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광화문글판

본문 제목

2023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대상 수상작 「식탁」

본문

2023. 5. 25. 15:45

우리 집에는 식탁이 없다. 식탁 없는 집이라는 건, 저녁이 되어도 마주앉지 않는 식구들이라는 뜻이다. 할머니는 거실에 놓인 일인용 탁자에서, 엄마는 안방 침대에서, 나는 내 방 책상에서, 우린 각기 다른 시간에 일 인분의 저녁상을 차린다.

부모님이 이혼한 뒤 우리 식구는 나, 엄마, 아빠에서 나, 엄마, 할머니가 되었다. 옛날에 엄마가 고등학생 때까지 할머니가 계모인 줄 알았었다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내 눈에도 엄마와 할머니는 신기하리만치 닮은 구석이 없는 모녀다. 엄마는 할머니가 걸레와 수건을 한 세탁기에 넣고 돌리는 것도, 음식 묻은 손으로 리모컨이며 냉장고 손잡이를 만지는 것도, 먹고 남은 음식들을 죄 한데 모아 보관하는 것도, 겪을 때마다 그런 일들을 난생 처음 겪는 사람처럼 질색하며 못 견뎌 했다.

“아, 엄마! 설거지 하지 말라니까!”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가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부아를 낸다. 할머니가 또 설거지거리에 손을 댄 모양이다. 소파에 앉아 일일드라마를 보던 할머니는 남의 일인 양 부엌 쪽을 흘긋 볼뿐 대답이 없다. 엄마는 찬장에서 갈린 과일 찌꺼기가 눌어붙은 컵과 기름때가 지워지다 만 그릇들을 도로 꺼내 큰소리가 나도록 싱크대에 넣고는, 앉은뱅이 소반에 저녁상을 차려 안방으로 가지고 들어간다.

엄마가 할머니에게 ‘설거지 금지령’을 내린 것은 몇 년 전이었다. 할머니가 설거지를 하면 지저분해서 꼭 두 번씩 손이 간다는 게 이유였다. 처음에는 별난 년 다 봤다며 못 들은 체하던 할머니도 엄마의 강경한 태도에 끝내 두 손을 들었다. 할머니가 마지못해 “안 한다, 안 해” 하고 승복하면서, 모녀의 설거지 논쟁은 막을 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할머니는 ‘설거지 조약’ 일주일 만에 태연히 다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수년째, 엄마는 할머니가 씻어 놓은 그릇들을 볼 때마다 불같이 화를 내고, 할머니는 그 불같은 성미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며칠이 지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릇들을 씻어 놓기를 반복해온 것이다.

얼마 전 일요일 오후였다. 평소처럼 부엌에서

“설거지 하지 말라니까!”

소리치는 엄마에게, 웬일인지 할머니도 왈칵 성을 냈다.

“그럼 나는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이야! 나쁜 기집애들.” 

할머니의 입에서 튀어나온 기집애‘들’이라는 말은 관중석에 앉아있던 나까지 일으켜 세웠다.

쌓여있던 감정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가장 못된 말들을 골라 주고받았다. 허공에서 말들이 뒤엉켜 서로를 할퀴고 때렸다. 아차, 하는 생각이 제동을 걸었을 땐 이미 세 사람 모두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할머니는 소리 내어 울었고, 엄마는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가 한참 뒤 벌게진 눈으로 돌아왔다. 진심이 아니라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센 것은 세 모녀의 몇 안 되는 공통점이었다. 며칠 간 냉랭한 기류가 이어졌다. 밥을 구실로 꾸역꾸역 마주앉을 일 같은 것도 없으니, 서로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긴 침묵이 깨진 건 금요일 저녁이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엄마가 말을 꺼냈다.

“아빠 보러 가자.”

할머니는 무심한 척 반색했다. 토요일 아침, 우리는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충청북도 산골의 어느 사찰로 향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모신 곳이었다. 가는 길에 엄마가 만든 유부초밥과 할머니가 깎아온 과일을 나누어 먹고, 내가 내려온 커피를 마셨다. 할머니가 휴대폰으로 좋아하는 트로트 가수의 노래를 틀었다. 엄마도 나도 아는 가요를 리메이크한 곡이었다. 우리는 바람을 맞으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렇게 소리치고 서로 헐뜯었던 게 아주 오래 전 일처럼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유골을 뿌린 오래된 나무 앞에 섰을 때, 할머니가 말했다.

“안 그래도 너희 아버지 보고 싶었는데, 고맙다.”

엄마는 한참을 말없이 나무 밑동만 바라봤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모르는 사이 할머니는 노인회관 컴퓨터 교실에서 가장 높은 반으로 진급했고, 엄마는 아침 명상을 시작했다고 했다. 나는 얼마 전부터 다니기 시작한 수영 강습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렇게 셋이 모여 서로의 일상을 묻는 게 얼마 만일까, 그런 적이 있기는 했던가, 생각했다.

절에 다녀온 다음날 오후, 엄마가 불쑥 거실 한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식탁 시켰어. 저기 두려고.”

할머니는 잠시 엄마를 바라보다 말했다.

“잘했네.”

나는 엄마가 가리킨 곳을 쳐다보았다. 창문 옆 널찍하게 비어있는 공간. 거기에 식탁을 두고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세 사람을 그려 보았다. 늘 기분 좋은 대화만 오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식탁엔 못마땅한 한숨과 날 선 말들, 벗어나고 싶은 순간들이 오르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매일 저녁 서로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함께 지지고 볶으며 삼 인분의 저녁상을 차려낼 것이다.

“무슨 색인데? 사진 봐봐.”

엄마 옆에 바싹 붙어 앉으며 내가 말했다. 식탁이 놓일 자리 위로 환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