부터 1963년까지 이어진 집단 학살•폭행 및 격리조치, 안동 어린이 실종 사건(1947), 목포 용해동 사건(1949), 나주 냇골 사건(1950), 부산 성화원 사건(1953~1970), 홍골골수 천자 사건(1954), 사천 비토리 사건(1957), 한센인 자녀 등교(공학) 거부 사건(1960), 양평 양수리 사건(1963), 부산 삼덕농원 한센인 명예훼손 사건(1983), 개구리소년 실종 관련 명예훼손 사건(1991) 등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가장 최근 일어난 개구리소년 실종 관련 명예훼손 사건(1991)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언론은 인근 한센인 마을에 실종된 소년들이 암매장되었다고 오보해 한센인의 명예를 훼손시킨 사건이에요. 당시 사실 확인 여부와 상관없이 검찰의 수색영장이 발부되었고 한센인의 마을을 수색하고 발굴 작업을 벌이는 등의 경찰 수사도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의혹에 불을 지핀 것은 언론이었지만 그 불길을 키운 것은 우리와 같은 일반 시민이었어요. 여전히 한센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불과 20여 년 전의 사건이라는 점이 저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 많은 사건들은 어떻게 해결되었을까요? 모든 사건의 피해자는 있었지만 가해자와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 정부는 2007년 ‘한센인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 지원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습니다. 하지만 2017년 2월이 되어서야 한센인 피해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국가 배상 판결이 처음으로 났습니다. 약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된 것이며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센병박물관 , 소록도의 친구가 되겠다는 약속)

 

피해자에 대한 경제적 배상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어요. 바로 우리들의 왜곡된 인식의 변화입니다. 한센병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이 가득했던 우리를 피해 그들은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스스로 사회로부터 격리 시켰던 거예요. 잘못된 정보와 근거 없는 소문으로 사회적 약자인 한센병 환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단지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말도 안 되는 인권유린을 받아온 한센인들을 위해 지금부터라도 편견을 버리고 병에 대한 올바른 인식부터 시작해야 해요. 한센인뿐만 아니라 편견과 차별로 고통받고 있는 사회적 약자를 돌아보고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춰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가꿈사 프론티어 기자단 10기 장주원이었습니다.

 

 

 

행운 가득! 행복 가득! 가꿈사가 준비한 이벤트 참여하고 선물 받으세요!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