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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된 사진, 그 너머의 진실 도로시아 랭의 <Migrant M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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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9. 16:30







사진은 숙명적으로 그림과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어요. 사진이 공인된 1839년 이래로 세계사를 장식하고 있는 잊을 수 없는 사진이미지들의 공통점은 “사진은 스스로 말한다”는 것이에요. 사진에 찍힌 사람, 공간, 사건은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죠.


롤랑 바르트는 ≪밝은 방≫에서 거듭 사진의 노에마(의식의 작용에 의하여 생각된 객관적인 대상 면을 이르는 말)는 ‘그것은 존재했음’이라고 설명하고 있어요. 로버트 카파가 스페인 내전에서 찍은 <쓰러지는 병사>는 이제 막 어디선가 날아든 총알을 맞고 쓰러지는 24세의 젊은 왕당파병사를 보여주면서 전쟁과 죽음이 다른 낱말이 아님을 통렬하게 전해주는 대표적 전쟁사진이 되었어요.

그러나 그 병사는 자신이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을 담은 사진이 이렇게 유명해졌을 거라고는 짐작할 틈도 없었을 것이에요. 또한 그가 죽음을 맞이한 그 스페인내전이 초기 단계부터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소련과 멕시코가 공화국 정부군을, 독일과 이탈리아가 반란군을 지원했으며, 내전이 아니라 사실상 국제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징후였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거예요.




은 도 알 수 없는 의 운



사진 속의 사람은 그 사진이 어떤 의미를 띠게 될지 알지 못해요. 미국 대공황의 아이콘이 된 이 한 장의 사진에서 우리는 사진 너머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을까요?



도로시아 랭의 <이주노동자 어머니>



도로시아 랭의 <이주노동자 어머니 (Migrant Mother)>는 1936년 3월 캘리포니아 니포모에서 딸을 데리고 배급권을 기다리는 32세 여성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에요. 전체 사진 중 여섯 번째 컷으로 이 컷에 이르러 배경이 완전히 배제되어 감정이 절제된 상태로 중첩적인 느낌을 줘요.


1929년 증시가 붕괴되면서 대공황을 맞이한 미국은 미국경제 전체가 긴 침체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남부 여러 주의 농민들은 재난의 최변방에서 허덕이고 있었답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재정착국(후에 농업안정국으로 바뀌었어요)의 한 분과에서 로이 스트라이커는 미국 농촌의 참상을 기록하는 사업을 벌였답니다.


도로시아 랭은 1935년부터 재정착국을 위해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1936년에 <이주노동자 어머니(Migrant Mother)>를 찍게 돼요. 이 사진은 농업안정국이 기록한 25만 장 가량의 사진 중에서 가장 유명해졌고, 미국 대공황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답니다.



<이주노동자 어머니(Migrant Mother)>로 유명한 마지막 6번째 컷을 찍기에 앞선 5컷. 

도로시아 랭은 먼 거리부터 사진을 찍으면서 천천히 클로즈업해 들어갔어요.



애초부터 이 사진은 그렇게 유명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해요. 도로시아 랭은 평소 알고 지내던 <샌프란시스코 뉴스> 지에 사진을 보냈고 3월, 그렇게 크지 않은 크기로 두 장의 사진이 지면에 실렸어요.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사진이 아닌 다른 컷이었답니다. 도로시아 랭은 캘리포니아 니포모의 ‘콩 수확 농민캠프’에서 이 어머니와 아이들을 보고 모두 6컷을 찍었어요. 유명해진 <이주노동자 어머니(Migrant Mother)>는 가장 가까이 접근하여 찍은 마지막 컷인데 그해 9월에 처음 다른 매체에 소개된 것이랍니다.


어쨌든 그 지역에서만 2,500여 명의 어른과 아이들이 굶주린다는 기사와 사진은 반향을 불러오기 시작했답니다. 대공황의 아이콘인 된 <이주노동자 어머니(Migrant Mother)>는 1941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면서 급속도로 신화가 됐고, 1955년 열린 <인간가족전>에 걸리면서 결정적으로 유명해졌답니다.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기획한 <인간가족전>은 이후 전 세계에서 순회 전시되어 900만 명 이상이 관람하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웠어요.


당시 민주당이 집권하던 미 연방정부의 후원으로 농업안정국의 이 기록 사업이 진행되었고, 사진의 사용권은 만인에게 무료로 열려 있었으니 이 사진은 날개 돋친 듯 전 미국과 세계를 날아다녔답니다.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전시되고 하버드나 프린스턴 등 전 미국의 대학을 순회했어요. 사진이 너무나 자주 걸리자 도로시아 랭이 불평을 터뜨리기도 했다고 해요.




신화가 된 사진이 남긴 역설



<도로시아 랭>



사진을 찍은 도로시아 랭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한 장 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답니다. 미국의 사진비평가 비키 골드버그의 명저 ≪사진의 힘(The Power of Photography)≫에 따르면 도로시아 랭은 “나는 이 한 장만으로 유명한 사진가가 아닌데도 사람들이 그렇게 기억한다.”며 불평했고, “사진의 어머니는 이제 많은 사람들의 심벌이 되었다. 이 사진은 그 어머니의 사진이지 나의 것이 아니다.”라고도 했다고 해요.

어쨌든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떠올리게 하는, 인간의 고뇌를 느끼게 하는 이 한 장의 사진은 결국 신화가 됐답니다. 전 미국이 그 사진을 보면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한다는 드라마를 만드는데 성공한 미국 연방정부로서는 대만족이었을 것이에요.


그렇다면 사진에 찍힌 어머니와 아이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연방정부가 긴급 지원한 식량이 도착할 무렵에 어머니와 아이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했고, 그 가족의 신원과 근황이 알려진 것은 무려 40여 년이 지난 1970년대 후반이었답니다.

그녀의 이름은 플로렌스 오웬스 톰슨이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재혼할 때까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해요. 플로렌스는 단 한번도 <이주노동자 어머니(Migrant Mother)> 사진을 좋아한 적이 없었고, 가족들은 수치심을 느끼며 지내왔다고 해요. 플로렌스는 “나는 그때 사진을 찍히지 않고 싶었다. 난 (그 사진으로) 단 한 푼을 받은 적이 없다.”라고 1978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어요.


1983년 암에 걸린 플로렌스를 위한 모금운동이 벌어져 2만 5,000달러의 성금과 2,000여 통의 격려편지가 가족들에게 전해졌는데, 그 전까지 <이주노동자 어머니(Migrant Mother)> 사진은 그들 가족에겐 ‘하나의 저주’였답니다. 한 달 뒤 플로렌스는 세상을 떴어요. 그런데 플로렌스나 1965년에 이미 세상을 뜬 도로시아 랭이 절대로 짐작하지 못했을 일이 그로부터 한참 후에 벌어졌답니다.

2005년 소더비 경매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구매자에게 대공황의 초상인 <이주노동자 어머니(Migrant Mother)> 사진을 포함한 32장의 도로시아 랭 빈티지 사진이 30만 달러에 팔려나간 것이에요. 어떤 한 장의 사진은 그 자체가 역사의 증명으로 남고 신화로 포장되어 후세에 길이 전해지기도 해요. 다시 돌아와 “사진은 스스로 말한다.” 그러나 결코 숨어있는 이야기는 스스로 드러나지 않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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