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23. 17:15
이계임 사진관이 문을 닫는다.
잔존하는 유년기 기억의 구 할은 사진관에서 비롯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사진관은 나의 성장과정에서 한 그루 고목 같은 곳이었다.
어린이집에 다닐 적 나는 단칸방이었던 집에 가기 싫을 때면 사진관엘 들렀다. 가게 문을 열고 빼꼼 얼굴을 내밀면, 내가 가게에 들른 이유를 알고 계셨던 어머니는 “엄마 바쁜데.”라고 푸념하면서도 “선생님 말씀은 잘 들었고?” 물으며 손을 내미셨다. 어머니 손을 잡고 동네를 거니는 것은 어릴 적 내가 느끼는 최고의 행복이었다. 꼭 잡은 어머니 손의 투박한 촉감은 지금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어머니는 사진관 뒤의 자갈밭을 두어 번 돌고, 가로등이 희미하게 비추는 길을 따라가면 마주하는 갈보리교회 앞, 수많은 쪽방 중 하나였던 우리 집에 나를 데려다 주시곤 다시 가게로 향하셨다.
유년기에 나는 선천적인 심장병을 앓았다. 내가 앓았던 ‘승모판 폐쇄 부전증’은 피가 역류하는 질환으로, 당시만 하더라도 유아 치사율이 절반을 넘는 무서운 질환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내려진 시한부 선고에 어머니는 산후조리도 뒤로 한 채 온 병원을 돌아다니며 내 병에 대해 조사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신생아의 엄지손가락만 한 심장에 칼을 댈 수 없다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계셨고,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의사의 권유를 완강히 거절하셨다. 대신 어머니는 내 심장을 살 찌우는 데 전념하셨다. 어머니가 매일 차려 주신 고기반찬과 나의 타고난 식성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고학년 키를 훌쩍 넘길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아홉 살에 의료진도 놀라는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며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을 앞둔 며칠 전, 어머니는 나를 사진관에 데려와 발가벗겨 놓으시곤 사진을 찍으셨다. 며칠 후면 자식 가슴에 새겨질 커다란 칼자국이 여간 속상한 게 아니셨을 거다. 영문 모르는 애만 신나던 그날의 촬영은 밤늦도록 계속됐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이면 어머니가 늦잠을 주무시는 동안 사진관을 돌봤다. 그 이유는 게임 때문이었는데, 어머니는 집에 절대 컴퓨터를 들이지 않는다는 교육관을 갖고 계셨다. 때문에 나는 매일 아침 게임을 하기 위해 가게로 달려갔다. 어머니께 열쇠 꾸러미를 건네 받고 문을 나서는 순간의 기분은, 기말고사를 마치고 번화가로 향하는 기분이랄까, 정말이지 짜릿했다. 서둘러 컴퓨터를 켜고 사탕을 까먹으며 게임을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제 와 고백하자면, 사실 첫 손님이 너무 빨리 오신 날에 어머니께 전화를 하지 않은 적이 몇 번 있다.
중학교 때 내가 공부에 흥미를 보이자 어머니는 나를 전적으로 지원해 주셨다. 아버지의 치료비로 빠듯한 사진관 벌이에도 나를 강남의 학원에 보내셨던 어머니의 집념은 대단했다. 수천 냥을 빚지더라도 돈 없어서 자식 공부 못 시키는 건 용납 못하신다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눈이 도로를 가득 덮은 날에도 어김없이 청담대교를 건넜다. 외제차가 즐비한 대치동 학원가에서 당신의 자동차였던 크레도스에 시동을 걸 때마다 “우리 아들이 공부하겠다는데 뭐가 부끄럽냐”라고 자문하시면서.
