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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우수상 - (발신자) 하수구에서 살았던 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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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 23. 17:53

발신자 : 하수구에 살았던 인어


   안녕, 오랜만이다. 나는 원래 푸릇푸릇한 봄이 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을 건네듯 편지를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이번 봄에는 2년 전 추운 겨울에 헤어진 오빠에게 다시 편지를 쓰려니 참 어색하다. 더구나 너는 꽃을 꺾듯 내 오른쪽 발목을 부러트린 사람이었으니까. 그치?

   하지만 나는 일산병원 병상에 누워서 이제 다시는 오래 걸을 수 없을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던 날에 대해 말하고 싶어. 그때 엄마는 결국 눈물을 터트리셨고, 나는 담담하게 평생의 꿈이었던 세계 일주가 물거품으로 되어 증발하는 걸 보고 있었지. 그때 너는 나를 때리던 그 투박한 손으로 내 다리 위에 손을 얹은 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의사를 마주 보고 있었잖아. 늘 그렇듯이 나의 보호자인 것처럼 말이야.

  그때는 누구도 알지 못했지. 내가 술에 취해 혼자 계단에서 구른 게 아니라, 너에게서 도망치다가 넘어진 것이라는 걸. 복숭아뼈가 골절돼서 부주상골이 주상골로부터 아예 떨어져 나간 순간이 정말 계단에서 굴렀을 때인지, 네가 발로 세게 짓밟았을 때인지 말이야. 자신의 허락 없이 국토대장정 대외활동을 신청했다는 이유만으로 화가 난 네가 나를 집안으로 끌고 가서는 감금해두었던 날들. 아예 걷지도 못했던 퇴원 날, 듬직한 애인처럼 나를 부축해서 데리고 나갔던 너는 사실 데이트폭력 가해자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그게 뭔지도 몰랐어.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한 걸까. 나는 이 질문을 참 오랫동안 곱씹으며 살았어. 주위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손을 뻗었을 때 그들이 꺼내든 칼이 어느 순간 나를 향해 있기도 했거든. 왜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했어? 왜 그 사람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어? 왜 그렇게 멍청하게, 당했어?

  하지만 나는 네가 저지른 폭력의 책임을 대신 지고 칼을 맞을 생각이 없어. 너를 만났을 즈음의 어린 나는 멍청하기보다 참 용기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지. 글과 사람을 사랑해서 예고를 졸업한 뒤 대학에서도 글만 쓰는 모범생이었던 나는 사실 밤마다 세계여행기를 읽으며 모험을 꿈꾸곤 했잖아. 성인이 돼서 돈을 모으면 넓은 세계로 헤엄쳐나가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글을 쓰려고 했어. 너도 알다시피 갓 대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세계인들과 대화하기 위해 영어 회화를 공부하고, 스페인의 축제에서 춤을 추고 싶어서 댄스스포츠 교양강의도 들었지. 또 스위스의 튠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싶어서 자취하던 동네 문화센터에 등록도 했잖아. 그 모든 출발을 네가 막아서지만 않았어도, 나는 몽골의 푸른 초원을 달릴 수 있었을 거야. 멀쩡한 두 다리로 말이지.

    매일 아침 7시에 열리는 수영강습에는 새 수강생이라며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체육학부인 네가 들어왔지. 내 또래의 사람이 들어와서 참 반가웠어. 너는 또 그렇게 아주머니들께 살갑게 굴면서도 말주변까지 좋았잖아. 친화력이 좋은 너와 친해지고부터 내 샌드위치도 늘 직접 싸다 줘서 수영강습이 끝나면 센터 앞 공원 벤치에서 같이 먹었지. 늘 사람 좋은 웃음을 띤 너는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다녔어.

    언젠가부터 너는 늘 입버릇처럼 나처럼 참하고 똑똑한 사람은 처음 본다며 그렇게 쫓아다녔잖아. 도시락을 싸서 도서관 앞에서 기다리고, 학회 술자리가 끝나면 데리러 오고, 자취방의 보일러가 고장 나거나 새벽에 누가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른다고 걱정하면 네가 고민 없이 달려왔어. 너는 고맙다는 말에 오히려 도울 수 있게 해줘서 자신이 고맙다며, 입가의 보조개가 예쁘게 피도록 활짝 웃던 사람이었지. 그래서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믿었어. 그것이 낚싯바늘에 꼬인 사랑 모양의 찌라는 것을 누가 알 수 있었겠어.

   너는 사랑을 가장한 미끼로 나를 하수구에 잡아넣기 위해 2년이라는 세월을 공들였지. 늘 나를 우선으로 생각하고 화를 내기는커녕 어떻게 더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까 고민만 하는 사람인 척했어. 나는 물론 내 친구들과 가족들 모두 너를 사랑하고 신뢰했지. 너는 대체 무슨 복이 많아서 저런 남자를 만났냐, 부럽다, 부러워. 모두가 그렇게 너의 대형 사기극에 속아 넘어간 거야.

