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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쉴까? 어떻게 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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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24. 15:39




“지금쯤 가기 좋은 여행지 한 곳만 추천해주세요.”

필자가 여행작가라는 이름으로 이곳 저곳 강연을 다니다 보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난감할 수밖에 없다. 대답이 조금 길어지는 이유이기도 해요.


“어디로 갈지 결정하기 전에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왜 여행을 가고자 하는지. 스스로 가장 소망하는 게 무엇인지. 만약 조용히 쉬기를 원한다면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곳을 선택하는 게 좋습니다. 예를 들면 여름에는 해수욕장이나 유원지 같은 곳을 피해서 조용한 산사를 찾아보고, 가을이라면 단풍 행락객을 피해서 한적한 바닷가 마을을 찾아가보는 겁니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가서 무엇을 하느냐, 무엇을 얻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니 대답은 제게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의 내면에 있는 것이지요.”


누구는 고개를 끄덕이고 누구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막막한 눈길을 보내기도 해요. 하지만 제게는 그 이상 알려줄 것도 없었답니다. 구체적으로 어디 어디를 가라고 이야기할 경우, 가본 다음에 만족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크게 실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여행은 그만큼 주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행위랍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들어진 나를 벗어 던지고 본래의 나, 즉 진아(眞我)를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일상에서 늘 만나는 나는 허세를 둘러쓴 나이거나, 사람들 틈에서 주눅이 든 나이거나, 거대한 공장 속의 부품으로 전락한 나일 가능성이 높답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누구의 자식이거나 아버지이거나 어머니, 누구의 친구로 자리매김해진 나이죠. 그건 원래의 내가 아니라 관계 속의 나일 뿐이에요. 그렇게 쉴 틈 없이 달리기만 하는 나는 어딘가 상처를 입었거나 고통을 견디고 있게 마련이에요.


그 아픈 곳을 발견하고 치유하기 위한 수단이 여행이랍니다. 여행은 진짜의 나를 비쳐주는 거울이에요. 익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 낯선 풍경 속에 나를 맡겨두고 기다리면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답니다. 삶터와 일상에서는 들을 수 없던 소리. 그렇게 듣는 과정이 곧 진단이에요. 온갖 질병의 형태가 그렇듯이 내면의 소리 역시 일정하지 않답니다. 질시나 미움, 주변 사람에 대한 불만이 병의 원인일 수도 있고, 근원을 쉽사리 알기 어려운 슬픔이 문제일 수도 있고, 제어하기 어려운 욕망이 나를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어요.


여행자는 그 소리들을 잘 들어서 스스로 처방전을 써야 해요. 그리고 치유에 들어가야 해요. 처방전이나 치유는 특별하지 않아요. 치료에는 어떤 행위, 즉 수술을 하거나 침을 맞거나 약을 먹는 게 필요하지만 치유는 가만히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가능해요. 그것을 휴식이라고 불러도 된답니다.


마음에 드는 풍경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치유를 기다리는 일. 이 삭막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쉼표랍니다. 쉼표를 찍지 않은 문장의 급한 호흡을 느껴본 사람은 쉼표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잘 알아요. 사람의 삶이야말로 그 쉼표가 필수 요소랍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멀리 떠날 필요는 없어요. 일에 쫓기는 현대인에게 매번 그만한 시간과 비용이 주어질 턱이 없으니. 틈이 날 때 일상을 떠나 가까운 교외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히 있답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 가장 좋겠지만 절대 타협할 수 없는 불변의 조건은 아니랍니다. 가족이나 동행이 있더라도 틈틈이 스스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면 된답니다.







“선생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여행지는 어디였나요?”

이는 필자가 두 번째로 많이 받는 질문이랍니다. 그 역시 대답하기 난감해요. 저는 어디를 가도 쉽게 감동받는 여행중독자이기 때문이에요. 심지어 집 문을 나서는 순간 목적지가 어디였든 여행이 시작된다고 믿는답니다. 그러니 내가 만족했다고 다른 사람까지 만족한다는 보장은 조금도 없는 것이죠. 여행의 만족도는 각자의 성품이나 취미, 그 당시의 환경이나 기분, 또는 동행자가 누구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에요.


물론 나라고 특별했던 여행이 없었던 것은 아니랍니다. 최근에 나온 산문집에도 쓴 내용이지만, 제게 가장 인상 깊었던 여행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척 엉뚱한 것이었어요. 여행의 만족도는 그만큼 주관적이라는 증거이기도 해요.


국내 여행 중에서 가장 좋았던 곳을 꼽으라면 저는 고창 선운사 주차장과 안동의 병산서원이 먼저 생각나네요. 이런 말을 하면, “뭐요? 주차장이라고요?” 잘못 들은 게 아니냐는 듯 반문부터 돌아오게 마련이에요. 하지만 주차장이 분명하답니다. 그것만으로도 어디를 가느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진술이 증명되지요.



여러 해 전의 일이었어요. 그 무렵은 개인적으로 무척 어려운 시기였답니다.지난 다음에 생각해보면 인생길의 가파른 고비를 넘고 있었다. 마침 가까운 이 몇 명이 가벼운 여행을 떠날 기회가 있었답니다. 여행작가로서의 ‘일’이 아닌 ‘순수한 여행’이었어요. 선운사를 들르기 위해 차에서 내렸는데, 마침 점심시간이었어요. 누군가의 제안으로 주차장 근처의 벚나무 아래서 도시락을 먹기로 했다.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됐답니다. 봄은 익을 대로 익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고, 바람은 바람이라도 난 듯 쏘다니던 한낮이었어요. 바람은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었어요. 오갈 때마다 벚나무 가지를 흔들어 벚꽃을 마구 뿌렸답니다. 그 아래에는 영화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펼쳐지고는 했답니다. 꽃잎은 밥에도 반찬에도 술잔에도 분분히 떨어져 내렸어요. 꽃잎이 떨어져 앉는 밥그릇과 술잔… 쇠로 된 심장을 가진 사람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 풍경이었어요.



또 하나 감명 깊었던 여행지, 병산서원에 간 날은 비가 많이 내렸답니다. 하회마을에 답사 차 갔다가 들른 길이었고, 그날 역시 동행이 있었어요. 사실 이곳은 길게 설명할 것도 없답니다. 비 오는 날 병산서원 만대루(晩對褸)에 올라가본 사람은 이미 모든 상황을 짐작했을 테니. 기둥과 기둥 사이로 보이는 일곱 장의 풍경화, 즉 자연이 그려주는 일곱폭짜리 병풍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최고의 예술이었어요. 절벽을 치마처럼 펼쳐놓은 병산과 그 절벽을 에워싸고 유유히 흐르는 강. 그 풍경 위에 엷은 커튼을 치듯 내리는 비….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는 등이 휠 것 같던 짐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아름다운 풍경은 날선 마음을 얼마나 부드럽게 어루만지는지. 그렇게 찍는 쉼표야 말로 각박한 세상을 걸어갈 수 있게 하는 힘이랍니다. 진정한 휴식은 여행을 통해 나를 씻어내는 것으로 완성된답니다. 남들이 좋다는 곳이 아닌,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을 찾아가 스스로가 자연 속의 작은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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