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6. 18. 15:31
옆집은 되고 우리 집은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늘 궁금했다. 우리 집과 같은 처마를 이고 사는 옆집에는 해마다 봄이면 제비가 날아들었다. 나는 둥지가 될 만한 틀을 만들어 처마 밑에 달았다. 제비는 다음 해에도 옆집으로 날아들었다. ‘흥부와 놀부’ 민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제비는 내가 사는 곳에서 행운의 상징이었고 제비가 드는 집에 행운이 깃든다고 다들 믿었다.
놀부처럼 강제로 제비를 데려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비가 든 집들을 보면 부러웠고 시샘이 났다. 제비를 만지면 ‘죄’를 탄다는 말도 있어서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제비를 싫어했다.
내가 살았던 곳에서는 사람도 제비가 될 수 있었다. 꽃제비. 공산 배급의 국가에서 ‘고난의 행군’으로 명한 경제난의 시기, 배급이 끊긴 일명 ‘미공급’ 시기에는 멀쩡한 사람도 한순간에 꽃제비가 될 수 있었다. 아이에게 하루 한 끼조차 먹일 능력이 안 되는 부모들은 목을 매달거나 스스로 아사했다. 여성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중국 땅을 향해 도강했고 아이들은 고스란히 저주의 땅에 남아 장마당이나 기차역을 떠도는 꽃제비가 되었다.
내가 만난 유명한 꽃제비의 나이는 네 살... 세상에 난 지 겨우 삼 년이 된 아이였다.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T자형으로 트인 골목이 있었는데 아이는 방석도 없이 늘 그곳에 앉아 있었다. 장마당에서 흔히 보는 꽃제비와 사뭇 달랐다. 아이는 영양실조로 두 다리가 있음에도 걷지 못했다. 십 킬로도 되나마나 한 꽃제비의 몸. 그 몸을 지탱할 근육조차 아이의 다리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어른들은 어차피 죽을 아이라고, 그냥 두라고 했다. 있는 집의 아이들은 그 꽃제비가 신기해서 자주 아이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가끔 아이의 손에 작은 간식거리를 쥐여주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제비가 싫었다. 꽃제비는 더 싫었다. 장마당에서 장사꾼들의 물건을 훔치고 가정집을 털었으며 기차에서는 소매치기 하는 꽃제비가 너무 싫었다. 장마당에서 분식을 사 먹을 때면 먼저 주변에 꽃제비가 없는지 살핀 다음에 먹으라고 어머니는 내게 말했다.
그해 나는 그 아이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아이 앞에 다가가면 무슨 기계처럼 아이는 손을 내밀었다. 사람의 손이라기보다 깡마른 나뭇가지의 형상에 가까웠던 아이의 손. 꽃제비 주위에 모인 다른 아이 중에는 일부러 먹거리를 가져와서 그 아이 앞에서 먹는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친구란 무엇인지, 소꿉놀이가 무엇인지, 심지어 부모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아이의 눈에는 원망도 없고, 희망도 없고, 삶에 대한 동기도 없었다. 아이의 눈은 텅 비어있었다.
여덟 살 되든 해 우리 집의 살림은 하루 세 끼를 먹을 만큼 나아졌다. 그전까지 나의 부모님은 돼지가 먹는 술 죽을 드셨고 토끼가 먹는 풀을 가져다 국수에 섞어 먹으면서 연명해 오셨다. 그러다 아버지는 보수가 없는 직장을 그만두고 양봉업을 시작했고 어머니는 수해에 떠내려간 가축 업을 그만두고 청진과 연사를 오가는 도매업을 시작했다. 다행히 나는 꽃제비의 삶과는 멀어질 수 있었다.
살림이 나아지고 내게 하루마다 간식이 생겼는데 그것은 ‘까마치’였다. 꽃제비가 실제 제비와 아무 연관이 없는 것처럼 ‘까마치’의 어원도 까마귀나 까치와는 아무 연관이 없었다. ‘까마치’는 누룽지의 방언이었다. 나는 늘 그 ‘까마치’를 눈덩이를 빚듯 동그랗게 빚어서 들고 다니며 먹었다.
어느 날 나는 ‘까마치’를 들고 아이 앞을 지나게 되었다. 이제 나는 꽃제비를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부잣집 아이들보다 항상 내가 제일 불쌍한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날만큼은 그 아이가 너무 불쌍했다. 나는 들고 있던 ‘까마치’를 아이에게 내밀었다. 아이는 말없이 ‘까마치’를 받아들고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아이는 ‘까마치’를 먹지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시간이 지나면 ‘까마치’는 딱딱해질 것이고 이빨이 제대로 나지 않은 아이가 씹기에는 힘들 거라는 생각의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어머니한테 줄 거니?”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 없니?”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
“어머니는 살아 있니?”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
“어머니 널 두고 도망갔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까마치’ 아버지한테 줄 거니?” 아이는 잠깐 망설이더니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어린 마음에 눈물이 왈칵 났다. 아버지를 향한 아이의 효심에 감동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먹고살기 힘든 부모는 아이에게 말을 가르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아이의 언어가 손을 내미는 것-먹을 거 좀 주세요, 고개를 숙이는 것-고맙습니다, 고개를 가로젓는 것-아니요, 고개를 끄덕이는 것-예, 뿐이라는 것이 매우 안타까웠다.
아이의 아버지는 걸을 수 없는 아이를 둘러메고 나가 아침마다 이곳에 아이를 두었다. 저녁이 되면 아버지는 아이를 다시 메고 집으로 들어갔다. 오늘 저녁에는 아이가 내미는 “까마치”를 냉큼 먹어 치울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하니 아이의 아버지가 제비보다 더 싫어졌다.
다음 해 아이는 더 보이지 않았다. 아이의 생사를 알 길이 없었다. 그 아이는 내가 싫어하지 않은 처음이자 마지막 꽃제비였다. 그 이후로도 나는 줄곧 꽃제비를 싫어했다. 그들이 사람의 물건을 훔쳐서이거나 더러워서가 아니었다. 나도 꽃제비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우리 집에는 끝내 제비가 들지 않았다. 몇 해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또 몇 해 후 어머니는 나를 두고 두만강을 건넜다. 나는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다행히 할머니가 나를 맡았으므로 꽃제비까지는 아니었지만. 먼 친척이 어느 날 나에게 “넌 할머니 돌아가시면 꽃제비겠네.”라고 했을 때 침묵할 수 없었던 나. 그날 나는 희망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니다 어느 날 기차에서 마주친 꽃제비의 얼굴에서 탈북의 동기를 얻으셨던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님과는 다르게 나는 어린 꽃제비의 얼굴에서 나의 무덤을 보았다. 나는 무덤에 묻히지 못한 채 그곳을 나왔다. 옛 공동묘지 자리에 세웠다는 우리 집에 지금은 처마 아래 제비가 날아드는 지 몹시 궁금한 밤. 그 아이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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