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22. 11:30
이어폰을 잃어버렸다.
늘 이어폰을 넣어두던 코트 왼쪽 주머니가 허전하다는 걸 깨달은 것은, 터미널에서부터 시작한 발걸음이 경주 시내를 지나 대릉원에 다다를 무렵이었다. 걸어서 20분. 평소라면 이어폰을 끼고 흥얼거리며 왔을 거리이지만, 그날은 유독 그러지 않았다. 그럴 기분이 아니었고, 추적추적 비가 왔으니까. 우산을 쓰기도, 안 쓰기도 애매한 그런 비가. 그렇다고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우산은 없었다.
4년. 20대의 절반을 이어 온 대학 생활은 끝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끝으로 내몰릴수록 스스로 선택해야 할 것은 늘어만 갔다. 나에겐 좋은 선택을 내릴 자신이 없었다. 좋은 선택을 내리는 방법을 몰랐고, 무엇보다, 난 너무 지쳐 있었다. 재충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시린 겨울 뒤에, 따스한 봄기운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기도 하였다. 그래서 경주로 떠났다.
3월 초, 이른 봄의 경주는 생각보다 쌀쌀했다. 아직은 봄기운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경주를 재충전의 장소로 고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멀지 않고, 사람이 많지 않은 곳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평일의 경주는 그런 곳이었다. 다만, 버스에서 몸을 내리니 대릉원과 첨성대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곳으로 향했다. 그뿐이었다.
걸어서 20분. 이어폰을 찾아, 그 길을 거슬러 가 보기로 하였다. 대릉원에서 경주역, 경주역에서 성동시장. 길을 잘 몰라 삥 둘러온 그 길을, 다시 삥 둘러 되돌아갔다. 여전히 비가 내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우산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비를 맞으며, 머릿속으로는 저 멀리 반대편에서부터 기억을 되짚어 나갔다. 비가 오지도, 이어폰을 잃어버리지도 않았던 그 순간부터.
집을 나섰고, 지하철을 탔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며,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지하철은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곧장 내달렸고, 난 그곳에 몸을 내렸다. 지하철 계단을 오르니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오뎅 800원 / 떡볶이 3,000원」
터미널 한쪽 벽면을 따라, 오뎅과 떡볶이와, 더 많은 무언가를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여전히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비록, 가격은 조금 달라졌지만. 그리고 그 반대편에 매표소가 있었다. 그제야 이어폰을 빼곤, 창구로 다가갔다. 이어폰은 대충 돌돌 말아 욱여넣었다. 늘 넣어두던 코트 왼쪽 주머니에.
“경주 가는 버스표 한 장 주세요.”
카드를 내밀었다.
“5,400원입니다.”
카드는 버스표와 함께 돌아왔다. 4 ,000원 언저리를 맴돌던 버스표 값은 어느새 5 ,000원을 넘어서 있었다. 내가 가만히 머물러 있는 동안, 많은 것들이 자신의 값어치를 높이고 있었다. 오뎅도, 떡볶이도, 버스표도.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비가 올 것만 같았다. 잠시, 우산을 살까 생각했지만, 고민할 시간은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때마침 버스가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결국 우산은 사지 않았다. 그리고 버스, 아… 버스였구나!
평일 점심 무렵, 경주로 향하는 버스는 한적했다. 잠시 버스를 가득 채운 빈자리들을 둘러보다, 앞쪽도 뒤쪽도 아닌 어딘가, 창가 자리에 털썩- 앉았다. 빈자리는 많았고, 정해진 자리는 없었다. 앉을 자리를 고르는 것은, 내가 해야 할 그 어떤 선택보다 쉬웠다.
부산에서 경주까지 1시간. 잔잔한 노래를 들으며 가고 싶었다. 주머니를 뒤적이니, 이어폰은 여전히 그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주머니 속을 빠져 나온 이어폰은, 주머니 속에 들어가기 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 대충 돌돌 말아 넣었던 이어폰은, 주머니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대충 풀어버릴 수 없을 정도로 뒤엉켜있었다.
버스는 출발했지만, 노래는 흘러나오지 못했다. 꼬여버린 이어폰 가닥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애써 풀려 노력해 보았지만, 버스의 덜컹거림 속에서 꼬임은 되려 심해지는 것만 같았다. 짜증이 밀려왔다. 배배 꼬여있는 그 모습이 보기 싫었고, 그것조차 풀지 못한 채 헤매고 있는 내 모습이 처량했다.
“하….”
한숨을 푹 쉬곤, 반도 풀어내지 못한, 어쩌면 처음보다 더 꼬였을지도 모를 이어폰을 비어있는 옆자리에 휙- 하고 내팽개쳐 버렸다. 그것이 이어폰에 관한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것이 정말로 마지막 기억이라면, 지금 가고 있는 이 길 위에 이어폰은 없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되짚어가는 발걸음을 멈추지는 않았지만, 이어폰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은 저멀리 사라져 있었다. 자연스레 시선은 바닥에서부터 멀어져 갔다. 그보다 위를 향했고, 그보다 먼 곳을 향했다. 앞만 보며 갔을 때도, 바닥만 훑으며 되돌아 올 때도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이 보였다.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시야의 중턱쯤, 간판과 전깃줄과, 그 사이로 피어난 꽃들이 보이기도 하였다. 매화가 이제 막 피어나고 있었고, 그 옆에 목련이 만개해 있었다.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고은 시인의 시가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하였다. 짧지만, 그렇기에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있던 시가. 문득, 내가 왜 경주 거리를 헤매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또,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생각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았다.
걸음은 어느새 경주 터미널에 다다라 있었다. 이어폰은 찾지 못하였지만, 다른 무언가를 되찾은 느낌이었다. 시간은 훌쩍 흘러가 있었다. 20분을 간 그 길을, 1시간을 걸려 되돌아 왔으니까. 1시간 20분만에 돌아온 터미널의 풍경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버스에서 내릴 땐 보지 못하였던 것들이 터미널을 채우고 있었다. 황남빵을 파는 가게가 있었고, 그 옆으로 조그마한 슈퍼마켓도 있었다. 그리고, 오뎅이 있었다.
「오뎅 700원」
아직 부산의 것만큼 값어치를 올리지 못한 그 오뎅이 무척이나 정답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그것을 한 입 베어 물고 싶어졌다. 그러면 기분이 조금 더 나아질 것만 같았다. 지갑은 코트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 있었다. 그리고, 지갑을 꺼내기 위해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을 때, 지갑만이 있어야 할 그 공간 속에 다른 무언가가 함께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길고 가는 무언가가. 지갑을 꺼내어 들자, 그것 역시 뱀처럼 딸려 나왔다.
이어폰이었다. 배배 꼬여있던 이어폰은, 나도 모르는 사이 그 깊숙한 곳에 기어 들어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리고, 도저히 풀 수 없을 것만 같던 그 꼬임은, 주머니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어느 샌가 저절로 풀려 있었다. 그렇게 저절로 엉켜 버렸던 것처럼.
“하….”
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부산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첨성대와 대릉원이 보고 싶었고, 재충전이 필요했었지만, 이제는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은 가고, 꽃은 핀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것은 되찾았고, 도저히 풀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꼬임은 저절로 풀려 버렸다. 이어폰을 찾아 거슬러 온 그 길 위에서, 나는 충분히 충전되었다.
밖은 아직도 쌀쌀하고, 여전히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우산을 쓰기도, 안 쓰기도 애매한 그런 비가. 하지만, 그렇다고, 망설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우산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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