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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장려상 - 엄마를 내려다 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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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5. 21. 14:13

어릴 적 나는 엄마의 팔을 베는 대신 엄마의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가 눕곤 했다. 엄마가 팔을 옆으로 뻗고 누웠을 때 몸과 팔이 만나 이루는 직각 정도의 그 공간, 그 자리를 나는 그렇게 좋아했다. 내가 엄마의 팔 밑에, 몸 옆에 내 몸을 딱 붙이고 누우면 엄마는 팔을 접어 나를 감싸 안아주었다. 나는 그 안에서 어떤 좋은 잠자리보다도 더 큰 포근함을 느꼈다. 누우면 금방 잠이 드는 습관은 어쩌면 그때부터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재밌는 건,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자리는 분명 엄마의 겨드랑이 밑이었는데 엄마와 나는 그렇게 누울 때마다 “날갯죽지 밑에 눕는다.”고 말했다. 엄마는 나를 그렇게 키웠다. 당신의 날개를 접었다 폈다 불편하게 놓으며, 그 밑에 누운 내가 너무 무겁지 않도록 당신의 날개에 얼마간의 힘을 줘 가며, 그렇게 나를 아꼈다.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스물두 살이 된 지금도 그 자리를 좋아한다. 내가 아는 엄마의 냄새가 충만하고 엄마와 나만이 아는 자세가 어렵지 않게 만들어지는 그곳에 몸을 누이면 세상 어떤 것도 나를 공격하지 못할 것만 같다.


한 가지 더 고백하자면, 그 자리에 누워 보지 못한 지가 벌써 수년이 넘었다. 엄마의 날개는 이제 나를 배려하지 못할 정도로 힘이 빠졌고 자는 딸을 위해 한 자세로 언제까지고 누워 있지 못할 몸이 되었다. 그럼에도, 조금 지친 날 집에 들어가면 나는 아직도 그 자리에 눕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렇게 아직도 나는 그 자리의 기억으로 위로를 얻으며 살아간다.


엄마와 나 사이의 아름다운 기억은 날갯죽지뿐만이 아니다. 내가 살아온 22년의 세월, 그 중에서 엄마가 더 이상 내게 줄 힘을 갖지 못했던 2년 정도의 시간을 빼고 어림 잡아 20년의 세월 동안, 나는 엄마의 무릎에 내 머리를 누인 채 귓밥을 파 주는 그의 손길을 받아먹는 시간을 사랑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는 손길도, 귀가 잘 보이도록 귀 뒤에 꽂아주는 손길도, 내 귀를 조금은 억센 힘으로 이리저리 들춰보는 손길까지도 나는 사랑했다.


그 중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반대편 귀를 파기 위해 엄마 쪽으로 돌아누우라고 할 때였다. 왼쪽 귀를 파기 위해 앞을 바라봐야 했던 때와 달리, 오른쪽 귀를 팔 때엔 엄마의 배 말고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럼 나는 그저 눈을 꼭 감고 엄마의 배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곤 오른쪽 귓밥 파기가 끝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살금 잠이 들었다. 그렇게 잠시 잠을 청하고 나면 나에겐 형용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생겨 있었다.


엄마가 일상을 유지할 힘을 거의 모두 잃게 된 지 두 달 즈음이 지났을까, 엄마의 머리맡에 앉아 말을 건네다 우연히 엄마 귀 쪽의 피지를 보게 되었다. ‘귀를 파 주어야겠다.’ 싶어 면봉과 휴지를 챙겨 머리맡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엄마의 귀를 파줄 생각을 다 했다며 은근히 대견한 마음을 속으로 지닌 채 귀를 파기 시작한 순간, 나는 나에게 모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면봉을 넣었다 빼기만 해도 귓밥이 흥건히 묻어나올 만큼 엄마의 귀는 방치되어 있었다. 엄마가 이렇게 오래 누워 있는 동안 귀를 파 줄 생각을 이제야 했다니. 뿌듯하지 않았다. 깨끗해지면 깨끗해질수록 미안했다. 엄마가 사랑으로 내게 주었던 무한한 힘들을 나는 왜 진작 되돌려 줄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인지 괴로웠다. 엄마는 10년이 넘도록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내게 “귀 파자.”라며 당신의 무릎으로 나를 불렀는데, 나는 두 달이 넘어가도록 엄마의 귀를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방치되었던 엄마의 귀에는 귓밥만 많은 게 아니었다. 귀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면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참았다. 그것은 나의 부족함만큼의 냄새였다. 부족한 딸이라 미안하다고 말했다. 엄마는 고맙다고 했다. 나도 고맙다고 했다.


이제는 내가 내 힘을 엄마에게 나눠 준다. 내가 엄마의 날갯죽지 밑에서, 엄마의 무릎에서 꿀꺽꿀꺽 받아먹었던 엄마의 힘들을 내 안에 잘 충전해 두었다가 이제 다시 엄마에게 주려고 한다.


비록 나는 내 날갯죽지 아래 엄마를 품지 못하지만, 엄마에게 가장 편한 자세가 무엇인지 알아채 주지 못하지만, 엄마가 기억하는 당신 어머니의 체취를 전해줄 수 없지만. 반대쪽 귀를 파기 위해 돌아눕는 것조차 힘겨워 하는 엄마에게 나는 등을 밀어주는 것 밖에 어떤 것도 할 수 없지만, 어떤 때는 잠이 와서 힘들어 하고 어떤 때는 잠이 오지 않아서 괴로워하는 엄마를 내 배만으로 편안히 잠들게 해 줄 능력이 내게는 없지만. 우리 엄마가 바스러질까 조심스럽게, 혹여나 무겁게 느낄까 걱정하면서, 혹여나 아플까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온 몸에 힘을 준 채 엄마를 품는다. 내 이마를 내려다보던 엄마처럼 이제는 내가 엄마의 이마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쓸어 주며, 이 모든 것을 정말 아기인 것마냥 받아들이고 있는 엄마를 토닥거리며, 내 힘을 엄마에게 흘려 보낸다. 그리하여 충전이 되면 다시 일어나 나를 품어 주리라 믿으면서. 다시 그 날갯죽지를 활짝 펼쳐 주리라 기대하면서. 병상에 누운 동안 체취마저 변해 버린 엄마지만 우리가 행복했던 그 자세를 몸으로 기억할 엄마를 사랑하면서. 그렇게 오늘도 엄마를 내려다보는 딸이 된다.


*본 게시물은 2019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수상작으로 상업적 용도의 사용, 무단전제, 불법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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