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족꿈사랑

위대한 무표정, 버스터 키튼

 

l 버스터 키튼ㅣ

 

 

 

 

 

 

 

버스터 키튼 - 전설의 시작

  

 

 

1895년, 미국 캔사스주 피쿠아(Piqua)의 보드빌쇼(Vaudeville Show) 단원이던 부부 사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나요. 생후 6개월에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도 상처 하나 없이 말짱했을 만큼 몸이 유연했던 이 아이의 이름은 조셉 프랭크 키튼(Joseph Frank Keaton)이었습니다.

 

'보드빌쇼'는 한 무대에서 연극과 노래, 곡예, 마술 등이 번갈아 상연되는 일종의 '버라이어티 쇼'인데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미국에서 각광 받았던 대중적 엔터테인먼트의 한 형태였어요. 오늘날의 영화 상영방식도 사실은 이 보드빌쇼에서 각종 공연들이 펼쳐지는 중간중간에 당시로서는 “신기한 볼거리”였던 영화를 틀어주기 시작했던 데서 유래된 것이죠.

 


 

 

3세 무렵(좌) / 부모와 함께 무대에 선 버스터 키튼(우)

 

[출처: doctormacro.com] 

 

 

부모를 따라 어린 키튼도 보드빌쇼에서 스턴트 연기를 시작합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키튼 가족이 펼쳤던 스턴트는 극도로 위험한 것들이었다고 해요. 5살 무렵에 이미 보드빌쇼의 스타로 성장한 그를 인상 깊게 지켜본 마술사 해리 후디니(Harry Houdini)가 “버스터(Buster)”라는 별명을 붙여 주면서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의 전설이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전설은 언제나 고난 속에서 피어나기 마련이죠. 보드빌쇼는 쇠락을 거듭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폐인이 되다시피 합니다. 그러던 중 역시 보드빌쇼 출신이면서 “뚱뚱이(Fatty)”란 애칭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던 희극배우 로스코 아버클(Roscoe Arbuckle)의 눈에 띄어 23살의 나이에 단편 <푸줏간 소년 The Butcher Boy>(1917)으로 데뷔하게 되죠. 아버클은 후에 살인사건 스캔들 등에 휘말리며 몰락하는 비운의 인물이지만 재능을 알아보는 안목만큼은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
 

 

버스터 키튼 – 위대한 무표정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키튼은 아버클이 제작한 약 15편의 중단편 영화들에 출연합니다, 이후 육군에 입대해 10개월간 프랑스에서 복무한 후 복귀해 <바보 The Saphead>(1920)로 첫 장편영화 주연을 맡으면서 명실상부한 스타로 부상하게 되죠.

 

1921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프로덕션을 설립해 스스로 각본, 감독, 주연을 맡으며 1928년까지 약 20편의 단편과 12편의 장편영화를 제작해요. 전성기였던 이 짧은 기간 동안 그는 <우리들의 환대 Our Hospitality>(1923), <셜록 주니어 Sherlock jr.>(1924), <항해자 The Navigator>(1924), <서부로 Go West>(1925), <제너럴 The General>(1926), <증기선 빌 주니어 Steamboat Bill Jr.>(1928) 등의 대표작들에 출연합니다.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양대 코미디 배우로 찰리 채플린과 함께 버스터 키튼을 꼽도록 해준, 하나 같이 전설적인 작품들이죠.


 

 

<사랑의 둥지 The Love Nest>(1923)

 

[출처: doctormacro.com]

 

무성영화 시대의 배우들은 기본적으로 육성으로 대사를 전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극중 배역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다소 과장되고 정형화된 몸짓을 취할 수 밖에 없었어요. 고뇌하는 인물을 표현하려면 두 손으로 이마를 부여 잡고 전전긍긍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러나 코미디 영화는 이런 정형화된 연기보다는 다양한 표정과 몸 전체를 이용한 슬랩스틱 유머로 관객의 웃음을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버스터 키튼에 비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의 콧수염, 우스꽝스러운 옷차림, 뒤뚱대는 걸음걸이, 판토마임을 하는 듯한 동작 등을 떠올리면 그 시절 코미디 배우들의 덕목이 무엇이었는지 이해가 되실 거예요.

