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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예술로 피어난 섬'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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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25. 16:58




논두렁 사이를 구불거리며 바다로 흘러내리는 진도의 길들은 마치 아리랑 장단 같아요. 애절하게 끓어 넘치던 진도아리랑의 한 소절. “…임이 죽어 극락을 가면 / 이내 몸도 따라가지 / 다려가오 잘 다려가오 / 우리 임 뒤 따라서 나는 가네…”

질러가지 않고 굽이굽이 휘어지는 진도의 바닷가 마을의 황톳길에서는 이런 유장하고 애절한 가락이 절로 떠올려져요.



전남 진도. 이제는 쉽지 않은 여행지가 된 곳. 지난해 그 섬 앞바다에 속절없이 침몰했던 세월호의 비극 때문이에요. 그러나 돌이켜보면 진도의 비극은 세월호뿐만 아니랍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래서 제 속으로만 삭여야 했을 비극과 한(恨)이야말로 진도의 뿌리예요. 이 한이 비로소 노래가 되고 화선지 위의 그림이 됐어요. 진도의 유장한 슬픔의 노래, 그리고 마른 붓질로 그려낸 거칠되 폐부를 찌르는 그림은 모두 이렇게 만들어진 것들이랍니디.







어차피 전남 해남에서 다리 건너 진도 땅으로 들어서면 세월호는, 그리고 팽목항은 피할 수 없는 노릇이랍니다. 한 해가 더 지난 일이어도 그렇다. 애써 외면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호기심으로 찾아가 볼 일도 아니지요. 그래서 진도를 찾는 외지인들은 둘로 나뉜답니다. 팽목항을 가거나, 아니면 가지 않거나. 결정은 온전히 여행자 몫이에요. 팽목항을 찾아가겠다면 지도가 없어도 된답니다. 나뭇가지마다, 전봇대마다 여태 나부끼는 노란 리본들이 팽목항으로 이어지는 길을 알리고 있으니 말이죠.


세월호의 비극을 가장 가까이서 목도한 진도 사람들의 안타까움과 슬픔은 컸지만, 어디 유가족이나 실종자 가족에다 비할까요. 그들은 드러내놓고 슬퍼하지도 못했죠. 그렇다고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는 것도 아니었답니다. 사고 이후 섬을 찾아오는 발길은 뚝 끊겼고, 생업은 뒷전이었어요. 그래도 생때같은 아이들의 죽음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갔어요팽목항을 끼고 있는 서망해변 백사장에는 갈매기들만 제 발자국을 찍고 있었어요. 무거운 마음 탓에 항구 쪽으로는 좀처럼 다가설 수 없었답니다. 그렇다면 이제 앞으로 어떻게 진도를, 그리고 팽목항을 찾아와야 할까요. 주민들은 혼돈스러워했답니다. 섬안에 고통의 기억들을 되살리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섬을 찾은 이들에게 “다 잊으라”고 하는 게 바른 것인지. 누구도 답을 주지 않았지요.






<진도타워에서 내려다본 진도대교>



세월호 사고가 그렇듯이 마음 편히 울 수도, 누구도 원망할 수도 없는 죽음들이 오래 전 진도에 또 있었어요. 그중 하나가 이순신의 ‘명량대첩’이랍니다. 13척의 배로 왜선 133척을 수장시킨 영웅적인 승전. 그러나 진도사람들에게 명량해전은 한편으로는 처참한 비극을 뜻하기도 해요. 진도의 비극은 명량해전 직후에 시작됐어요.

이순신 장군은 싸움에서 이기고 나서 신안의 당사도로 돌아갔답니다. 패전한 왜군들은 복수를 다짐하며 앞 다투어 진도에 상륙했고,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어요. 승전의 환호 뒤에 가려진 처참한 살육을 진도 사람들은 고스란히 감내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쌓인 죽음을 묻은 곳이 진도대교를 넘어 진도읍으로 드는 18번 국도변에서 만나는 ‘정유재란 순절묘역’이에요. 확인된 것만 232기에 달하는 무덤이 아예 하나의 큰 언덕을 이룬 자리지요.



<울돌목에서 멀지않은 벽파진에 1956년 세워진 이충무공 전첩비>



이쯤 해서 진도의 ‘왜덕산’에 얽힌,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릴게요. 순절묘역에서 5㎞ 남짓 떨어진 고군면 내산리 내동마을 동쪽에 야트막한 야산인 ‘왜덕산’이 있답니다. 명량해전 당시 진도 사람들이 떠내려온 왜군의 시신을 거둬 묻었던 곳이지요. ‘왜군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의미로 산 이름도 그렇게 붙여진 것이라 해요. 애초에 100여 기의 무덤이 있었으나 유실되고 절반쯤만 남아 있답니다. 진도 사람들은 대체 왜 칼날을 겨눈 적군들의 시신까지 거둬서 묻어주었던 것일까요.


