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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하논분화구'에서 만나는 5만 년 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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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0. 19. 17:07

온갖 작물이 가을 햇살 아래 익어가는 가을입니다. 쌀농사를 많이 짓는 우리나라에서 가을이면 논에 누렇게 익은 벼를 흔하게 볼 수 있는데요. 우리나라에서 논이 없는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 있죠. 바로 제주도입니다. 화산섬이라 비가 오면 물이 모두 땅으로 스며들어 교과서에도 논농사가 적합하지 않다고 나오죠. 이러한 이유로 제주도는 논이 아닌 밭에서 벼를 키운답니다!

그런데 제주에서도 논농사를 짓는 곳이 있습니다. 한반도 유일의 마르형 분화구 지형으로 ‘생태계의 타임캡슐’로 불리는 제주 하논분화구입니다. 5만 년 동안의 지구 생명 정보가 고스란히 담겼다는 하논분화구를 소개해 드릴게요.

 

 

백록담보다 큰 분화구   

하논분화구는 제주 서귀포시 호근동과 서홍동에 걸쳐있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 모양의 분화구입니다. 약 5만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동서 방향 1.8km, 남북방향 1.3km에 이르는 거대한 타원 모양으로 한라산 백록담보다 더 큽니다. 마르형 분화구는 화구 둘레가 둥근 꼴의 작은 언덕으로 둘러 쌓여 있는 화산으로 분화구가 지표보다 낮은 특징이 있습니다. 지표보다 낮으니 물이 잘 고이고 습지대가 발달할 수 있는 것이죠.

‘하논’이라는 이름도 크다는 뜻의 제주 사투리 ‘하’에 ‘논’이 합쳐진 말로 큰 논이라는 뜻입니다. 일찍부터 물이 고이는 분화구 내에서 논농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주민들이 이렇게 부른 것이죠. 올레길 7-1 코스 중 하나인 하논은 현재 논과 감귤 과수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거대한 호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하논분화구는 빙하기를 거치면서 천년에 30~40cm씩 퇴적물이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퇴적층이 쌓인 기간이 약 5만 년으로 이 기간 동안의 기후변화와 생태환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셈입니다. 

 

동북아 기후 및 고생물 분석과 미래 기후 예측 연구의 최적 장소인 이곳은 제주도의 ‘자연의 타입캡슐’로 지정되어 분화구 복원 및 보전 사업이 추진 중에 있습니다.

 


제주 유일의 황금빛 논이 있는 하논분화구  

하논분화구 탐방의 시작은 방문자센터입니다. 이곳에서 하논분화구 생성 역사와 생태학적 가치에 대해 자세한 해설을 들을 수 있는데요, 현재 코로나 상황으로 생태 해설은 중단된 상태입니다. 대신 전망대에서 하논분화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습니다. 가을에 오시면 제주 유일의 황금들판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방법을 통해 분화구 안을 직접 걸어볼 수 있습니다. 방문자센터에서 바로 연결된 계단으로 내려갈 수도 있고, 방문자센터 맞은편에 있는 호근마을에서 들어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방문자센터부터 하논분화구 아래 수로길까지 탐방을 하는데 넉넉히 1시간이면 충분해 아이들과 가볍게 걸어보기도 좋습니다.

호근마을 입구부터 출발하면 탐방로를 따라 꽤 많은 양의 물이 흐르는 수로를 만날 수 있는데요. 하천과 수로가 드문 제주도라서 좀 낯선 풍경입니다. 날이 좋으면 저 멀리 한라산도 볼 수 있고, 물길을 따라 다양한 수생식물과 개구리 같은 동물도 쉽게 관찰할 수 있어요.

 

하논분화구 탐방로를 조금만 걷다 보면 곧 노란 황금벌판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가을에만 볼 수 있는 장관이죠! 5만 년 시간의 생명 정보를 담은 귀중한 생태공간인 하논분화구는 오랫동안 제주에서 논농사가 가능한 유일한 땅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산듸’라고 하는 밭에서 키우는 벼도 많지 않으니 논벼는 더 귀했겠죠. 제주도민 중에는 아직도 벼를 직접 보지 못한 분들도 있습니다. 탐방로에서 만난 제주도민 중 한 분이 벼를 처음 본다며 신기해했는데요. 서울 사람이 감귤밭을 처음 보면 비슷한 느낌일 것 같습니다.

 

가을 햇살을 머금고 알알이 영글어가는 벼 이삭을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느낌이 듭니다. 

 

 

황금 들판의 비밀 ‘몰망수’

물이 빠지지 않는 퇴적층이라고 해도 농사 용수 공급이 어려우면 논농사는 불가능합니다. 곡창지 근처에 저수지를 만들고 관개 수로를 정비하는 이유죠. 하논분화구에서 벼농사가 가능한 이유는 바로 지하에서 샘솟는 용천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논분화구 한가운데 자리한 ‘몰망수’라고 불리는 용천수는 하루 최대 5,000리터 가량 솟아납니다. 제주 최대의 곡창지인 하논분화구는 일 년 내 마르지 않는 몰망수 덕분인 것이죠.

 

용천수는 인공수로를 따라 논 곳곳에 공급됩니다. 탐방로를 따라 쭉 이어진 수로는 5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물을 활용하고자 했던 조상들의 지혜와 수백 년 동안 이어온 친환경 공법을 볼 수 있습니다.

 

하논분화구 언덕 부근에는 마을과 감귤 농장이 오밀조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걷다 보면 봉림사라는 작은 사찰을 만나게 되는데 아름답게 가꿔져 있어 탐방객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숨 돌릴 겸 잠깐 휴식을 취하며 여유와 경치를 즐기기 좋은 곳입니다.

 

원래 이곳에는 성당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진처럼 표식만 남아 있는데요. 성당이 사라진 데는 제주도의 아픈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1900년대 설립된 하논성당은 한때 신도가 14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컸지만 지역 토착민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 갈등 속에 농민 봉기인 이재수의 난이 일어나는데 하논성당을 지은 구마슬 신부가 이재수 쪽과 연결되죠. 결국 난은 진압되지만 하논성당은 난리 속에 화재로 사라집니다. 하논성당이 자리 잡았던 하논 마을도 4.3 사건으로 토벌대에 의해 마을 전체가 소거되는 비극을 겪으며 잃어버린 마을이 됩니다.

지금까지 제주 하논분화구를 돌아봤는데요, 마르형 분화구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해 몰망수라는 지하수로 만든 인공수로와 제주도 유일의 논 그리고 하논 마을의 흥망성쇠까지 알찬 내용이 가득한 탐방이 됐습니다. 한반도 유일의 마르형 분화구와 제주도에서 희귀한 벼가 익어가는 모습이 궁금하다면 하논분화구에 꼭 한번 방문해보세요. 또한 아이들에게는 생태와 지질 탐방의 살아있는 교과서이자 가을날 꼭 어울리는 탐방길로 강추합니다! 흔히 알고 있는 제주도보다는 좀 더 생생한 삶이 녹아있는 제주도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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