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 21. 14:14
슬픔과 눈물, 그리움으로 얼룩진 주옥 같은 문장이 담긴 고전 속 눈물 편지는 옛 선인들의 삶과 사상을 살피는 계기가 되어준답니다. 오늘은 문화사학자인 신정일 우리땅걷기 이사장으로부터 '옛 고전으로부터 길어 올린 눈물과 슬픔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해요.
슬픔은 인간의 본성이다. 본성이 근원적으로 표출되거나 승화될 때, 그 슬픔이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슬픔이 개인은 물론 한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견인차 역할을 해요. 목 놓아 울고 났을 때, 후련함 또는 맑은 정신과 해방감을 느끼는 것은 그런 연유랍니다.
그러한 슬픔은 시공을 뛰어넘어 누구에게나 머물러 있답니다. 현존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역사 속의 수많은 인물들의 삶 속에도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 많아요. 이는 슬픔이 현실이고, 삶이라는 증거일 거예요.
“사람은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슬픔을 동시에 느낀다.” 이는 공자의 말이에요. 슬픔이 단지 슬픔으로만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슬픔이 너무 아름답게 승화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죠. 역사 속의 선각자들이 남긴 글과 이름난 사람은 아닐지라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글들 속에서도 슬픔이 있어 더 아름다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어요. 그 슬픔이 시대를 넘나들며 현재 우리가 겪는 슬픔과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지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권문해가 아내가 죽자 지은 제문을 살펴보도록 해요.
“오호, 서럽고 슬프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우주에 밤과 낮이 있음과 같고 사물의 시작과 마침이 있음과 다를 바 없는데, 이제 그대는 상여에 실려 저승으로 떠나니 그림자도 없는 저승, 나는 남아 어찌 살리. 상여소리 한 가락에 구곡간장 미어져서 길이 슬퍼할 말마저 잊었다오. 상향(尙饗).”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슬픔, 뼛속까지 사무치는 그 슬픔은 조선시대 사대부라고 해서 덜한 것이 아니랍니다. 무오사화 당시 서른셋의 나이로 죽임을 당한 김일손이 그 형님을 위해 지은 제문은 또 얼마나 슬프고 가슴이 아린지요.
“여러 조카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친한 친구가 와서 곡을 하는데, 형은 홀로 듣지 못하고 한 번 눕고 일어나지 아니 하니, 어찌 번거롭고 시끄러운 이 세상을 슬퍼하심이 이처럼 극단에 이르렀나이까. 아, 꿈이란 말입니까.”
글을 읽다 보면 마치 김일손의 통곡소리를 바로 옆에서 듣는 것만 같아요.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은 아들의 전사소식을 듣고서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理致)에 마땅하건만,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무슨 이치가 이다지도 어긋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일기에 썼고, 어머니의 임종 소식에는 “나는 빨리 죽기만을 기다린다.”고 했어요.
고려 말 야은 길재, 포은 정몽주와 함께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인 이색은 조선에 합류하지 않고 방랑의 길을 떠났답니다. 68세가 되던 5월 그는 그의 고향인 여강(지금의 여주)으로 갔어요. 그때 그의 문생(門生)이 그를 찾아왔다. 그는 그 제자를 붙들고 지나간 서럽던 날들을 얘기하며 하루 종일 통곡했다고 해요. 그때 산을 내려오며 지은 시는 이러했답니다.
‘소리를 안 내려니 가슴이 답답하고 소리를 내려 하니 남의 귀 무섭구나. 이래도 아니 되고 저래도 아니 되니. 에라, 산속 깊이 들어가 종일토록 울어나 볼까?’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생기는 슬픔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도 물론 슬픔이지만, 가장 커다란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서 비롯되는 슬픔일 거예요. 죽음이란 무엇인가요? 지상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잊히고 사라져 간다는 것이고. 무(無)로 돌아간다는 것이랍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듯, 간장이 다 녹아 내리는 듯한 그 슬픔을 표현할 길이 없어요. 단지 그 슬픔의 언저리만 맴돌 뿐이고 정작 슬픔은 저 허공 중에서 깔깔거리면서 슬퍼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죠.
여러분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으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으신가요? 그래서 피를 토하듯 피투성이의 영혼이 통곡하는 듯한 글을 써 본 적이 있으신가요? 옛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 혹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위해서 “오호, 슬프고 슬프다.”고 하면서 애사(哀辭)나 제문(祭文)을 지었답니다. 그래서 담헌 홍대용이 친구가 죽자 그 제문에 썼던 글 한 구절이 더 가슴을 저며요.
“글자마다 눈물 방울, 그대 와서 보는가?”
송나라 때의 빼어난 문인인 구양수(毆陽修)는 다음과 같이 말했답니다.
“곤궁함을 겪은 뒤라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詩窮而候工).”
편안하고 안락한 삶에 파묻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지내는 사람은 사물의 참 모습을 살필 수 없고, 따라서 좋은 시를 쓰지 못한다는 말이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다운 기쁨 역시 진정한 슬픔을 겪은 뒤라야 깨달을 수가 있겠죠! ≪주역(周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요.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그림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
그래요.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글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 슬픔, 어디 한 군데 트인 곳이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는 꽉 막힌 답답한 나날, 그것이 우리를 슬픔이라는 망망한 큰 바다로 나아가게 하고, 그 슬픔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움의 뜻을 아는 이라야 나의 슬픔을 알 수 있어라.”라고 말한 괴테의 글과 같이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겪은 뒤에라야 인생의 비밀을 알게 될 거예요. 그래서 ‘이해의 기쁨은 슬픔이고 슬픔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이 더 가슴을 치는지도 몰라요. 슬픔은 매일 저렇게 파도처럼 밀려오고 또 밀려가는데. 슬픔의 기억은 언제까지 눈물을 자아낸 뒤 더 충만한 기쁨을 선사할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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