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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강의 BIG 10, 정유정 작가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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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5. 16:00

전직 간호사 - 습작기간 6년 동안 공모전 열두 번 응모 끝에 당선∙42세 늦깎이 등단 - 출간한 소설마다 베스트셀러 등극 – ‘7년의 밤’ 등 여러 작품이 영미권을 비롯해 프랑스, 독일, 일본 등 해외 20여 개 국에서 번역·출판돼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까지 받고 있는 작가.

2013년부터 매년 교보문고가 주최해 오고 있는 ‘명강의 Big 10’ 7월의 주인공, 정유정 작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두 달 전 자신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 '진이, 지니'를 출간한 정 작가는 ‘한국의 스티븐 킹’이라는 닉네임이 있을 만큼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 탄탄한 팬층을 구축하고 있는데요, 이를 입증하듯 강연장은 빈 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어요. <진이, 지니>의 집필 과정을 통해 자신이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과 방법'을 90여 분간 친절하고 실감나게 설명해 주어 청중의 큰 공감을 얻었습니다. 지금부터 저와 함께 그 의미 있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제가 정유정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독서광인 오빠가 <7년의 밤>을 추천해 주어서였어요. 2011년 3월 출간된 이 책은 무려 523쪽에 달하는 장편이라서 책 두께가 주는 부담감과 공포 스릴러물이라는 점 때문에 쉽게 손이 가진 않았는데요,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 집행인이었다’라는 범상치 않은 첫 문장을 접하고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새도록 읽다 보니 무박 2일에 걸쳐 독파를 했었답니다. 그 다음 상황이 어찌 될지 궁금해 책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놀라운 흡인력, 몰입감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어요. ‘정유정’이라는 이름이 머릿속에 각인된 계기가 됐죠.  

기대감에 부풀어 일찌감치 강연장을 찾았고, 쇼트커트에 올블랙 패션으로 성큼성큼 씩씩하게 연단에 오른 그의 첫인상은 걸크러시 매력이 넘치는 이웃집 언니 같았습니다.


이야기는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극작가 케네스 버크는 “이야기는 인간 삶의 도구다” 라고, 언어학자 조나단 갓셜은 ”인간은 스토리텔링 애니멀, 즉 허구를 창작하는 종족이다”라고 말합니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태고에 하찮은 생명체에 불과했던 인류는 창작하는 언어, 즉 허구를 말하기 시작하면서 나무열매와 그늘을 찾아다니던 사바나 촌놈에서 벗어나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존재로 부상했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허구의 이야기를 실제 이야기처럼 시뮬레이션하고, 모든 일을 이야기적 방식으로 판단하죠. 잘 조형된 허구의 이야기에서 포착한 삶의 전형, 모범들을 자기의 삶에 반영한다고 생각해요.

인간에게 있어 이야기는 단순히 취미나 교양이 아니라 거의 본성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러한 ‘이야기’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이 바로 작가예요.”

정 작가는 그의 상상 속 7만 년 전 사바나 촌놈 1,2,3,4호의 에피소드를 들려주면서 그들이 이야기를 통해 공유한 개념이 진화의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유전자처럼 새겨짐을 시사했습니다.


작가의 테마, 정유정의 테마

“작가라고 해도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아니고요, 대부분의 작가들은 한두 가지의 테마를 변주합니다. 헤밍웨이는 죽음에 직면한 인간에 대해, 찰스 디킨스는 아버지를 찾아 다니는 소년의 이야기를 일관되게 그리고 있죠. 저는 두 가지 주제에 대해 변주하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하나는 인간의 어두운 본성에 대한 것, 다른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것입니다. 자유 의지는 어릴 때 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자기 인생을 통제하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유정 작가가 말한 본인의 테마 중 전자에 해당되는 작품이 바로 악의 3부작이라 불리는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후자에 속하는 것이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 <내 심장을 쏴라>, <진이, 지니>입니다. 

정 작가는 2007년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로 등단한 이래 2009년 <내 심장을 쏴라>, 2011년 <7년의 밤>, 2013년 <28>, 2016년 <종의 기원>, 2019년 <진이, 지니>까지 약 2년 반~3년을 주기로 총 6편의 장편 소설을 출간했습니다. 

