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9. 09:44
취준생 심*애: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 아시나요? 저에게는 취업문이 그랬습니다. 그날도, 시원찮게 면접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죠. 그런데…
직장인 이*리: 푸릇푸릇 앳된 얼굴에 설렘으로 입사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수많은 시행착오와 역경을 겪으며 그렇게 익어가고 있었네요.
가장 황*용: 가족을 위해 희생만 하시던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허세를 부렸는데 아이가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니 저도 어른이 되고 그렇게 아버지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던 나날, 지친 줄도 모르게 지쳐 있던 그런 날. 시민들의 마음에 위로의 한 줄을 남기는 간판이 있습니다.
올해로 33년째 광화문 광장의 한자리를 지키며 우리네 마음을 다독이는 간판. EBS 지식채널e를 통해 광화문글판을 만나봅니다.
✅ 바쁜 당신을 위한 핵심 체크
✅ EBS 지식채널e에서 소개된 광화문글판
✅ 1991년부터 시대를 반영한 글귀 소개
✅ 시민 최애 광화문글판, 나태주 <풀꽃>
간판의 가치
글자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벽에 도료를 칠하고 그림을 그리거나, 상징적 물건을 두어 상점의 판매 상품을 표현했던 그리스·로마 시대. 이발사가 외과의사 노릇을 겸했던 당시 각각 동맥, 정맥, 붕대를 상징하는 빨강, 파랑, 하얀색의 삼색등을 내걸었던 이발소가 어쩌면 간판 역사의 시작이었을 겁니다.
1390년대 영국 상인들이 본격적으로 상업을 시작하면서 유행한 간판은 전기가 발명된 후, 형형색색의 빛을 발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기관이나 상점을 알리기 위한 상업적인 의미로 끊임없이 발전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광화문에 가면 어떤 상점을 알리기 위한 것도 아니고 상업적 홍보를 위한 것도 아닌 특별한 간판이 있습니다. 바로 광화문 교보빌딩에 부착된 '광화문글판'입니다.
1991년 교보생명 신용호 창립자의 제안으로 시작된 광화문글판은 우리네 삶과 시대를 담은 30자 내외의 짧은 글귀를 내걸어 간판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광화문 광장을 지나는 시민들의 눈에 들어온 광화문글판은 쓰러져가는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든든한 지지대로,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게 만드는 손편지로, 삶에 지친 순간 콧노래를 흥얼거리게 만드는 한 구절의 음악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광화문글판 변천사
초기의 광화문글판은 지금과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습니다. 1991년 처음 광화문글판에 걸린 문구는 ‘우리 모두 함께 뭉쳐/경제활력 다시 찾자’라는 표어였습니다. 이후 ‘아직도 늦지 않다/다시 뛰어 경제성장’(1993년), ‘훌륭한 결과는/훌륭한 시작에서 생긴다’(1994년)처럼 다소 계몽적이고 직설적인 격언들이 실렸습니다.
그러다 1998년 대한민국은 IMF 외환위기를 맞게 됩니다. 당시 대산 신용호 창립자는 축 처진 어깨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시민들에게 극복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고은 시인의 <낯선 곳>에서 발췌한 ‘떠나라 낯선 곳으로/그대 하루하루의/낡은 반복으로부터’ 시구처럼 여운 담긴 문학작품을 걸었습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사에 따라 다양한 변신을 시도하던 광화문글판은 2010년 여름, 가수 키비의 <자취일기> 노래 가사를 글판으로 소개하며 순수문학에 머물러 있던 틀을 또 한번 깨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100호를 맞은 2001년에는 글로벌 그룹 BTS가 직접 문안 제작에 참여해 오랜 팬데믹으로 지쳐 있던 사람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전해 화제가 됐습니다.
도심 속 한줄기 치유의 빛이 되어준 광화문글판
광화문글판이 전하는 선한 영향력은 학술계의 관심으로도 이어졌습니다. 동국대학교 이영림 조교수는 시민 설문조사를 통해 2021년 「시치료 관점에서 본 시민들의 광화문글판 에피소드에 나타난 은유」라는 논문을 썼는데요. 무려 3,108개 에피소드가 모였습니다.
이를 통해 논문은 광화문글판에 대한 시민들의 은유를 ‘길에서 만난 위로와 희망의 글귀를 통한 정서적 치유’ ‘자기성찰을 통해 지금 여기의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힘’으로 범주화할 수 있다고 소개합니다.
간판이라는 도심 속 흔한 구조물이 수많은 시민들에게 감동이자 치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눈 광화문글판은 한국의 사회적 시대상을 반영하는 광화문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초등 논술 4학년 교과서에 한 단원으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지난 22년 겨울 편의 주인공이었던 진은영 시인은 광화문글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으로 중요한 문, 고궁과 같은 곳에는 현판을 달아 의미 있는 글귀를 새기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광화문글판은 인본주의적인 전통을 현대적으로 새기는, 도시문화에 가장 멋지게 소화된 모습이지 않나 생각해요.
예술가들은 자신이 하나의 ‘상투어’를 발명하는 최초의 인물이 되고 싶다는 생각들을 해요. 처음 무언가 시작했을 때 그게 좋으면 사람들이 따라하게 되는데, 그게 문자라면 ‘상투어’가 되는 거죠. 그런 관점으로 광화문글판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면서 여기저기 비슷한 글판들이 생기는 현상을 발견하고 너무 흐뭇했습니다. 광화문 거리에서 아름다운 문학적 지혜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때문에 다른 곳들이 이를 흉내내는 것이라 생각했고, 더 많은 곳에서 이런 아름다운 글판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시민들이 가장 사랑한 광화문글판
그렇다면, 시민들에게 가장 사랑받은 글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총 1만 5,600명의 시민이 뽑은 1위 글판은 2012년 봄편으로 소개된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풀꽃>이 한번 탈락했던 문안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 내용처럼 다시 또 자세히, 오래 들여다봤을 때 더없이 따뜻한 의미를 찾을 수 있었고 비로소 광화문글판을 통해 시민들에게 가닿았습니다. 그 결과, 게재된 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글판으로 남았습니다.
▲위로가 필요한 날, 나에게 힘이 되었던 문장 리스트 (출처: 지식채널e 유튜브)
광화문을 지날 때면 한 번씩 하늘을 올려다보세요. 문득 고개를 들어 그곳을 보면,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여러분의 마음 한구석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글귀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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