세계 전사에서 적의 시신을 수습해 안장한 경우가 이곳 말고 또 있을까요? 아마 바닷가 사람인 진도 사람들은 떠내려온 시신들을 차마 그냥 두고 보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건져내 묻었을 것이었겠죠. 적의 죽음마저도 버려두지 않고 거둔 것은 일본인들에게도 감동이었던 듯해요. 명량해전에서 전사했던 일본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고향 주민들이 해마다 진도의 축제에 참석하고 이곳을 찾아와 양국의 평화를 기원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랍니다.


명량해전이 펼쳐진 울돌목은 진도대교 뒤편에 말끔하게 단장한 진도타워에서 한 눈에 내려다보여요. 굳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타워에 오를 것도 없이 칼을 빼 든 이순신 장군 동상 아래에 서면 20리까지 빠른 물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울돌목의 거센 물살이 한 눈에 내려다보여요. 여기서 멀지 않은 벽파진에는 1956년에 세워진 이충무공 전첩비가 서있답니다. 거대한 바위로 거북을 깎아 그 위에 승전의 기록을 담은 비석을 올렸어요. 비석에 새겨진 진도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의 독특한 필체의 국한문 글씨가 특히 인상적이랍니다.






<삼별초의 용장산성이 함락된 뒤 궁녀들이 몸을 던졌다는 궁녀둠벙>



진도 사람들의 억울한 죽음과 한의 이야기는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요. 지금으로부터 740여 년 전, 그러니까 명량대첩이 있기 320여 년 전의 일이랍니다. 몽골군에 항복한 고려정부군에 반기를 든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1,0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이곳 진도 벽파진으로 내려왔어요. 삼별초는 진도에 용장산성을 쌓고 자주와 평등세상을 기치로 내걸며 또 하나의 고려정부를 세웠어요. 삼별초가 진도를 택했던 건 쉽게 건널 수 없는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울타리로 삼기 위함이었을 거예요.


그러나 삼별초는 진도로 내려온 지 불과 아홉 달 만에 여몽연합군에 의해 함락됐답니다. 삼별초를 이끌던 배중손 장군은 임회면 굴포리 포구에서 싸우다 전사하고, 삼별초가 새로운 왕으로 세운 온왕도 의신면의 논수골에서 잡혀 죽었어요. 궁녀들은 창포리의 ‘궁녀둠벙’에 몸을 던졌는데 그 흔적이 진도 땅에 뚜렷하게 남아 있답니다. 임회면 굴포리의 포구에는 배중손 장군과 삼별초 병사들을 기리기 위한 제당이 있어요. 기록에는 뚜렷하지 않지만 삼별초가 무너질 때 또 얼마나 많은 진도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까요. 삼별초가 당도한 때부터 진도는 곧 ‘반역의 땅’이었으니 주민들이 어떤 취급을 당했을지는 익히 짐작이 되고도 남아요.


세월호도, 명량대첩도, 삼별초도 진도의 거친 물살이 아니었다면 맞닥뜨리지 않았을 비극이었을지도 몰라요. 반복되는 억울한 죽음. 그리고 포말을 일으키는 거센 물살이 나눈 육지와 섬의 경계. 진도의 소리에 스며든 한의 정서는 거기서 자라는 것은 아닐까요. 비통한 죽음과 살아남은 자의 가슴 치는 억울함이 그 탁하고 짙은 진도 소리로 빚어진 건 아닐까요.




알아두면 좋은 팁!


진도에서 '어디서' 묵을까?

진도를 찾았다면 펜션이 좋을 것 같아요. 금갑리해수욕장 부근의 ‘팔도한옥펜션(061-544-7316)’을 추천 드려요. 한옥 형태지만 실내는 최신 설비로 꾸며져 있는 곳이랍니다. 세방낙조전망대 부근 지산면 가학리의 ‘낙조펜션(061-542-3006)’에서는 해질녘 붉게 물드는 바다를 볼 수 있답니다.



진도에서 '무엇을' 먹을까?

  


해남에서 진도대교를 건너기 직전에 자리잡은 ‘임하기사식당(061-535-3121)’은 한상에 7,000원짜리 푸짐한 백반을 낸답니다. 진도대교를 건너 우회전하자마자 우측에 있는 ‘진도통나무집(061-542-6464)’의 1만 8,000원 간장게장 정식은 진도 사람들도 알아주는 맛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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