이 중 <내 심장을 쏴라>와 <7년의 밤>이 각각 2015년, 2018년에 영화로 개봉됐고, <28>과 <종의 기원>도 영화화 판권이 팔렸다고 합니다.


저는 스릴러물인 악의 3부작을 모두 읽었는데요, 특히 묘사력이 뛰어난 그의 문장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읽다 보면 종종 제가 그 현장에 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어 섬뜩해지기도 했어요. 

인간의 어두운 숲에 잠든 야수들을 이야기 주술을 빌려 밝은 들판으로 불러낸 이야기라고 작가는 설명하지만, 긴장감과 경계심을 장착한 채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내려면 어느 정도의 담력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철두철미한 사전 조사를 거쳐 마치 고시 공부하듯 온 힘을 짜내며 소설을 쓰는 작업 방식으로 소문난 정 작가의 내공은 1장 60여 쪽만 읽어도 바로 인정하게 되는데요, 사실 <진이, 지니>는 그가 원래 쓰려고 구상했던 소설이 아니라고 합니다.


<진이, 지니> 그 예사롭지 않은 탄생 과정 

<진이, 지니>는 사육사 인간 진이와 영장류인 보노보 지니의 교감을 통해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사흘간의 판타지 모험 소설인데요, 35세 여성 진이가 죽음 앞에서 인간의 마지막 자유의지를 구현하는 이야기입니다.

정유정 작가가 중환자실 간호사로 일하던 무렵, 간암으로 3년간 투병하던 어머니가 그의 곁에서 죽음을 맞기까지 그저 심장만 뛸 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사흘의 순간이 29년이 지난 어느 날 그에게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 소설은 바로 이 기억에서 출발했다고 해요. 


“'바다에 갇힌 사람들'이라는 SF 소설을 쓰려고 차근차근 준비하며 해양학, 지질학 관련 책과 자료를 다 읽고 마지막으로 남은 양자물리학 책에서 "시간의 어떤 순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는 않는다"라는 문장을 본 순간 바로 엄마의 죽음이 떠올랐어요. 아무런 미동이 없는 엄마를 보면서 엄마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 많이 생각했죠. 소설을 구상하던 날에도 엄마를 생각하다가 제가 만약 그 순간에 가 있고 죽기 전에 신이 사흘의 시간을 준다면 어디로 갈까 상상하다가 유인원이나 원숭이, 인간으로 분화하기 전 원형 영장류 조상이 살았던 시절에 가 보고 싶었어요. 이 하찮은 생물이 어떻게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들을 현실로 불러오면 재밌겠다 싶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침팬지를 지금 현실로 불러오는 상상에까지 미치게 된 거죠.”


자료 덕후인 그는 곧 침팬지의 특징이 인간 여자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해요. 공격적이고 서열을 중시하는 수컷 중심의 사회여서 주인공 여자 사육사와는 어울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반면, 인간에게 발견된 지 100년밖에 안 된 보노보는 암컷 중심의 모계 사회이고 감성 지수가 발달해서 상대의 마음을 읽는 데 능하기 때문에 진이의 페르소나로 적격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서울대공원 우경미 사육사, 생물학 박사 최재천 교수, 우리나라 보노보 1호 박사 류흥진 님, 침팬지 박사 김예나 님 등 여러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도움을 받은 정 작가는 우리나라엔 없는 보노보를 만나기 위해 구마모토 보노보 생크추어리(sanctuary), 베를린 동물원까지 찾아갔는데요, 야생 보노보와 처음 만난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고 해요. 동공에 초점을 맞추고 눈을 들여다보며 마치 말을 건네는 느낌이 들었답니다. 


