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25. 10:00
나는 역리파다.
나같이 키 작고 가냘픈 여대생이 흑룡이나 백호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 무시무시한 조직에 몸담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나는 대단히 유서 깊고 끈끈한 유대를 자랑하는 역리파에 몸담고 있다. 역리파의 조직원은 총 3명이며, 우리는 2005년부터 전라남도 영암군 역리 일대를 주 무대로 활동해왔다. 우리 조직원들은 지금은 농촌인력센터로 바뀌어버린 백년슈퍼 앞 ‘삼’거리를 기준으로 ‘3’분 거리에 ‘3’명의 조직원이 각각 살고 있었다. 나름 꽤 체계적인 편이다.
또한, 우리는 원활하게 역리를 점령하기 위해 항상 붙어 다녔다. 사실 이것은 자발적인 선택은 아니었는데, (우리 또래의 학생들이 급격히 줄어가는 농촌 마을인) 영암에는 우리가 다닐 수 있는 초-중-고등학교가 모두 하나씩밖에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었다.
아침 7시 40분. 백년슈퍼 앞 삼거리에 축 늘어진 가방을 짊어진 똑단발 여학생이 하나-둘셋 모이면 우리는 비로소 학교로 향했다. 아침잠이 많았던 3번 대원은 도착 10초 전부터 ‘우다다다’ 뜀박질 소리를 내며 자신의 존재를 예고하고는, 멋쩍어하는 모습이 귀여운 미소와 함께 우리에게 속삭였다. “얘들아, 미안.”
오후 4시. 종례 말씀을 주례 선생님만큼 길게 하시던 나의 담임선생님 덕분에 두 대원은 늘 우리 반 앞에서 나를 기다려야 했고, 집에 빨리 가고 싶은 두 대원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반장이 “차렷, 경례.”를 채 마치기도 전에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외치며 ‘우다다다’ 신발장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아침에 3번 대원이 그랬던 것처럼 멋쩍은 표정을 하고 최대한 넉살 좋게 웃어 보이며 속삭였다. “얘들아, 미안.”
학교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역리파의 활동이 시작된다. 우리는 집으로 향하며 (의도치 않게) 농촌의 적막을 깨뜨리는 데 주력한다. 각자의 반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해프닝부터 세간의 이슈나 연예계 소식 등을 공유하며 수다를 떠는 것이다. 그 후에는 도서관에 가서 공부해야 하는 시험 기간이 아니면 대원들 가운데 한 사람의 집을 골라 방문한다. 삶은 고구마와 달걀이 늘 준비된 2번 대원의 집은 배가 고플 때, 제일 좋은 텔레비전이 있었던 3번 대원의 집은 텔레비전을 보고 싶을 때 방문했고, 우리 집은 딱히 당기는 것 없는 날 방문해 라면을 끓여 먹곤 했다. 숙제하거나, 하굣길에 미처 못한 수다를 떨거나, 티브이를 보거나, 혹은 그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하다가 피곤해 잠이 들기도 했다. 해가 지고 세상이 깜깜하게 변해버린 것을 알고 깜짝 놀라 각자의 집으로 뛰어가곤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학교 수업이 밤 10시나 11시에 끝났기 때문에 역리파의 활동이 정체기에 접어들었다. 아쉬운 대로 시험이 끝나거나 학교행사로 학교가 빨리 마치는 날이 있으면 밀린 활동을 했는데, 중학생 시절보다 십분 인상된 용돈 덕분에 자주 못 만나는 대신 통닭이나 피자를 시켜 먹는 사치를 부릴 수 있었다. 또한, 철없던 말괄량이 시절보다 대화 주제가 사뭇 진지해졌다. 이 대학은 어떻고, 저 전공은 저떻고, 내 성적은 이렇고, 현재 입시 추세는 저렇고…. 영암에는 입시 전문 학원이나 상담교사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가 가진 정보와 조언에 기대어 우리가 마주한 거대한 그림자를 헤쳐나가야 했다.
