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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임정이야기 1편] 현익철에 이어 백범까지 잃을 뻔한 창사 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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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13. 12:41

1919년 일제에 나라를 잃었지만 대한제국을 대신해 독립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한 상하이 임시정부가 곧 수립됩니다. 3.1 운동 직후죠. 임시정부는 수립 10여 년 만인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의거로 상하이를 떠나 기나긴 고난과 역정의 길을 걷습니다. 마지막인 충칭에 이르기까지 약 8년의 항저우, 전장, 창사를 거쳐 광저우, 류저우, 치장을 거치는 동안 많은 독립투사들이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습니다. 특히 1938년 머문 창사에서는 백범까지 잃을 뻔합니다. 그 현장에 가꿈사가 다녀왔습니다. 


항저우, 전장을 거쳐 창사로 이동

1932년 홍커우 의거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기존에 자리 잡고 있던 상하이를 떠나 타지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 뒤에 임시정부가 있고, 특히 백범이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죠.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1935년까지 항저우에 머물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창사로 이동해 1938년 7월까지 활동을 합니다. 광저우로 이동하기까지 7개월 정도의 짧은 시간이지만 이곳에서 우리 독립운동사에 가슴 아픈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 시작은 민족유일당운동입니다. 독립운동의 역량을 하나로 모아보겠다는 것으로 임시정부 차원에서 본격적인 논의가 일어난 곳이 바로 창사입니다.


아쉽게도 현재 창사 임시정부는 어디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행이 지청천 장군을 중심으로 한 조선혁명당 본부로 사용한 곳(남목청 6호)은 주소가 명확히 남아있어,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터라는 의미로 ‘활동 구지(舊址)’’라고 명명하고,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리는 기념관으로 활용하고 있어요.  


활동구지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창사에서의 활동을 포함한 임시정부 전 기간 활동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전시 내용 중에는 중국 정부의 도움을 받았다는 부분이 강조되어 있어, 당시 한중우호협력이 긴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목청 사건, 백범 목숨을 잃을 뻔하다 

남목청 9호에 있던 조선혁명당 본부는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이 거주했던 곳이기도 하지만 이보다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항일역량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3당 합당의 논의가 있던 곳이라는 점입니다. 김구의 한국국민당,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 등 임시정부를 이끌던 주요 3당의 핵심 인물들이 모였죠. 


1938년 5월 7일, 이 자리에 3당의 통합을 논의하던 자리에 조선혁명당원 이운환이 난입해 권총을쏩니다. 김구 암살 미수사건으로도 불리는 남목청 사건이 발생한 것이죠. 이운환의 총탄에 조선혁명군을 주도하던 현익철 선생이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김구 선생은 중상을, 지청천 장군은 경상을 입었습니다. 이운환이 쏜 첫발을 심장 인근에 맞은 김구 선생은 인근 상아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지만, 의사도 가망이 없다고 할 정도로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상하이에 있던 김구 선생의 아들인 김인에게는 ‘아버지가 피살당했다’는 전보가 갔죠.  

범행 후 중국경비사령부에 체포된 이운환의 범행동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이었다가 분란을 일으켜 제적당하자 앙심을 품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목청 사건은 중국 정부에도 큰 관심 사항이었습니다. 장제스 중국 국민당 총재는 친서와 치료비를 보내는 등 각별한 애정을 보였죠. 


총탄에 맞았지만 의연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김구 선생의 모습이 남아있는 사진입니다. 오른쪽 앉아있는 환자가 김구 선생인데 가슴에 총탄자국이 선명합니다. 이운환의 총탄은 김구 선생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만 선생의 몸 속에 남아 후유증으로 수전증을 남깁니다. 김구 선생의 글씨체를 보면 약간의 떨림이 있는데, 수전증 때문이죠. 이 때문에 백범의 글씨체를 떨림체 또는 총알체라고 부릅니다. 


삼일운동 100주년, 광복 74주년

남목청 사건은 독립운동의 거두 중 한 명이 숨지고, 3당 통합 논의도 중지되는 등 상처를 많이 남겼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은 없지만, 만약 이때 이운환이 난입하지 않았으면 항일투쟁의 역사는 더 강력하고 체계적으로 진행됐을 겁니다.

물론 우리 임시정부 상황과 별개로 중일전쟁은 더 격화되고, 세계 정세도 전쟁 쪽으로 기울어지며, 임시정부는 창사를 떠나 광저우를 거쳐 류저우와 치장으로 옮겨가다 1940년 충칭에 이르러서야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5년 후 모두가 바라던 ‘광복’이 됩니다. 그리고 74년이 흘렀습니다. 

2019년은 삼일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이 된 해입니다. 이 긴 시간은 죽음의 위기까지 겪어가며 독립이라는 단 하나의 꿈을 꾸었던 우리 선열들의 피와 정신이 뭉쳐져 이루어 낸 것이죠. 이 숭고한 희생과 노력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광복절이 되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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