초고 쓰기는 노트북 컴퓨터가 아닌 공책 앞면에 손글씨로 휘리릭 약 한 달에 걸쳐 진행합니다. 이야기에도 유효기간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초고를 오래 잡고 있진 않는다고 해요. 초고는 90%가 버려지고 시작과 결말만 남는 편이랍니다. 이제 플롯을 만드는데요, 어떤 사건을 어디에 배치할지 고민하는 과정입니다. 1차 원고를 쓰고 추가 취재에 수정을 거쳐 탈고를 합니다. 탈고 전에 정 작가가 꼭 거치는 과정은 원고를 역순으로 읽어보는 것입니다. 에필로그부터 장 단위로 끊어 뒤에서부터 읽으면서 ‘안 본 눈’이 되어 미처 손쓰지 못한 부분들을 매의 눈으로 찾아내는 과정이죠. 탈고 후엔 출판사 편집부의 피드백을 거쳐 조율된 작품을 세상에 내놓게 됩니다. 


정유정이 제시하는 ‘소설을 시작하는 여섯 가지 질문(개요를 쓰기 위한 조건)’

1. 등장인물은 어떤 사람들인가(개인사 포함)

2. 그들은 어떤 욕망을 가졌는가

3. 그들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4. 그들은 어떻게 그것을 성취하는가

5. 그들은 왜 그것을 원하는가

6.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이에 대한 답을 찾으면 A4 2~3장 분량의 줄거리가 완성됩니다. 이 이야기가 어떤 장르인지를 정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요, 이 안에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정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해요.


청중과의 Q&A를 통해 공개한 ‘소설의 첫 얼굴, 첫 문장 잘 쓰는 원칙’ 

소설 <28>과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의 첫 페이지

1. 대화문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2. 단문으로, 소설 줄거리를 은유할 수 있어야 한다

3. 문장 자체로 강렬해야 한다. 


정유정 소설의 비하인드 스토리

1. 제목 잘 짓는 재주는 없다?! 

그의 작품 중에서 제목을 직접 지은 것은 <내 심장을 쏴라>, <종의 기원>, <진이, 지니>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출판사 편집부에서 바꾼 것입니다. <7년의 밤>의 원래 제목은 ‘해피 버스데이’였다고 해요.


2. 소설 속 인물들의 이름은 주로 주변인 이름에서 차용한다. 

1차 작명은 프로야구 구단 선수 중에서 인물에 어울릴 만한 이름을 골라 살짝 바꾸는 방법을 씁니다. 그동안 기아 타이거즈 선수들을 가장 많이 소환했다고 하네요. ‘진이’는 정 작가의 책을 출간하는 출판사 편집자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3. 작가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은 <내 심장을 쏴라>

이유는 암울했던 작가의 청춘이 투영된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4. 초고는 늘 노트북, 컴퓨터가 아닌 공책에 손글씨로 쓴다.

대략 한 달에 걸쳐 휘리릭 초고를 써야만 글을 쓰고 싶은 내 안의 욕망이 살아 숨 쉰다고 합니다. 


5. 일사천리로 풀린 <진이, 지니>?!

보통 한 달 이상 걸리는 아이디션(개요, 줄거리, 주인공 이름, 제목, 장르 등의 결정) 과정이 <진이, 지니>는 단 하루 만에 끝났다고 해요. 하지만 1년 반에 걸쳐 완성한 1차 원고를 첫 모니터링한 남편이 결말 12장에 이의를 제기했고, 불편한 마음으로 수긍한 작가는 다시 한 달에 걸쳐 수정 후 최종 탈고했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꿈꿔 온 직업 ‘작가’로서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정유정 작가의 목표는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입니다. 오는 9월부터는 새 작품을 위해 칩거할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향후 다작 작가로 거듭나고 싶다면서 차기작을 2년 후쯤으로 예고했습니다. 

강연을 다 듣고 난 후 제게 떠오른 한 문장은 “영화계에 봉테일∙봉준호 감독이 있다면 문학계에는 정테일∙정유정 작가가 있다!”였습니다. 그의 작품을 하나라도 접해 본 여러분이라면 충분히 공감하실 거예요. 

악의 3부작만 읽은 저이기에 왠지 ‘정유정 작가=센 언니’일 것 같은 선입견은 강연 후 이어진 사인회에서 확실하게 무너졌습니다. 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고 눈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어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책 띠지에 적힌 카피처럼 ‘따스하고 다정하고 뭉클한’ 진이와 지니를 저도 서둘러 만나봐야겠습니다. 지금까지 7월의 명강의 BIG 10, 정유정 작가편 리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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