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뉴스룸

본문 제목

3·1운동 100년을 기억하는 민족 기업의 시작

본문

2019. 2. 28. 13:52

천일독서, 무학, 민족자본, 독립운동, 교육…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을 후원한 많은 기업들 중 교보생명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의 가계 때문인데요, 특히 신회장의 아버지인 대산 신용호 선생의 일대기는 일제치하 역동의 우리 근현대사를 보여주는 그야말로 드라마 그 자체입니다. 독립운동의 길을 걸으며 민족자본 형성과 인재양성에 힘을 쏟은 대산의 삶의 흔적, 지금부터 소개해드릴게요. 


# 가족의 독립 운동 정신을 새긴 대산 

신용호 선생은 음력 1917년 8월 11일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에서 신예범 선생의 여섯 아들 중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지역에 명망있는 선비가에서 태어나 유복한 생활을 했을 것 같지만 실은 반대입니다. 때가 일제치하였기 때문이죠. 

아버지 신예범 선생은 학생들을 위해 야학을 열고 소작쟁의에 앞장섰고, 부친의 영향을 받은 맏아들 신용국 선생도 소작쟁의 농민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가족이 앞장서서 일본의 식민 통치에 저항했으니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었죠. 7년간의 옥살이에도 꺾이지 않은 아버지의 항일 정신 덕분에 신용호 선생은 아버지를 일년에 한 두번 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더욱이 신용호 선생은 여덟 살 무렵 폐병을 앓아 지금의 초등학교인 ‘보통학교’에 입학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련들은 오히려 그를 더 단단하게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아버지와 형의 항일운동은 가슴 속에 독립과 민족을 생각하는 큰 뜻을, 병은 그만의 공부법을 익히게 해 줬습니다. 어머니의 정성으로 병이 호전되자, 신용호 선생은 ‘이우당(二友堂)’을 드나들며 3년 동안 ‘천일 독서’를 통해 세상에 나갈 큰 뜻을 키웠죠. 전남 문화재사료 247호인 이우당은 대산의 13대조인 신후경 선생이 지은 건물로 한석봉이 공부한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청년시절의 신용호, 사진출처 _ 신용호 평전 『맨 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고』


# “큰 사업가가 돼, 독립운동 자금을 만들겠습니다.”


천일 독서를 끝낸 후 서울로 온 대산은 문학평론가이자 독립운동가 신갑범 선생을 찾습니다. 아버지 신예범 선생과 서신을 주고받던 친척인 신갑범 선생은 무학에 빈털터리인 대산의 일본어 실력과 서울을 둘러본 소감을 들으며 그의 비범함을 간파합니다. 대산은 이를 시작으로 청마 이육사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을 두루 만납니다. 특히 이육사와의 만남은 대산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데 그와의 만남을 통해 청년 대산은 그 동안 품어온 큰 다짐을 꺼냅니다. “큰 사업가가 돼, 독립운동 자금을 만들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육사는 “모쪼록 대사업가가 되어 헐벗은 동포들을 구제하는 민족자본가가 되길 바라네”라며 격려했죠.

대산이 교보생명을 창립하며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형성’으로 결정한 배경에는 이육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한 결과물인 셈입니다. 

1936년 중국으로 갈 마음을 굳힌 대산은 신갑범 선생의 일본인 친구가 운영하는 중국 다롄 후지다 상사에서 일을 시작합니다. 이 곳에서 대산은 판매 능력에 따라 직원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비례급 판매사원 제도’를 창안해 회사 수익을 올리는 등 능력을 인정받아 도매점 운영까지 맡게 됩니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것을 넘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것이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대산은 만주로 향했습니다. 하얼빈, 무단장, 지무스 그리고 칭다오, 난징, 쑤저우 등 중국 각지를 돌며 시야를 넓힌 후 베이징에 북일공사(北一公社)’라는 곡물회사를 설립해, 다시 한번 성공신화를 만듭니다. 그리고 대산은 동포를 위해 큰 결정을 합니다. 일본의 패망으로 귀국을 준비하는 동포들이 늘자 제2귀국부 단장을 맡으며 당시 화폐로 1인당 4만원씩 들어가는 귀국자금을 지원한 것이죠. 이 결정으로 대산은 벌었던 돈은 모두 사용하고, 자신도 1946년 5월에 귀국길에 오릅니다. 

 

왼쪽부터 신용원(셋째형)·대산 신용호(가운데)·신용복(넷째형) 선생의 젊은 시절


귀국 후 대산은 ‘여운형 선생 투쟁사’라는 책을 출간하며 출판사업을 시작해 18쇄 인쇄까지 이룹니다. 요즘 말로하면 ‘대박’인 셈이죠. 하지만 판매 수금이 잘 되지 않아 출판인의 꿈을 접습니다. 곧 이어 방직사업을 시작해 이 또한 성장을 거듭하지만 6.25 전쟁으로 원점에 서게 됩니다.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대산은 포기하지 않았고, 전쟁 후 ‘교육 사업’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대한교육보험주식회사(지금의 교보생명) 입니다. 


교보생명의 전신인 대한교육보험주식회사의 창립 초기 사옥 전경


대산의 창업철학은 교육보험, 교보문고, 교보교육재단, 대산문화재단, 대산농촌재단 등을 통해 국민교육진흥 구현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교보문고 설립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데요, 서울 중심가에 책방을 놓자는 말에 반대하던 임원진을 대산은 이렇게 설득합니다. 

“적자가 나더라도 우리 회사가 꼭 해야 하는 사업입니다. 청소년들을 학교에서 가르쳐 사회에 내보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닙니다. 사회에 나와서도 계속 책을 읽고 폭넓은 지식을 흡수하여 인격을 높이고 능력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한 교보문고는 지금은 연간 5천만 명이 방문하는 ‘국민책방’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국빈들이 꼭 거쳐가는 대표적 명소이자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드는’ 문화교육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1982년 교보문고 내부(왼쪽)과 2015년 새롭게 단장한 교보문고 내부(오른쪽)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