대학교 원서접수를 하던 날의 사진관 이미지도 선명하다. 허리 디스크를 앓으셨던 어머니는 장의자에 누워 원서접수 하는 걸 지켜보셨다. 입시가 끝나고서야 하신 말이지만 어머니는 차마 말리지는 못하겠고, 저 대학들 중에 하나라도 붙겠냐며 고개를 저으셨다고 한다. 합격 발표일의 추억을 덧붙이자면, 나는 점심을 조리하시는 어머니 옆에서 곧 있을 합격자 발표에서의 나의 높은 가능성에 대해 조잘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덜컥 발표 문자가 왔다. 말을 멈추고 방으로 들어갔다. 떨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수험번호를 눌렀다. 글씨는 보이지 않았다. 파란색이었다. 연거푸 “엄마!”를 외쳤다. 황급히 달려오신 어머니께 핸드폰을 건네드렸다. 한참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짐작하건대 어머니는 잃어 버린 당신의 지난날에 대한 보상의 눈물을 흘리셨을 거다. 처음 보는 어머니의 기쁜 울음에 시큰해져서, 나도 따라 울었다.
충전은 전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전류를 내어주는 희생적인 일이란 걸 직접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모자람 없이 에너지를 쓰는 동안, 어머니가 그 뒤에서 발전기를 돌려오셨다는 것을. 어머니의 헌신으로 어느덧 나와 동생은 어엿한 성인이 되었지만, 그 시간만큼 어머니는 청춘에서 멀어져 황혼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십 년 동안 하루도 여유롭게 점심을 드신 적이 없다. 함께 밥을 먹다가도 손님 전화가 오면 부리나케 나가셨던 까닭에, 어머니의 그릇에는 늘 밥 세 숟가락이 남아 있었다. 큰맘 먹고 떠난 가족여행에서도, 간만의 외식에서도 손님 전화를 받을 때면 놓친 만 오천 원이 마음에 걸리는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사진촬영을 따라간 적이 있다. 조명, 배경지, 삼각대 그리고 렌즈와 카메라까지. 내가 들기에도 무거운 쇳덩이들이었다. 그네들끼리 신난 손님들 앞에서 어머니는 인위적인 웃음을 띤 채 연신 셔터를 누르셨다. 한나절에 걸친 촬영을 도와 드리고 녹초가 되어 돌아오던 길에, 그간 아들이라는 변명으로 무지해 왔던 당신의 희끗한 머리와 옅게 팬 주름을 처음 보았다.
어머니는 술을 드신 날이면 당신의 추억이 담긴 수천 장의 사진을 꺼내어 지난날을 회상하곤 하셨다. 사진 속 라스베이거스에서 마주한 당신의 젊음은 아름다웠다. 잔뜩 멋부린 옷을 입고, 만개한 웃음을 짓고 있던 이십 대의 당신은 영락없는 숙녀였다. 어머니는 꼭 그 사진을 볼 때면 “홀로 두 아들 이렇게 키웠는데 더 바랄 게 뭐가 있냐.”라고 말씀하시며 술잔을 비우셨다. 그렇게 비운 술잔에 비친 당신의 얼굴엔, 맺힌 물방울만큼이나 못다 핀 젊음이 서려 있었다.
어머니의 꿈은 여전히 사진가다. 섬의 일출·몰을 담고 싶다 하셨다. 죽기 전에 근사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고 싶다고도 하셨다. 풍경 사진가가 되겠다는 숙녀의 꿈은 두 아들 앞에서 바랬고, 절경을 담겠노라며 구입했던 첫 카메라는 수천 명의 얼굴만을 담고서 수명을 다했다.
요즘 어머니는 이십 년간의 방전을 끝마치고, 풍경 사진가로서 새로운 충전을 준비하고 계신다. 얼마 전 어안렌즈와 함께 카메라도 장만하셨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카메라의 데뷔전을 위해 울릉도행 배표 세 장을 예약했다. 노을 진 태평양을 바라보며 일몰을 담을 거라고 말하는 당신의 표정이 무척이나 설레 보인다. 나는 ‘매직아워가 지나고 어둠이 내리면, 모닥불 피워놓고 밀린 담소도 나눠야지’라고 다짐한다.
어머니가 이십 년간 이계임 사진관의 방조문을 올리셨던 것처럼, 이제 내가 사진가 이계임의 막을 올리며 말해 본다.
이계임 사진관이, 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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