 

따라서 무성영화 시대의 코미디 배우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몸을 잘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어야 했어요. 천부적 재능과 어릴 때부터의 훈련 덕에 버스터 키튼은 몸을 다루는 데는 자신이 있었죠. 여기에 키튼 자신이 덧붙인 그만의 트레이드 마크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특유의 무표정을 잃지 않아요. 예를 들어 1928년작 <증기선 빌 주니어>의 폭풍 시퀀스에서는 2층에 조그마한 창문 하나가 뚫려 있는 건물의 벽이 통째로 그가 서있는 방향으로 넘어져 버리죠. 하지만 건물의 창문 사이로 몸이 통과하면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키튼은 아무일 없다는 듯 주위를 휘휘 둘러보고는 곧 다른 곳으로 뛰어가 예의 몸을 내던져 구르고 넘어지는 아크로바틱 연기를 선사합니다.

 


 

 

<증기선 빌 주니어 Steamboat Bill Jr.>(1928) 중의 한 장면

 

[출처: IMDb.com]

 

이런 위험천만한 스턴트를 어떤 대역이나 특수효과 없이 맨몸으로 해내면서도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이었기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그만의 페르소나(Persona)가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후세의 영화인들이 버스터 키튼을 “위대한 무표정(The Great Stone Face)”으로 지칭하며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을 온몸으로 사유했던 위대한 배우로 추앙하는 이유인 것이죠.

 

버스터 키튼 – 영락(榮落) 그리고 복권(復權)

 

버스터 키튼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당시는 ‘무성(無聲)영화’의 시대였습니다. 화면 속의 움직이는 영상과 함께 실시간으로 대사∙음향∙음악이 관객에게 전달된 건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싱어 The Jazz Singer>(1927) 이후의 일이고, 1930년대에 이르러 유성영화가 대중적으로 널리 보급되면서 소위 헐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Hollywood Studio System)의 발전으로 이어지죠. 물론 유성영화 이전의 무성영화들도 변사(辯士)의 설명과 자막으로 대사를 전달하고, 오케스트라의 연주나 미리 녹음한 레코드를 함께 틀어주는 방식으로 음악과 효과음을 제공하긴 했지만요.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들 역시 이런 시대의 변화 앞에 선택의 기로에 설 수 밖에 없었답니다. 상당수의 배우들이 새롭게 도입된 유성영화에 적응하지 못해 도태되고 말았죠. 불행히도 버스터 키튼도 여기에 속하게 됐어요. 트레이드 마크인 무표정의 아우라를 이어나가기엔 그의 음성이 너무 어둡고 탁했던 때문이라고 해요. 거대 제작사 MGM과 계약한 후 처음으로 제작한 <카메라맨 The Cameraman>(1928) 이후, 스튜디오 시스템 속에서 창의적 통제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그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고, 여기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지나치게 술을 마시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MGM은 그를 더 이상 중요한 역할에 기용하지 않게 되죠. 결국 그는 이류영화들에 출연하면서 코미디 영화 작가들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보조작가로 전락하고 말았어요. 그렇게 그는 잊혀져 가는 듯 보였답니다. 하지만 유럽의 누벨바그 작가들이나 미국의 일부 평론가, 영화학자 등 버스터 키튼에 대한 홀대와 과소평가를 안타까워하며 그의 복귀를 열망했던 이들도 많았죠.