    그런 네가 처음으로 신촌의 한 노래방에서 나를 벽에 밀쳐버렸을 때 나는 그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더라. 처음 보는 네 살기 띤 얼굴이 너무 무서웠고 어느 폭력에 대한 글에서 본 상황을 겪어본 게 처음이라 정말 혼란스러웠어. 그런데 다음날이 되자 네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울면서 내게 찾아와 빌었잖아. 죽을죄를 지었다고, 내가 오빠의 마음을 속상하게만 하지 않았으면 절대 그런 일은 없었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너는 뱀처럼 교묘하게 폭력의 이유를 나에게 전가했어. 하지만 이미 혼란에 빠져있던 그 당시의 내게 신뢰할 수 있는 판단지표는 오직 2년간 봐 온 네 사랑뿐이었지. 너는 늘 웃는 사람이니까, 네 말대로 이번엔 내가 조심하지 못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던 거다. 실수니까 한 번만, 한 번만, 하면서 화내는 네 얼굴에 다시 행복한 웃음을 꽃피우고 우리의 세계를 순환시키기 위해 노력했어. 지금껏 살아온 세계는 고통과 행복이 공존하는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끝내 그럴 수 없었지. 네가 준 건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었으니까. 그곳은 고통과 행복이 순환하지 않는 하수구의 세계였을 뿐이었으니까.

    사랑을 위한 희생은 용기 있고 숭고한 행위라고 생각해. 나는 너를 믿었고 사랑을 믿었어. 그래서 속상한 얼굴로 다른 남자와 대화를 하는 영어 회화는 그만두고 너랑 했으면 좋겠다는 요구를 들어줬지. 춤을 잘 추는 여자는 바람기가 많아진다면서 도서관에서 책만 읽으면 자신이 행복할 것 같다고 말해서 그것도 희생했어. 내 맨살을 자기도 아닌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것만 생각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난다는 말에 수영도 그만두었지. 종국에는 10분도 채 걷지 못하도록 내 발목을 부러트렸을 때도 너는 요구만 했지. 이제 오래 걷지도 못하니까 세계여행을 간다는 말은 그만두고, 빨리 결혼해서 살자고. 자기가 다 책임지겠다고 말이야.

    봄에 태어나 늘 싱그러운 향을 곁에 뒀던 내 세계에서 언젠가부터 비린내가 나기 시작했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네게 잡혀버린 내 세계가 다른 곳으로 흐르지 못해 하수구의 고인 물처럼 썩어가고 있더라. 퇴원한 뒤 본가에 내려가서 지내며 너와 떨어지자 이제야 하수구에 갇힌 내 모습이 보이는 거야. 이제는 평생 세계 곳곳을 걸어 다니지 못하고 너 말고는 다른 사람들과도 만나지 못한 채 하수구의 고인 물처럼 부패해갈 미래가 두려웠어. 생의 이유를 빼앗긴 두려움,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하찮게 들리더라. 밥을 먹을 수가 없었어. 3주간 매일매일 토하다가 언젠가 엄마가 만든 닭도리탕을 토해버렸거든. 변기통을 붙잡고 토하는 내내 엄마가 내 등을 둥글게, 둥글게 쓸어주더라. 다 토하고 나니까 변기에 가득 담긴 피처럼 붉은 내 세계가 부패한 냄새를 뿜어내고 있더라.

    그때 엄마가 괜찮아, 내 딸 다 괜찮다, 하면서 변기 물을 내려줬어. 더러운 물이 빠져나가고 새로운 물이 채워졌지. 구역질나는 냄새가 나지 않았어. 그 깨끗한 물을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터지더라. 나는 그대로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서 하수구 냄새가 나는 바닥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어. 엄마는 한참을 내 등을 둥글게 토닥여줬지. 내 탓이 아니라고. 다 괜찮다고. 이제 행복해질 거라고.

    나는 아직도 내 등에 새겨져 있는 그 동그라미를 기억해. 살기 위해서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너라는 세계에 대해 고백했던 그 날을 기억해. 내 세계를 하수구에서 꺼내어 다시 행복으로 가득 찰 수 있도록 순환시켜준 희망을 기억해.

    시침이 쉴 새 없이 원을 그리며 순환하듯 결국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삶을 헤엄치다 보면 나무에 핀 꽃잎이 져도 다시 나는 법이지. 누군가의 세계가 순환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거야. 네가 그 순환을 막으려 들었을 때 내 마음은 하수구의 고인 물처럼 썩어갔지만, 다시 시간이 흐르며 내 세계는 깨끗하게 정화되었어. 나는 네게서 벗어난 뒤 친구들과 수영을 배우고 가족들과 보라카이와 같은 휴양지로 여행을 가서 자유롭게 수영을 하며 살아. 봤지? 아무리 네가 발버둥 쳤어도 결국 앞으로 내 세계에는 다시 계속 꽃이 피고 싱그럽게 행복해질 거라는 사실을. 네 하수구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삶은 순환하는 법이니까 말이야.

*본 게시물은 2020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수상작으로 상업적 용도의 사용, 무단전제, 불법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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