그리고 입시가 다가올수록 우리는 조만간 뿔뿔이 흩어지게 되리라는 걸 직감했다. 우리는 각자 다른 꿈을 그리고 있었으며, 그 그림의 완성을 위해서는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다. 그리고 그 예감이 현실이 된 지금, 우리 세 대원은 모두 역리를 떠나, 영암을 떠나 살고 있다.
대학생이 되어 전국에 지부를 갖게 된 역리파는 이제 명절에만 만날 수 있다. 아르바이트해서 돈을 버는 우리는 전보다 훨씬 덜 자주 만나는 대신 심각한 망설임이나 지대한 결심 없이도 통닭을 사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는 통닭과 곁들여서 맥주도 마실 수 있다!) 대학 입시 앞에서 똑같은 고민을 하던 고등학교 시절과 달리 전공이 제각각인 지금은 서로 다른 관심과 이야기를 꺼내고, 전처럼 맞장구를 치는 대신 ‘그 분야는 그렇구나.’ 신기해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여전히 백년슈퍼 앞 삼거리에 모여서 활동하지만, 삼거리로 가기 위해 지나온 길이, 무척이나, 달라진 것이다.
가끔은 이 변화가 참 애석하고 원망스럽다. 나의 순박하고 정겨운 동네 친구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귀 기울여주고 따뜻한 응원의 말을 해주지만, 예전처럼 나의 일상을 온전히 이해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나 역시 나와는 다른 고민을 하는 친구들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며, 그들에게 100% 공감하지 못한다. 그런 나 자신이 정말이지 낯설고 밉다. 그럴 때, ‘우리가 이제 다른 길을 걷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면, 아직은 내뱉기 이른 말인 걸 알면서도 ‘세월이 야속하군.’하고 속삭이며,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쓸쓸한 마음을 품고 다시 나의 자리로, 나의 일상으로 돌아가곤 한다.
그렇게 나의 자리에서 일상을 살던 어느 날, 아쉬운 듯 하루의 끝자락을 붙잡고 누워 이것저것 공상을 늘어놓던 어느 날, 역리파에서 철없는 행동대장을 맡은 2번 대원이 단체 메시지를 보내왔다.
“뚜뚜 사랑한다. 역리파.”
그런 말을 하기에 너무 막역해서, 새삼스럽게 말로 하기 낯간지러워서,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쉽게 하지 못한 말이었다. 특히나 그런 쑥스러운 표현은 질색하던 2번 대원이 이런 말을 하다니….
“뭐냐 갑자기~”
“그냥 갑자기 우리가 너무 대단해 보여서. 만날 때마다 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
우리는 전공이 달라졌고,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있었고, 그 길은 서로 너무 멀어 좀처럼 마주칠 수 없었다. 나는 그 사실이 그토록 슬펐다. 그토록 슬퍼하느라 미처 알지 못한 것이다. 가끔 쉬어가기 위해 백년슈퍼 앞 삼거리에 멈추면 ‘우리 모두 이 길에서 출발했었지.’ 다시금 깨닫고, 서로가 지나온 길을 돌아봐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네가 걸어온 길에는 이런 꽃이 있었구나, 이런 언덕이 있었구나, 좋았겠다, 고생했다, 잘했다고 말해주었다는 것을. 그 따뜻한 말들은 나도 모르는 새에 나의 길을 계속 걷게 하는 이유와 힘이 되었다는 것을. 나는 다시 혼자가 되어 나만의 길을 가지만, 저 너머 보이지 않는 어떤 길에서 나의 친구들도 열심히 땀을 닦아가며 두 팔을 내젓고 있다는 것을.
2014년 1월 1일. 우리가 대학생이 된 해에 도로명 주소가 시행되었고, 그로 인해 공교롭게도 우리가 역리를 떠나는 그 해에 역리란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나는 역리파다.
*본 게시물은 2016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수상작으로 상업적 용도의 사용, 무단전제, 불법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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