 

 

 

<제너럴 The General>(1926)(좌)과 노년(우)의 버스터 키튼

 

[츨처: IMDb.com]

 

 

버스터 키튼이 강렬한 인상으로 재등장한 것은 빌리 와일더(Billy Wilder) 감독의 <선셋 대로 Sunset Blvd.>(1950)에 조연으로 출연한 장면이었어요. 글로리아 스완슨(Gloria Swanson)이 여전히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과거 무성영화 스타로 열연한 이 영화에서 키튼은 그녀의 저택에 초대돼 카드 게임을 하는 역할로 잠깐 얼굴을 비치죠. 그리고 이어 전성기 때 라이벌이었던 찰리 채플린의 <라임라이트 Limelight>(1952)에 역시 조연으로 출연해 채플린을 보조하는 파트너 역할을 맡아요. 두 작품 모두 초라한 배역이었죠. 하지만 이 두 작품 이후 키튼에 대한 재평가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1960년 미국 아카데미영화제가 그에게 평생공로상을 수여하고, 1965년에는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초대돼 열광적인 환호를 받기에 이르러요. 무려 30여 년 만에 되찾은 영광이었죠. 이로써 그 동안의 모든 회한을 풀었다고 느꼈던 것일까요? 이듬해인 1966년 2월 1일, 영화사에 길이 남을 이 위대한 배우는 폐암으로 눈을 감고 맙니다.


 
버스터 키튼 – 버스터 키튼의 유산

 

전 세계적으로 크게 흥행했던 <캐러비안의 해적 2: 망자의 함>(2006) 초반부에는 원주민들에게 붙잡힌 잭 스패로우 선장이 장대에 묶인 채 슬랩스틱 코미디를 선보이는 장면이 있는데요, 이 씬은 명백하게 버스터 키튼의 1922년작 <흰둥이 Paleface>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캐러비안의 해적 시리즈를 감독한 고어 버빈스키(Gore Verbinski)는 여러모로 키튼의 열혈팬임에 틀림 없어 보여요. 그의 최근작 <론 레인저 The Lone Ranger>(2013) 속의 기차 추격씬 역시 키튼의 1926년작 <제너럴>을 상당 부분 오마주하고 있거든요.
 

 

<셜록 주니어 Sherlock Jr.>(1924) (좌)와 <프로젝트 A Project A>(1983) (우)

 

[츨처 : IMDb.com]

 

또 버스터 키튼을 정신적 스승이라고 부르며 그의 아크로바틱 연기를 재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배우로 성룡을 꼽을 수 있는데요, <폴리스 스토리>, <쾌찬차>, <프로젝트 A> 등 성룡이 출연한 영화들의 액션씬 곳곳에서 키튼의 흔적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랍니다. 물론 황당무계한 개그 속에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 주성치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버스터 키튼의 후학 가운데 가장 그에게 근접했던 것은 <윌로씨의 휴가 Les vacances de Monsieur Hulot> (1953) 등으로 유명한 자끄 타티(Jacques Tati) 정도가 아닐까 싶어요.

 

이처럼 버스터 키튼은 그의 뒤를 잇고자 하는 수많은 배우들과 영화인들에게 전범(典範)을 제공하며 여전히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당대의 공간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영화 속으로 끌어들여 시공을 초월한 확장 가능성을 열어 나갔던 그의 발자취가 온갖 현란한 특수효과와 첨단 시각효과들이 난무하는 요즈음 오히려 더 커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네요.

 

영화평론가 허지웅이 버스터 키튼 사망 50주기를 맞아 썼던 글 가운데 한 문장을 인용하며 이번 포스팅을 마감할까 해요.

 

 

“왜 우리들은 위대한 인간의 진면모를 그의 생애 동안 알아채지 못하고,

늘 한 발짝 늦게 발견한 뒤 탄식하게 되는 걸까.”

 


 
버스터 키튼의 연기를 짧은 글로 다 묘사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직접 확인하시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돼 링크를 첨부합니다. (☞ 버스터 키튼 영상 보러가기)

 

버스터 키튼의 진면목을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다면 좋겠네요. 물론 유튜브에서 버스터 키튼을 검색하면 훨씬 많은 자료들을 찾아 보실 수 있답니다. ^^ 버스터 키튼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고 싶은 분들은 그의 공식 홈페이지와 인터넷무비 데이타베이스 'IMDb' 등을 참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